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만세 - 자위, 섹스 그리고 그 너머


 

 애정만세!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영화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94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으로써 우리에게도 선보인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대만 영화인데다, 당시 기준으로 보통 비디오대여점에 들여 놓을 만큼 재미있는 구석이 눈곱만큼도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이 영화에 대해서 전혀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아니, 영화 꽤나 안다고 자부했지만,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군대를 제대하고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여 밤마다 학교 주위를 배회할 때,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4학년 2학기를 앞두고 학교를 자퇴한 괴짜 선배를 알게 되어, 그 선배의 소개를 통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때 나는 그 선배와 함께 그 때까지 이름만 듣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던 영화의 평생 분량을 거의 다 보았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영화사를 좔좔 꿰게 되었지만, 그런 우리조차도 그 영화를 보고선 머리가 띵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체 이게 뭐야.'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유럽 예술 영화처럼 알레고리와 상징이 가득한 관념적인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우리는 갖은 폼 잡으면서 영화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고, 아는 지식 모르는 지식 총 동원해, 피 튀기는 토론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대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촬영 기법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영상이 남달리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거의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수준... 물론, 장선우 감독의 실험 정신에 대해 내가 평가 절하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하튼 그 만큼 허무하고 허탈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내내 가슴에 남는 영화였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났다. 현재 그 선배도 나도 각자 제 갈 길을 찾아 버둥거리고 있고, 또 그 만큼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척이나 변했을 것이다. 뭐 이젠 너무 당연한 이야기니까 굳이 이런 말을 꺼낸다는 자체가 우스운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하튼 이제 나는 그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이 사회를 배회하고 있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뭐랄까..? 제법 고대 하늘나라를 배회하던 신학생의 때깔을 벗고, 현대 사회인 흉내를 낸다고 할까? 그러면서 이제야 나는 이 영화가 이야기 싶은 것이 무엇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처음 한 남자가 어느 아파트 열쇠 키를 훔치는 장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보아하니 그 남자 행색은 번듯한데, 어디 오갈 때가 없는 모양인 것 같다. 그래서 아직 분양이 안 된 아파트의 열쇠 키를 훔쳐, 잠시 동안 그 집에 기거할 작정인 모양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몰래 그 집에 들어가, 제 집 인양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는데... 아니, 갑자기 웬 칼? 이 남자 사는 게 힘들었나?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어디 자살하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눈을 찔끔 감고서 칼을 손목에 가져가 보지만, 쉽게 칼은 손목을 긋지 못하고... 남자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재차 칼을 손목에 다시 가져가 보지만... 도저히 칼은 손목을 긋지 못할 거 같은데...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는 핏방울... 아무래도 이 남자는 이 영화 주인공이 아닌가? 하고 잠깐 의문을 달 새, 순식간에 카메라는 한 삼십대 중반의 여자와 이십대 후반의 다른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사람이 북적대는 어느 밝은 카페, 한 남자가 앉아 느긋이 담배를 피고 있는데, 그 옆에 마치 중경삼림에 임청하를 연상시키는 듯한 복장을 한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고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문다. 보아하니, 섹시한 모양이 보통이 아닌 아줌마!^^;; 그래서 인지 옆에 남자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못 뗀다. 그리고서 여자가 자리를 뜨니까 웬 미행? 첩보영화인가? 여하튼 조금은 백수건달 끼가 다분히 있어 보이는 남자는 여자를 따라가고, 여자는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듯 갈 길을 가는데... 갑자기 조금 수상쩍은 느낌에 눈치를 챈 모양이다. 그러자 남자는 마치 자기도 갈 길을 간다는 듯 자연스럽게 공중전화 박스로 가 전화를 건다. 여기까지는 완전히 첩보영화 공식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자가 그 사이에 도망가지를 않고, 남자가 전화를 거는 전화박스 뒤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다시 장면은 바뀌어, 남자와 여자는 자연스럽게 어느 아파트에 들어서더니, 서로 굶주렸던 듯 급하게 옷을 벗으며, 애정행각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집은 자살 시도를 하고 있던 남자가 몰래 들어가 있던 집이었다. 그러니 자살을 하던 남자는 깜짝 놀라, 자살하다 말고 옷가지를 급히 챙겨 입고선, 잠시 그 집안에 다른 남녀의 불꽃 튀는 사태를 파악한 후, 몰래 도주를 해버리고.... 두 남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며... 어느새 다음 날 아침...

