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텔지아 - 내 그리움과 목마름의 이유에 대한 고백


 

 설령, 길 위에서만 살다 길 위에서 죽어버릴 구도자일지라도, 혹은 영원히 이방인으로만 살다가길 원했던 까뮈의 뫼르소일지라도, 그리고 빈집을 견딜 수 없어 낡은 외투 하나만을 꼭 부여잡다 겨울 빛깔처럼 투명하게 어느 봄날에 분질러져버릴 젊은 시인일지라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그리움이란 것은 늘 있게 마련인 법이다. 비록 그들에겐 돌아가야 할 집도, 그리고 자신을 지탱해 줄 뿌리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되어주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의미 없음 너머에 까닭 모를 설움이 다른 그 누군가에게라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목마름 같은 그 그리움들이 너무나 컸던 그 이유로, 메말라 진 까닭인지도,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그리움 하나쯤 가지고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이유를 알고 싶어, 목이 마르고, 그렇게 목마른 이유로, 어떤 이들은 끝내 아무 것도 마시지 못하고, 메말라 간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늘 그 그리움의 이유들을 알고 싶어, 목이 말랐다. 그리고 그런 목마름 가운데 오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한 사람의 목마름과 마주해 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를 맨 처음 만난 것은 영화 '희생'에서였다. 알 수 없는 기괴한 이미지들과 너무나도 심각한 종교적인 냄새들 그리고 광기와 어우러진 화두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골이 지끈거릴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주인공 알렉산더 교수가 자신의 여자 하인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세상을 구원한 후, 깨어나 자신의 집을 불태우는 장면과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준다면 언젠가는 꽃이 필 것이라는 대사는 매우 인상 깊게 각인이 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었다. 이 때문에 그 후, 난 그의 영화들을 다시 어렵사리 구해보기 시작하였고, 그런 와중에 영화 '노스탤지어'를 통해 그의 목마름과 광기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이해가 영화사 속에서 독특하게 '완벽한 영상시인'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적인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해 맥을 짚는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잡고서 큰집의 기둥이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목마름의 이유들을 그를 통해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고백일 따름이지 해석이 아니라 생각해 보기에, 지금부터 천천히 그의 영화 '노스탤지어'를 따라, 내 그리움과 목마름의 이유들을 여러 사람과 나누어 보고자 한다.

 

 

  영화는 처음 먼 지평선이 펼쳐져 있는 어느 벌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마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의 전반적인 배경이 이탈리아로 나와 있어, 쉽게 이탈리아의 어느 벌판이겠거니 생각할 수 있겠지만, 타르코프스키라는 인물의 성격상, 개인적으로 여기부터가 분명 예사로운 조짐은 아니라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영화의 제목은 우리가 알다시피, 노스탤지어 즉 향수이며, 지평선이라는 것은 닿을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것들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에 대한 향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미리 예견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러면서 영화의 두 주인공 코르차코프와 유제니아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자동차를 타고서 영화 화면에 처음 잡히었던 지평선의 풍경을 따라, 어느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장면을 카메라의 시선이 고정된 자세로 지켜보는 가운데, 영화는 본격적인 이야기 구조로 들어서게 된다.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인 코르차코는 18세기 러시아의 작곡가 소스노프스키의 전기를 쓰기 위해, 자신의 여자 친구이며 이탈리아인으로서 이탈리아어를 통역해줄 유제니아와 함께, 소스노프스키가 머물렀던 이탈리아의 온천 마을 바뇨 비뇨니에 당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에서 뿐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도 매우 복잡하게 영화와 엇물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에서 얽혀 있는 실제 상황이다. 소스노프스키라는 인물의 경우, 18세기 러시아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서, 러시아의 유명한 노예 신분의 음악가였는데, 지주의 후원을 통해 이탈리아로 음악 유학을 왔다가 이탈리아에서 크게 성공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유 뿐 아니라 부와 명예 그리고 직위까지 그 모든 것을 보장받게 되지만, 고국인 러시아를 잊지 못해, 다시 노예 신분으로 돌아갈 줄 알면서도 러시아로 돌아가, 평생 괴로워하다가 자살해 버린 사람이다. 그리고 영화 속 코르차코프는 소스노프스키를 연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분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를 만든 직후, 러시아에서 서방 세계로 망명하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영화의 상황은 미래에 고향을 떠나 방황하게 될 타르코프스키 자신에 대한 진중한 고백이 담긴 예감과 전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영화 속에선 내내 향수에 대한 이상스런 이야기들과 더불어,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이탈리아의 마을과 고르차코프의 고향 러시아의 이미지가 몽환적으로 교차되어지면서, 극대화된 그리움의 이미지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화가 여기서만 머무른다 하면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그러한 향수 속에 숨겨진 궁극적인 그리움에 대해 묻고 있고, 그 곳으로 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제 영화 속에선 전혀 새로운 인물 도메니코가 등장하게 된다.

