생활의 발견
홍상수 감독, 김상경 외 출연 / 미디어마인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생활의 발견 그리고 박하사탕 - 순수와 생활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

 

 

  경쾌하고 화려한 예고편 그리고 홍삼수 감독의 이제까지와는 매우 다른 유명 배우들의 출현 (오! 수정!을 제외하고), 하여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무언가 다른 분위기를 기대했을 지도 모르겠다. 뭐랄까... 다소 빠른 박자의 스피디한 연애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의 홍상수만의 독특한 풍자 혹은 뉘앙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순간, 나의 기대는 무참히 짓밟혀지고 말았다. 여전히 홍상수 감독의 느릿하고 나른한 이야기 구성과 화면전개, 그리고 역시나 모든 흥미진진한 불륜의 소재를 아무런 미사어구 없이 지겨운 일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만의 저속한 언어 구사력과 표현력 등등... 그럼에도 무언가 이 영화에 대해 쓰고 싶은 생각이 든 건, 그가 하고 싶었던 그 한 마디 말, '우리 사람이 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그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춘천의 명소 회전문에 관한 설화가 다소 색다르게 가미되어, 기억에 남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홍삼수 감독 그 인간이 어떤 예술가들처럼 화려하게 신화와 일상을 대비시키지 않고, 너무 뻔히 보이게, 마치 농담하는 것처럼 툭 던진 것이지만, 이 상황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이청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의 명대사, '아직도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니?'라는 말과 함께 대비되어, 내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지면을 빌려, 먼저 홍상수 감독이 어떻게 신화에서 생활을 발견해 내는 지를 살펴보면서, 차후에 박하사탕의 이야기를 약간 가미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영화는 그의 전 작품 '오! 수정!' 때와 같이 자막을 통해 진행될 이야기의 결과를 미리 툭 던져지고 나서, 전개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줄거리의 핵심인 자막은 7번 등장하고 있는데, 거기에 연루되어 있는 주요 등장인물은 크게 경수, 성우, 명진, 선영 이렇게 네 명으로 압축된다. 또 내용이라는 것은 매우 간단해서 웬만한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난히 이해할 수 있는 줄거리이다. 그러하기에 우선, 간단 간단하게 해서, 부제 1번에서 7번까지의 줄거리를 차례대로 언급해 보고자 한다.

 

 

1. 아마 글을 쓰는 걸로 추정되는 경수의 학교 선배 성우가 경수에게 전화를 건다. 이유인 즉, 연극배우였던 경수가 영화배우로 전향을 하면서 유명해짐에 따라, 얼굴 보기가 힘드니 한 번 보고 싶기도 하고, 그의 주변사람들도 그를 보고 싶어 하니, 한 번 춘천으로 놀러 오라는 것이다. 하지만 경수는 피곤한지 별로 흥미 있어 보이진 않는다.

 

2.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경수는 영화로 전향한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진 않는 듯하다. 출연했던 영화가 흥행이 안 되어, 예정되었던 후속작품의 배역도 취소되고, 자신이 소속한 소속사에서 개런티도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월급을 받으려 소속사에 가서, 그는 그의 잘 아는 선배라 추종되는 어떤 사람과 말다툼을 벌인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그 선배로부터 자신의 돈과 입장만 생각하는 옹졸함을 질책당하며, '우리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라는 말을 듣는다.

 

3. 아마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 경수는 갑자기 어딘 가로 떠나고 싶어졌나보다. 그런데 문득, 춘천에 사는 선배 성우가 자신에게 전화했던 걸 기억하고서, 그날로 바로 춘천에 당도한다. 오랜만에 만난 둘은 첫날 창녀촌에 가서 밤을 지새우는데, 그곳에서 경수는 갑작스레 역겨움을 느낀다. 그리고 선배 성우에게 '우리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다음 날 아침,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둘은 춘천의 명소 회전문으로 배를 타고 들어간다. 그 와중에 우연히 경수는 이제 갓 대학 초년생으로 보이는 혼자 여행 온 여자에게서 어떤 아련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회전문에 당도하여, 성우에게서 회전문에 관한 전설을 듣는다. 회전문에서 돌아와 성우의 소개로 경수는 평소 영화 속 자신을 동경하던 명진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명진은 대담하게도 만나자마자 경수를 은근히 유혹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만난 지 이틀 만에 여관으로 끌고 가, 둘은 관계를 맺게 된다.