 

 

  이제 영화는 대충 윤곽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자는 알고 보니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여자고... 그래서 그 아파트도 그 여자가 관리하는 집 중 하나인 것이었다. 그리고 자살을 하던 남자는 납골당을 판매하는 세일즈맨인데, 조금 사회 부적응 끼가 다분히 있어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 하나는 밤에는 시장 바닥에서 노상 판매를 하지만, 거의 말 그대로 백수건달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백수건달 남자가 여자와 관계를 갖은 후, 또 몰래 그 아파트 키를 훔쳤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시 여자를 꼬셔 보려고 하는 거 같은데... 여자는 뒤가 깨끗한 여자인 듯, 별로 그 백수건달 같은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기엔 조금 바빠 보이는 것도 같고... 여하튼 간에 그것은 둘째 치고, 그 백수건달 남자가 열쇠를 훔치게 됨으로써, 이제 그 빈집에 또 다른 기거자인 자살하던 남자와 마주칠 일만 남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처음엔 서로 둘 간의 존재를 몰라, 두려워 하다가, 둘 다 그 집 주인이 아닌 객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둘이 동맹을 맺게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원래 그 집 주인은 아니지만 임시적으로 그 집의 관리자인 여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 둘은 서로 공생하게 된다. 여자의 빈 집에 혹은 여자라는 빈 집에 제 집 양 기생하면서 공생하는 두 남자 이야기... 벌써 이것부터가 무언가 심상치가 않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집에 기묘한 동거자인 두 남자와 한 여자에 대한 무언가 알 수 없는 관계의 고리들을 더욱 복잡하게 깔아 놓고 있다.

 

 

  먼저, 여기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자살하던 남자가 게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 전반에서부터 드러나지 않고 중반이 돼서야 드러나는 점으로 보아, 남자는 분명히 자신이 게이임을 숨기고 있고, 또 그로 인해 매우 괴로운 상태인 듯싶다. 특히 게이인 남자의 그런 부분을 영화는 성적인 억압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평범한 아시아의 사회에서 자신이 게이임을 드러내고서, 정상적인 삶의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게이는 차마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늘 자신을 억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억압은 게이의 자위를 통해서 드러난다. 남자를 좋아하지만 그 사실을 밝히는 순간, 분명히 그 남자로부터 버림받거나, 동물 취급받을 것이 뻔한 게이.... 그러니 게이는 같이 동거하게 된 백수건달 남자에 대해서 이상한 연모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표출하지 못하고, 혼자 있을 때면 끊임없이 자위의 세계로 탐닉해 들어간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미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버린 것 같았던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그 특유의 백수건달 끼를 발휘해, 여자를 유혹하고... 여자는 귀찮다고 하지만, 혼자서 한 밤을 보내기엔 너무 고독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여자는 애초부터 자신의 빈 집에 대해 어떤 권리도 없는 부동산 중계인으로서 관리자였을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여자는 자신의 집에서 목욕을 하다, 불현듯 느낀 공허함 속에 자신도 모르게 자위를 하다가... 남자가 전화로 슬쩍 언급했던, 남자의 일하는 시장 골목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을 배회하다가 다시 남자와 마주쳐, 둘은 자연스럽게 첫 날 관계를 가졌던 그 아파트 그 침대로 다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각, 게이는 전혀 그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그 곳에 자연스럽게 누워있었다. 그러니 다시 자살을 시도하던 그 첫 날처럼 도망을 가야하는데... 벌써 남자와 여자는 그 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급한 김에 게이는 침대 밑으로 숨어 버리고... 이제 침대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극에 어쩔 수 없이 보이지 않는 익명의 관중으로써 참여하게 된다. 심하게 흔들리는 침대... 여자의 숨넘어갈 것 같은 비명소리... 그리고 그 침대 밑에 숨죽여 자위하고 있는 게이....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아침...