 

 

  어느 날 유제니아와 함께 온천 주변을 거닐던 코르차코프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도메니코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으며, 7년간이나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가두고 은둔 생활을 한 사람이다. 이에 그의 아내가 견디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류를 구원할 방법을 생각하며 홀로 지내고 있던, 말 그대로 완전한 미치광이였다. 그런데 코르차코프는 도메니코의 그런 면들에 대해 오히려 관심을 갖게 되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오히려 큰 감명을 받게 된다. 심지어 그는 이 때문에 영화 내내 마치 서로 궁합이 맞지 않는 애인 사이로 함께 하던 유제니아와 결별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도메니코도 세상의 종말을 구원하기 위해 로마로 떠나면서, 코르차코프는 생소한 이탈리아 마을에 혼자 남겨지게 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스노프스키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고서 떠나려는 찰나, 우연히 로마에 머물고 있던 유제니아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도메니코가 로마의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며칠째 인류의 종말과 구원에 대해 설교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또 그와 동시에 그(도메니코)가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분신자살을 시도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떠나기 전, 코르차코프에게 이야기 한 내용이었다. 무엇이냐 하면, 도메니코는 인류에게 종말이 올 것을 확실히 믿으면서, 그러한 인류의 종말로부터의 구원을 위해선 로마와 자신의 마을에 있는 온천에서 동시에 불꽃이 피어올라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로 떠나기 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던 코르차코프에게, 자신이 로마에서 분신자살을 할 때, 마을에 있는 온천에서 촛불을 켠 채 꺼뜨리지 않고서, 온천의 맨 처음 위치한 장소에서부터 끝까지 들고 가 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코르차코프는 도메니코의 그런 말들에 대해 진지하게 듣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믿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제 여행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유제니아와의 통화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상기하게 된 것이다. 이에 코르차코프는 떠나려는 걸음을 멈추어, 다시 마을의 온천 쪽으로 발걸음을 되돌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날까지 말짱하던 온천이 완전히 메말라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제 코르차코프는 실제로 도메니코의 말을 믿게 된 듯, 도메니코가 로마의 광장에서 우스꽝스럽게 분신자살하는 그 순간, 코르차코프는 어이없게도 마을의 온천에서 촛불을 켜고선 조심스레 걷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러한 코르차코프가 바람에 자꾸 꺼지는 촛불을 다시 켜기를 반복하면서, 온천의 처음지점부터 끝지점까지 고통스럽게 걸어가는 장면을 세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은 성공한 코르차코프의 희망을 발견한 얼굴과 함께, 갑자기 전혀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 궁전처럼 생긴 어떤 커다란 집 가운데 앉아 있는 코르차코프의 모습을 잡으며, 영화를 끝마친다.

 

 

  이제 복잡하고 기괴한 그리고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영화의 얘기를 정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역시 나는 몇 가지 물음을 던져 보고자 한다.

 

 

  먼저, 영화 속에서 시인 코르차코프가 이미 던진 질문이지만, 소스노프스키는 왜 자신이 다시 노예가 될 줄 알면서도 고향인 러시아로 되돌아 가, 평생 괴로워하다가 자살해 버린 것일까? 대체 고향이라는 것이 어떤 힘이 있기에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자유마저 포기하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 우리는 보통 자유를 찾아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 동안 너무나 많이 접해 왔다.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용되어 졌든, 혹은 문학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대리 만족을 주었던 간에, 우리의 기본적인 인식의 틀 안에서 자유란 것은 분명, 인간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인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먼저 과연 자유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자유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꽃이 바람을 따라 하늘로 도달하고파, 자신의 뿌리 깊숙이 박힌 대지를 버리고서, 하늘을 향해 이카로스와 같이 나래를 폈을 때, 태양에 아스러지는 자태와 유사한 문제이다. 즉,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뿌리 깊숙이 박힌 삶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무한한 자유로의 상승을 꿈꾸지만, 자유란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쉬 도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히 그런 줄 알면서도 우리는 어이하지 못하고, 다시 자유에로의 한없는 비상을 꿈꾼다. 대체 무엇 때문에?