 

 

*회전문 전설 이야기

 

=>옛날에 한 공주와 한 남자가 사랑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왕이 그 남자가 맘에 안 들었는지, 남자를 죽여 버렸다. 때문에 미련이 남은 남자의 혼은 뱀으로 환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 사모하던 공주에게로 가, 공주의 온몸을 칭칭 휘감아, 공주를 괴롭힌다. 이에 왕의 청탁으로 등장한 어떤 영험한 도사가 공주에게 뱀을 떨쳐내는 법을 가르쳐 준다. 공주는 그 영험의 도사의 말대로 춘천의 한 절로 가서, 뱀에게 거짓말을 한 후, 절 안으로 숨어 버린다. 뱀은 그 앞에서 공주를 기다렸지만, 내리치는 천둥 번개가 무서워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뱀이 돌아섰다고 하여 회전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4. 관계를 맺은 다음 날, 경수와 명진은 성우에게 밤새 어느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성우는 뭔가를 직감한 듯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명진은 어이없게도 만난 지 이틀 만에, 자꾸 경수에게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 조른다. 하지만 경수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런데 다시 어이없게도 명진은 성우와 같이 여관으로 들어가서, 경수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다. 즉 경수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지만, 성우와 명진은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경수는 너무나 황당하여, 명진에게 다시 '우리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라고 이야기하고, 다음날 곧장 춘천을 떠난다.

 

5. 경수는 춘천을 떠나 자신의 부모님이 계신 부산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옆자리에 우연히 앉은 선영이 경수가 배우임을 알아보게 된다. 그리고 경수에게 은근한 관심을 표명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경수는 선영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부산으로 가지 않고서, 선영을 따라 경주에 내린다. 그리고 몰래 선영의 뒤를 미행해, 선영이 살고 있는 집까지 알아내어, 그 근처에서 숙박할 장소까지 정한다. 그리고 급기야 선영의 집에서 선영을 불러 내, 선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다. 그렇지만 선영의 어머니의 약간은 엄중한 경계 때문에 제대로 선영과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연락처만 받게 된다.

 

6. 전화 연락을 했는지 경수와 선영은 경주 시내에서 다시 만난다. 그러면서 경수는 선영이 자신의 고등학교 적 첫사랑인 것을 뒤늦게 알아보게 된다. 그리고 선영이 처녀가 아니라 유부녀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하지만 둘은 자연스레 관계를 맺게 되고, 선영은 관계 후 경수에게 다시 호텔로 오겠다고 거짓말하고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7. 호텔에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해놓고선 돌아오지 않은 선영에 대한 미련을 경수는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몰래 선영의 집으로 들어가 선영을 불러내, 다시금 관계를 맺는다. 관계 후 대화를 하다, 선영이 대학 초년 때 혼자 춘천 회전문까지 여행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성우와 함께 황홀히 쳐다본 회전문에서의 여대생을 떠올린다. 그리고 더욱 선영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렇지만 남편이 있는 선영은 계속 거짓말을 하며, 경수를 따돌린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서 경수는 선영의 집 앞까지 다시 찾아간다. 그렇지만 계속 내리치는 빗속에 들리는 천둥 번개 소리에 회전문 이야기를 떠올리며, 쓸쓸히 돌아선다.

 

 이쯤하면 벌써 대강 눈치 챘겠지만, 이 영화는 회전문이라는 곳에 얽힌 신화를 통해 우리의 아름다웠던 첫사랑에 대해 잊지 않고서 집착했을 때, 어떻게 처참하게 부셔지는 데에 대해 은근히 돌려서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더불어 그런 집착이 우리를 사람이 아닌 뱀이라는 괴물로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홍상수는 다시 별로 재밌지도 않은 농담을 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영화는 신화의 발견이 아니라 생활의 발견이 되는 것이고,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사랑이 아니라 유부녀와의 짧은 치정극으로 끝나고 있다. 그렇지만 이 홍상수식의 무언가 씁쓸한 뒷맛은 영화를 다시금 바라다보게 한다.