 

 

 남자는 아직 잠들어 있고, 여자가 먼저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긴다. 그리고 대충 샤워를 하고선 남자를 그대로 내버려두고서 자연스럽게 그 집을 나선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갈 곳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자가 완전히 나갔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침대 밑에 숨어 있던 게이가 기어 나온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남자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는데.... 너무나 안쓰러운 그 모습.... 게이는 차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더블 침대에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남자의 다른 편에 쭈그리고서 누워, 남자를 애처롭게 바라다본다. 단 한 번이라도 그 손길로 매만질 수 있다면... 당신을 좋아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러나 그것은 분명 게이의 몫은 아니다. 아마 결코,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뒤척이던 남자가 갑자기 잠결에 게이가 전 날 같이 자던 여자인 줄 알고, 덥석 안는 것이 아닌가? 놀란 게이는 어이할 줄 모르지만, 왠지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왠지 빨갛게 달아올라 주체할 수가 없는 모양이 된다. 그러하기에 게이는 참지 못하고, 곤히 잠들어 있는 남자의 입술에 몰래 입을 맞추고... 다시 몰래 잠들어 있는 남자를 그대로 내버려두고서, 여자가 나갔던 그 문으로 그대로 그 집을 나온다. 그리고서 영화는 다시 장면을 바꾸어, 집을 나갔던 여자의 걸음에 시선을 맞춘다.

 

 

  차에서 내려 어딘 가로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 여자... 카메라는 전혀 청중을 생각하지 않고서, 그 걸음 하나하나를 지겹게 다잡아 내고 있다. 그리고 그 지겨운 기다림 끝에 다시 카메라는 어느 공원 벤치에 앉는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런데 갑자기 웬 서러운 울음? 알고 보니 이 당찬 여자가 흐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매우 서럽게... 차라리 펑펑 쏟아내면 더 좋을 것을... 훌쩍훌쩍 참는 것이 더욱 서러워 보인다. 그런데 카메라는 다시 전혀 청중을 생각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자의 그런 훌쩍거리는 모습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잡아내고 있다. 한 몇 분이나 지났을까? 줄곧 흐느끼던 여자가 이제 제법 자신을 추스르고서 담배를 문다. 이제 영화가 끝나려나 보다. 그런데 이 여자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물고서 서럽게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영화는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끝을 맺는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아야겠다. 아니, 이 허무한 영화의 알 수 없는 알레고리에 생기는 의문들에 대해 물음을 가져보아야겠다. 그렇지만 결코 답을 낼 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음이란 건 그 자체로 답을 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너무 이제껏 답을 요구해 왔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에 대해서 그렇게 허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이 허무함을 그대로 인정하며 묻는다. 왜 이 영화는 전혀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하는 허무한 영화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해...

 

 

