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내게로 왔다 2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시가 내게로 왔다 2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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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다 2 - 시에 고백을 담아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에서 시인은 어떻게 나비의 꿈을 꾸게 된 것일까? 시퍼렇고 서슬 퍼런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가 왜 나비는 무섭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공주 같은 나비였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 어떤 시절 그러했듯이, 세상이란 바다가 무섭지 않았던 걸까? 그렇지만 청무우밭으로 착각하고 간 바다에서 청무우가 소금에 절어지듯 어린 나비는 절어서 되돌아온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우리 새하얀 청춘이 세상이란 소금기 가득한 풍파에 절어지듯이, 그렇게······. 하지만 이렇게 쩐 삶만을 삶이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아직 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로 삼월 달에 꽃이 피지 않는다 해도, 그래서 늘 서툴기만 한 우리네 청춘이었다고 해도, 우리 가슴 속에 시리게 품을 문장 하나쯤은 남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 초생달 같이 시린 문장 하나! 그래서 살아가면서 내내 꼬옥 품어주어야 하는 상처 같은, 그렇지만 배움 같은 그런 문장 하나!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서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왜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물이 되기를 늘 꿈꿔왔다. 내 뜨거운 욕정이 닳고 닳아, 더 이상 그 누군가를 뜨겁게 감싸지 못할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꿈꿔왔다. 그래서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라고,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고, 늘 되뇌고 되뇌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뇐 만큼 꼭 그만큼, 어느 누구와도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게 되었다. 내가 헤어지자고 말한 것은 아니다. 늘 상대가 헤어지자고 했다. 그렇지만 이유는 명료했다. 내 불길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늘 혼자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불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사랑하고 싶다고. 어쩌면 흐르는 물이 되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고. 그렇게 줄곧 거짓말을 해왔다.

 

 

 

절벽

 

이상

 

 

꽃이보이지않는다.꽃이향기롭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거

기묘혈을판다.묘혈도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

는들어앉는다.나는눕는다.또꽃이향기롭다.꽃은보이지않는

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잊어버리고재처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

리고들어간다.나는정말눕는다.아아.꽃이또향기롭다.보이지

도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관념적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나라의 청춘이라면 모두 이상이라는 이 이상한 사내에게 한번쯤은 꼭 끌려야만 하는 게 법이라도 되는 걸까? 이 시를 시라고 말할 수 있는지 사실 잘 난 모르겠다. 그렇지만 읽는 바로 그 순간 내 가슴 속에 울림이 있었다. 절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꽃 때문에 절벽에 핀 꽃처럼 매달린 어느 사내의 절규가, 울부짖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상 누구도 들어줄 수 없는 꽃의 절규일지도 모르는 그런 울부짖음이······.

 

 

 

 

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진 긴 묵죽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넣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태어나서 시인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두 명 있다. 한 사람은 학교의 문학 동아리 선배인데, 지금은 ‘시가 그리스도를 죽였다.’란 화두와 함께, 시로부터 돌아섰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내가 대학 4학년 때 들어온 01학번 새내기 여자 후배였다. 선배의 경우는 정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인이었다. 사람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리움을 알고, 노래를 아는, 그런 시인이었다. 그런데 01학번 여자 후배의 경우는, 좀 색달랐다. 뭐랄까? 그 발상이 엉뚱하다고 할까? 아니, 처음엔 그렇게 느꼈다. 너무 찬란하고 눈부신 태양이니까, 구름아! 태양을 안아주겠니? 이런 어투의 짧은 동시 비슷한 글을 동아리 사이트에 남겼는데, 이상하게 울림이 있었다. 그리고 빗소리를 듣기 위해 우산을 펴는 시부터, 어차피 무너져 내릴 모래성의 허망함을 파도의 말로 따뜻하게 감싸는 시선으로 시를 써내려갔다.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투성이었다. 늘 관념과 관념이란 절망에 허덕이던 내겐 그 모든 언어가 신선하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눈이 내려 검게 질척이는 눈에 대한 절망적인 시를 쓴 적이 있었다. 동아리 사이트 내에 그 시를 올렸는데, 댓글에 후배가 이런 말을 달아 놓았다. 난 그 질척이는 검은 눈들이 할머니의 주름살처럼 느껴진다고. 또 무언가 쿵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 쿵하는 울림이 어떤 그림으로 내게 되살아났는지 알 것만 같다. 짙은 농담으로 그려낸 할머니의 싸륵싸륵 눈을 밟는 굽은 발걸음, 그렇게 눈을 녹이는 할머니의 소리, 그 소리를 가만히 들어본다.

 

 

 

 

호남선

 

김준태

 

 

기차는 가고 똥개만 남아 운다

기차는 가고 식은 팥죽만 남아 식는다

기차는 가고 시커멓게 고개를 넘는

깜부기, 깜부기의 대갈통만 남아 벗겨진다

기차는 가는데 빈 지게꾼만 어슬렁거리고

기차는 가는데 잘 배운 놈들은 떠나가는데

못 배운 누이들만 남아 샘물을 긷는데

기차는 가고 아아 기차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생솔가지 저녁연기만 허물어진 굴뚝을 뚫고 오르고

술에 취한 홀애비만 육이오의 과부를 어루만지고

농약을 마시고 죽은 머슴이 홀로 죽는다

인정 많은 형님들만 곰보딱지처럼 남아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무덤을 지키며

거머리 우글거린 논바닥에 꼿꼿이 서 있다.