 

  먼저, 왜 경수는 자신이 그토록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고 성우와 명진에게 외쳤음에도, 선영에게 뱀이라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영화 속에서 경수는 마치 바람둥이처럼 보이면서도 매우 어수룩하고, 진지한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하기에 명진의 대담한 유혹에 성우를 의식하지 못한 채 아주 쉽게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신에게 집착하는 명진에게 아주 냉정한 모습을 보인다. 반면에, 선영에게는 귀신에라도 홀린 양,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동경의 흔적들을 발견하고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치 어리석은 순진남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비록 경수는 바람둥이이기는 하여도, 아직 사람이 되고픈 순수한 의식을 버리지 않은 우리네 평범한 보통 남자인 것이다. 사실,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아도 경수의 여행은 순수를 되찾기 위해 떠난 여행처럼 보이는 점이 여러 가지 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다시 영화 속에선 경수의 이런 순수한 의식 때문에 뱀이라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선영은 자신의 잃었던 가장 순수할 적의 첫사랑이다. 그리고 자신이 춘천의 소양호에서 본, 늘 동경해 오던 여자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자신에게 먼저 관심을 표명하고, 은근히 계속 유혹의 향기를 드리운 것은 분명히 선영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남자가 선영을 내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유부녀라는 상황과 성인 된 남녀 사이에 이제 피할 수 없는 섹스라는 욕망, 그리고 경수의 선영에 대한 지나친 동경은, 결국엔 경수를 자신도 모르게 선영을 칭칭 휘감아 괴롭히는 뱀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선영의 집을 돌아서는 경수의 모습을 통해, 너무도 간단하게 순수를 내치고서, 거기서 인간과 괴물의 중간쯤으로 여겨지는 생활(현실)을 발견해 낸다. 그렇지만 우리의 순수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내쳐질 수 있는 것일까?

 

  영화 박하사탕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순수로 돌아가는 회귀본능을 그린 영화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순수에서 생활, 그리고 그 생활 가운데 괴물로 변해간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떤 면에선 합리화하고, 어떤 면에선 동정을 자아낸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론 그런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순수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을 박하사탕은 영화 내내 아리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중간에 우리에게 쉬 건너 띌 수 없는, 잔혹하면서도 슬픈 물음을 하나 던지고 있다.

 

  "인생이 아직도 아름다워 보이니?"

 

  개인적으로 홍상수 감독에게 이청동 감독과 같은 순수로의 회귀를 바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을 한다. 당연히 그것은 각자의 색깔이고, 각자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뉘앙스의 차이에 있어서, 어떤 여운도 거부하고서, 인간과 순수 그리고 생활과 신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소 위험함과 더불어,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비록 홍상수 감독이 ‘회전문’이라는 신화를 차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신화를 통해 ‘신화’에 대한 명백한 거부와 부인을 표명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신화의 기능은 생활을 발견해내기 위한 과거의 어리석은 우리의 자화상일 뿐, 신화 그 자체로써의 기능과 유용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치 서구의 고대 그리스 철학이 그들의 모든 신화를 부인하고서 생겨난 것처럼. 하지만 그들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신화가 담고 있는 인간의 공통적인 무의식의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시적인 인식의 시선을. 아니, 신화 속에 담긴 우리 인간의 강렬한 순수에로의 회귀라는 욕망과 비원을! 그러하기에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록 경수가 뱀이 될 수 없을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리고 오직 생활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만이 우리의 버거운 순수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일지라도, 우리의 생활에 어떤 신화와 신비도 없다면, 그리고 어떤 가능성으로의 여운조차 없다면, 각박한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물론 참으로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사람이 되기 위한 집착은 홍상수 감독 말대로 신화적 괴물의 형상을 만들어 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사람임을 포기해야만 한단 말인가? 아니, 사람이 되기가 불가능하기에 꿈꿔보는 사람에 대한 순수한 열망, 그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모든 질문들을 내쳐야만 한단 말인가? 설령, 그의 말대로 그 중간지점인 생활을 발견해 냈다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인생이 아름다워 보이냐?’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아마 박하사탕의 그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오금을 저리거나, 그 질문을 한 설경구처럼 섬뜩한 건조함만이 남아, 아무런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 그러하기에 너무나도 신화적이고 동화적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순수에게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차를 타고, 인생이 아름다운 것인지 아닌지 되물어 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도 있을 것만 같다. 비록 단 두 시간 정도에, 길어야 며칠 만에 사라질 여운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쩌면 아직도 내가 이렇게 신화적 괴물에 진저리치면서도 집착하는 것은 진정한 생활을 발견해 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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