  앞에서 이 영화가 나는 결코 유럽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상징이나 알레고리가 등장하는 영화는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알레고리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와 게이 그리고 여자는 우리 현대인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알레고리의 속성이 갖는 어떤 새로운 의미의 창출이라든가 귀결은 여기에 없다. 그러하기에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풍자라기보다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다소 의도적으로 어떤 기법도 사용하지 않았고, 주인공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낸다. 마치 가정용 비디오에 담은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영화는 사실적인 것이다. 다만 간간이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아주 사소한 장면에 매우 길게 시선을 고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령 예를 들면, 주인공 여자가 모기 한 마리에 갑자기 자신의 멍한 상태를 자각하고 모기를 잡기 위해 발버둥치는 장면이라든가... 남자가 게이에게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으면 어디든 데려다 주겠다고 하자, 고작 게이가 남자와 함께 간 곳이 게이의 직업과 관련된 납골당을 판매하는 곳이라든가... 분명, 이런 장면들은 은근히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풍자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제목에서 이야기하듯이 그런 것들은 부차적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며, 무엇보다도 우리 현대인들의 애정에 대해서 섬뜩하리만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게이가 갖는 의미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게이는 그 특이함으로 인해 쉽사리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가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애정의 형태가 아닌, 다소 특이한 소재를 다룬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게이의 그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억압의 다른 표현인 성적인 억압이 결코, 우리와 동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이 영화의 게이처럼 자신의 성적인 욕망의 정체를 쉽사리 누구에게나 털어놓을 수 없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어, 우리가 회사나 혹은 동료라는 정상적인 관계 사이에서 간혹 느끼는 성적인 욕망을 우리는 쉽게 표현할 수 있는가? 결혼한 사람은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럴 수 없고, 또 결혼하지 않은 미혼자라고 해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수시로 아주 자연스럽게 생기는 성적인 욕망을 모두 분출한다면, 이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 그리고 사랑이라는 특별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 가지만... 여하튼 간에, 우리는 제도든 그 무엇으로든 간에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그것들을 쉽게 발설하고 행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흔히 변태라고 칭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을 흔히 짐승 보듯이 본다. 왜냐하면 엄연히 사람과 짐승은 욕망을 대함에 있어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게이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니라고는 말해도 짐승처럼 볼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때론 우리의 감당할 수 없는 성적인 욕망을 어쩔 수 없이 영화에서의 게이처럼 자위로 분출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제법 온당해 보인다. 혼자 남겨진 방에서 여자 옷을 입고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한다던가, 혹은 수박을 먹다 말고 수박 껍질로 자신의 볼 살을 비비며, 자신의 뜨거운 미열을 시원하게 달래준다던가...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자신도 짐승 취급당하지 않고... 하지만 문제는 그래도 우리는 외롭다는 사실이고, 또 그것은 왠지 진정한 육체에게로 가지 못하는 자기비하와 수치스러움이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여자는 혼자 자신의 집에서 목욕을 하다가 그 능글맞은 백수건달 남자를 다시 찾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갈했으면 끝이지, 왜 또 서러워서 그렇게 길가다 말고 어느 벤치에 앉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사실 1970년대 전까지만 해도 서구 사회에서조차 성적인 욕망은 쉽게 표출되고 대변될 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하기에 미국의 영화들에서조차 완전한 포르노 급의 XXX등급 영화를 제외하고는 성적인 표현이 자제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자위는 죄악시되어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슬슬 일반적인 영화 속에서도 성적인 표현의 수치가 그 강도를 높여가고, 그와 비례해 당연히 자위하는 모습 또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자위의 형태가 매우 다양해지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위가 이젠 자신의 몸으로부터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도구화되는 양상을 띠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1970년대 어느 영화에선 헬기의 차가운 금속 표면에 대고 자위하는 여자가 등장하게 되고, 90년대엔 영화 클러쉬에서 자동차의 속도감을 통해 자위하는 남녀가 등장하며, 자연스럽게 애정만세에서는 수박에게 자위를 하는 우리의 게이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만큼 우리의 성적인 욕망의 대상과 깊이는 확장되었으며, 이것은 그와 동시에 우리의 육체의 소외 현상과 더불어 성적인 억압이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심각해졌다는 증거가 되게 된다. 왜냐하면 과거에 비해 훨씬 비대해진 우리의 성적인 욕망은 우리들의 육체 뿐 아니라 모든 세계로 확장되었는데, 아무리 새로운 가치관이 들어섰다고 하지만 그에 비해 우리의 일.반.적.인. 도.덕.관.념.은 전혀 바뀐 것이 없어, 우리는 모두 그 커다란 차이 속에서 갈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직 우리 자신은 헬기의 표면과 자동차의 속도 혹은 수박에 대고 자위할 만큼 스스로 변태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건전한 생각이다. 성적인 욕망만 비대해져 자신이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고, 주체하지 못한다면, 아니 책임질 수 없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세상이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속 편하게 자기 자신은 이런 변태가 아닌 건전한 정상인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들 그렇게 외롭다고들 난리란 말인가? 과연 그 말이 말 그대로 혼자 있어서 외롭다는 말일까? 아니면 그것만으로도 부족한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분명, 자기 자신은 변태가 아닌 정상인인데, 그래서 그냥 혼자라서 외로운 것뿐인데도, 자꾸 다른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헬기나 자동차는 아니지만, 그 무엇으로든 간에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표출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표출 시, 자신도 모를 상실감과 수치감에 다시금 자신 앞에 커다랗게 구멍 나있는 성적인 욕망의 크기와 부피를 대면하고 경악하게 된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영화에서의 여자처럼, 그러한 자기 자신의 성적 부피에 비례해, 너무나도 소심한 자신의 결단력을 인정하게 되고, 완전한 백수건달 남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는 여기서 참고 다시 자위로 함몰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하튼... 우리는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 분명, 자위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자위의 대상 그 자체가 아닌, 그 속에 내재된 어떤 다른 대상을 그리워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혼자 목욕하다 말고, 새벽 거리를 뛰쳐나와 남자와 해묵은 격정을 풀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여자는 서럽게 흐느낀다. 대체 왜? 그것이 그녀가 원한 전부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럼 자위로 대충 자기 자신을 달래고 말지, 뭐 하러 서러운 그 짓을 했단 말인가? 아니,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냥 애초에 애정이라는 것, 섹스라는 것이 어차피 자위와 비슷한 서러운 것이니까, 그냥 혼자서 외로울 순 없는 것이었을까? 사실 우리는 섹스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오직 애정만이, 섹스만이 우리의 권태로운 삶을 구제하고 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가? 사실 그러하기에 마지막 여자의 처절한 울음조차도 또 다시 반복되는 그 관계를 예견하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의 삶은, 그리고 우리의 삶은 애정이라는 것도 없으면 너무나도 권태로워 도저히 어떤 의미도 발견하기가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 현대인은 이 애정이라는 굴레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자위의 굴욕감과 도발적인 관계 후 오는 해묵은 육체의 설움 사이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아이러니들이란 말인가?