 

 

 그리스 민요 중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민요가 있다. 사실, 민요라기보다는 전통가요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겠다. 소위, 월드뮤직이라 불리는 장르로 꽤나 유명한 곡이니까. 여하튼 처음 이 시를 혼자 속으로 읊을 때는 그런 느낌이었다. 기차는 8시에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에 대한 미련으로 자꾸 시계를 보고, 그럼에도 떠나는 사람은 칼을 품고서 기차를 타야만하는······. 어쩌면 비슷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 근대사 속에서 터키와 전쟁을 치루며, 그렇게 누군가는 칼을 품고서 기차를 타고 떠나야만 했으니까. 그렇지만 이 시는 그런 비장미보다는 오히려 내게는 한이 물씬 풍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너무 한스럽고 서글퍼서 읊다가 그만 나도 호남사람인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몰입을 할 뻔했다. 겨우 네다섯 살 적 서너 해 산 게 전부인 내가, 그리고 기차를 타고 떠가날 잘 배운 놈들의 하나일 게 분명한 내가, 감히 그런 말을 토할 뻔했다.

 

 

 

베트남 Ⅰ

 

김명인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

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

두고두고 포성에 뒤집히던 산천도 끝없이

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

떨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

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은 내 누이

 

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 3부인

남편은 출정중이고 전쟁은

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국민학교까지 밀어닥쳐

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시션 박스

속에서도 가랑이 벌려 놓으면

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

 

로이, 너는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였지만

깡마른 네 몸뚱아리 어디에 꿈꾸는 살을 숨겨

찢어진 천막 틈새로 꺾인 깃대 끝으로

다친 손가락 가만히 들어올려 올라가 걸리는 푸른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행복한가고

 

네가 물어서

생각하면 나도 행복했을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잊어야 할 것들 정작 잊히지 않는 땅 끝으로 끌려가며

나는 예사로운 일에조차 앞날 흐려 어두운데

뻑뻑한 눈 비비고 또 볼수록, 로이

적실 것 더 없는 세상 너는 부질없어도 비 되어 내리는지

우리가 함께 맨살인데 몸 섞지 않고서야 그 무슨

우연으로 널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

로이, 만난대서 널 껴안을 수 있겠느냐

 

 

 나는 물론 베트남을 잘 모른다. 내가 아는 베트남은 아버지의 베트남이다. 신학대를 가겠다고 아버지와 말다툼을 한 후 가출을 하고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 놓여진 17장의 편지, 그 속에 아버지의 빼곡한 베트남과 신에 대한 고뇌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신학교를 휴학하고서 방황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 그 때, 우연히 보게 된 아버지의 일기장 속에 베트남의 사진들과 아버지의 글들로 베트남을 조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베트남에 관해선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로이에 관해선? 모르겠다. 내가 왜 이 시를 택했는지. 그렇지만 스무 살 때 처음 어느 선배가 루오의 화집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림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내게 루오 그림 중 유독 ‘창부’라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빛깔의 축 늘어진 가슴과 오동통한 허리, 그 어디에도 내가 생각하던 기존의 창부의 모습은 없었다. 단지, 거울 속 지친 기색의 창부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때부터 화집을 사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울고 있는 여자’를 보고서 여인의 슬픔을 이해해 보려 하였고, 드가의 무희들의 공연 뒤 그 시린 등 뒤를 보여주는 모습 속에서 내 청춘의 시린 등 뒤에 대한 기억을 보듬어 보려 하였다. 그리고 화사한 모네의 그림 속 여인에게서 환상을 품어보았다. 개양귀비 핀 들판에서 서 있는 여인의 풍경과 우산을 들고 뒤돌아선 여인의 자태에서 눈부신 여성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땐 몰랐다. 그 모든 시작이었던 루오의 그림의 창부로부터 내가 얼마나 큰 위안을 얻게 될 지, 그땐 미처 몰랐다. 축 늘어진 가슴과 오동통하게 부풀어 올라 어디가 허리인지 배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는 어느 창부에게서, 그렇게 지친 피로의 기색을 띤 조금은 못생긴 창부에게서, 내가 얼마나 큰 위안을 얻게 될지. 문득, 내 20대 때의 모든 연민들이 가증스럽기만 하다.

 

 

 

 

흰 부추꽃으로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

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시집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우리말들을 모르며, 얼마나 많은 꽃들의 이름을 모르는지 생각해 보았다. 쑥부쟁이, 벌개미취, 자주달개비, 부추꽃,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생경한 이름들, 그러하기에 당연히 생경한 꽃의 정경과 향기들. 아무리 인터넷으로 이미지 검색을 하고 들여다보아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저 아름다운 꽃의 말들로 사람들의 얼굴마다 형상을 그려주고, 새들의 날개로 옷을 지어주고, 나무와 들풀의 뿌리로 밥을 짓고, 산과 강의 풍경들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싶은데,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서툰 시를 쓸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내 삶이 쭉 그러했던 것처럼. 어쩌면 박남준이란 시인도 나처럼 그러하지 않았을까, 문득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나는 저 모든 꽃과 새와 들풀의 말들을 모르지만, 나무를 하고 아궁이에 불을 떼는 법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원’이라는 산골짜기 마을에 살면서, 나는 하루 일과로 나무를 해오면 장작을 쪼개고, 아궁이는 아니지만 기름보일러 대신 사용하는 나무보일러에 불을 피우곤 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박남준 시인처럼 서툰 내 삶을, 서툰 내 시를 한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동시에 그와 같이 남은 재들을 부대자루에 담아 밭에 뿌리면서, 또 다른 환생을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서툰 나비가 바다에 절어서 돌아와 생긴 시린 초생달이 서서히 차올라 보름달보다 환환 달빛을 드리울 그런 환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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