 

 

  영화에서 타르코프스키 자신이기도 한 코르차코프는 자신의 조국 러시아를 등지고서, 오직 소스노프스키로 대변되는 자유와 궁극적인 그리움을 찾아 여기저기 전전하고 있는 방랑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매몰차지 못하게도, 자신의 조국을 잊지 못하고, 고향의 풍경, 가족의 모습들,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인 샘(온천)과 러시아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유제니아와 같은 존재 사이에서 맴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망명을 결심하고 있던, 타르코프스키의 미리 예감된 계산과도 같은 복선이었다. 즉,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뿌리를 버리고 자유를 향해 나아갈 때, 극심하게 고통스러울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완성한 직후 서방세계로 망명하였고, 영화 속 코르차코프는 이 땅의 구원을 위해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탈리아에 온천 마을로 다시 되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향수병에 시달리던 코르차코프는 어이없게도 세상의 종말을 믿는 미치광이 도메니코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리고 결국 왜 그는 미치광이 도메니코의 말을 그대로 믿고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촛불 하나를 들고, 온천을 걸어간 것일까?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가진 자유에로의 관심이, 그들의 향수의 대상인 자신이 뿌리박고 있는 고향과 연관되어져 있음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그 고향이라는 것이 조국 러시아를 넘어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고향에 대한 것임을 우린 쉬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의 떠남이라는 것은 자신의 거추장스런 뿌리를 자르고서 바람을 따라 나래를 펴 비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욱 깊게 뿌리내리기 위함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저변에는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뿌리도 없음을 전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 왜냐하면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그대가 곁에 있다고 해서 그대가 그리워지지 않는 것이 아니며, 그대라는 존재가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다 누구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모두가 애초부터 무언가 상실한 채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대체 무엇이 그립고, 무엇이 목마르다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우리에게 그 대상을 가르쳐 준 적 있단 말인가? 그러니 어느 누가 영화 속에 우리의 그리움의 원천인 이탈리아 마을의 작은 온천이 하루아침에 메말라 버리고, 그 때문에 이 세상이 종말의 위기에 처했다고 하여, 그것이 거짓이고, 가짜라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대체 이 세상에서 자신의 뿌리도 모르고 날뛰는 방랑자와 미치광이는 누구란 말인가?

 

 

  어느 시인은 자신에겐 조국도 없고, 고향도 없고,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다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느 시인은 자신의 집이 비어있음을 고백하면서, 그 속에서 사랑을 잃었음을 이야기 한 바가 있다. 그리고 스무 살 적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진리 보다 귀중한 내 자신의 진실을 찾고자, 집과 교회 그리고 친구들과 사랑하고 싶었던 여자마저 버리고서 길을 나섰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 알아졌던 것은, 나에겐 이미 그것들이 존재한 적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모든 것을 제자리에 그대로 돌려놓고자 하는 내가 그런 말들을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그 때는 분명히 그랬고, 그러하기에 지금 역시 그러한 나의 진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꿈틀대고 있다. 그런데 왜 그처럼 소중하였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나는, 그리고 그 누군가들은 쉽게 발설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 모든 그리움 끝에서조차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 결국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게로 쪼르르 되돌아오거나, 그 목마름 끝에서 견뎌내질 못하고 분질러져 버리는 것일까? 먼 지평선,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경계는 정녕 우리의 고향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갈 곳은 그 어디고,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한량없는 질문들 끝에서 도메니코와 같이 스스로 불살라 질 이들을 생각할 때면, 난 가슴이 아려와 도무지 무엇이 진실인지, 이제껏 고백했던 그 모든 진실에 대해서, 다시금 부정하고만 싶어진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모든 것들은 희미해져버리지만, 그럴 땐 도메니코를 대신해 불살라질 촛불 하나를 켜고서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었던 코르차코프처럼, 내 마음에 아직 남아 있는, 돌아갈 집에 밤새 떠나간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아직 불빛을 차단하지 않을 어머니의 손길을 기억해 본다. 그리고 태양 끝에 가 닿고자 나래를 펼쳤던 어느 벼랑에서 되돌아 선 그 걸음으로, 언젠가는 돌아가 그 품에 안길 것이라고, 그 품에서 모두 살아질 것이라고.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나도 아직 꺼놓지 않을 불빛 하나쯤 만들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비록 나 역시 코르차코프처럼 그 대상조차 알 수 없는, 목마른 광기 그 이상 그 무엇도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도메니코와 내 자신을 위해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들을 위해 촛불을 켜보고 싶은 것이다. 단 하룻밤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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