 

 

  군대를 제대하고서 지난 방황의 흔적들을 다 지우지 못하고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던 적이 있었다. 마치 발갛게 달아오른 사람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새벽 그 어두웠던 골목길에서 누군가와 부딪쳐 흐드러진 정사라도 할 수 있다면... 늘 자위일 수 없는 이유를 묻고, 차라리 그곳에서 안위하기를 바랐지만,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없는 나의 육체와 마음은 그렇게 그 거리에서 서성이다, 아침이면 제풀에 지쳐, 좁은 방안으로 기어들어가, 새우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천천히, 자위 일 수 없는 이유를 포기하고, 자위 밖에 안 되는 내 욕망의 한계에 대해 수치스러워하며, 그곳을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나는 그 때 섹스 말고는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신학생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몰래 담배를 태우러, 지나치던 학교 바로 옆 골목길에서... 나는 목련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파르르 떨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나도 모르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름답고 슬프다는 내 관념보다 앞서, '아' 하는 신음이 터져 나오며, 양 볼에 까닭 모를 눈물이 떨구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신을 차리고서 너무나도 부끄러워, 주위를 살펴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몰래 눈물을 훔치고선, 재빨리 그 거리를 내달렸다. 그리고 당도한 것은 항상 담배를 태우던 놀이터 벤치였다. 그래서 거기서 마음을 추스르려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무는데... 다시 갑자기 알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마치 해묵은 격정을 풀고서 서러웠다는 듯 한참을..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 엉엉 울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영화 속에 여자처럼... 그러하기에 다시 부끄러워진 나는 겨우 울음을 참고서, 나를 울린 목련 나무 한 그루를 다시금 몰래 올려다보았다. 벌써 봄날이 다 지났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기라도 한 듯 목련나무에 잎새들은 다 떨어지고, 몇 개 남지 않은 잎새들만 여전히 바람에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시 가슴이 시렸다. 하지만 울진 않았다. 다만 그 시린 가슴으로... 꽃잎이 다 떨어져 말라비틀어진 희망의 가지라도 다시 붙잡아야겠다고, 그런 것이 삶이라고.... 자위가 자위를 넘어선 어떤 그리움일 거라고, 그럴 것이라고... 나는 다시 자위일 수 없는 이유들을 되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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