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태양 아래서
모리스 피알라 감독, 모리스 피알라 외 출연 / 무비플렉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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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태양 아래서 - 소녀의 순결한 죽음에 관하여

 

 

 '사탄의 태양 아래서', 스무 살 적 기독교 문학이란 장르에 대해 공부하고자하여, 우연히 듣게 된 이 제목만으로도 나는 오금이 저려왔다. 어떻게 사랑과 자비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태양을 사탄의 태양이라 하고, 것도 모자라 그 아래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사탄이라는 악의 실체를 인간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그 제목으로 인해, 나는 처음으로 조르주 베르나노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의 책은 구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사탄의 태양 아래서'란 작품이 번역된 적은 있지만, 출판사가 망해서인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우연히 모리스 피알라 감독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란 영화를 보게 되면서, 나는 우리나라에 출판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또 다른 작품들인 '기쁨'과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를 알게 되어 구해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유독,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을 많이 영화화했던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시골 사제의 일기'를 보게 됨으로써, 대충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의 윤곽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소설이나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은 너무나 현란한 관념과 몽상이 뒤섞인 이미지들의 축제이기에, 해석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너무나도 신학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실제로 신학적인 고뇌 속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과 영화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내 개인적으론 의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 중 유독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소녀의 죽음'에 관한 문제는 무언가 간과할 수 없는 이미지들로 내게 각인되어져, 지금부터 나는 이 뭉뚱그렸게 일그러진 이 형상들의 이미지들을 영화 '사탄의 태양 아래서'를 중심으로 해서 쫓아 가보고자 한다.

 

 

  도니상은 무능한 젊은 신부이다. 신학교 시절부터 형편없는 재능과 의지들로 인해 유독 튀었던 그는, 그렇지만 신과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열정을 가지고 있는 신부이다. 이 때문에 그는 늘 깊은 신앙적 고뇌의 한 가운데 던져져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아버지 신부 밑에서 보좌하고 있는 교구 생활조차도 매우 적응해하기 힘들어하며, 늘 수도원에서 은신하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깊은 신앙의 고뇌로 인해 일반 신도들에게서 신이 날마다 처참하게 외면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무.력.하.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는 신을 그는 구원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자신을 자책하며, 채찍질을 가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다시 그 때문에, 그의 건강 또한 사제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사람이라도 돕기 위해 늘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해, 자신을 궁지 속으로 몰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절망의 궁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양심 속에 박혀 있던 악의 실존과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신부들이 아닌, 가장 진실하고자 노력했던 도니상에게 왜 그런 악마의 존재가 현현하는가이다. 사실, 이것은 쉬 설명될 수 없는 문제지만, 분명한 것은 신과 인간에 대한 고뇌가 극명하면 극명할수록 악의 실체 그리고 원죄의식에 접근하게 되어, 자신을 구원이 아닌 절망의 늪 가운데로 몰아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아주 쉽게 구원의 확신과 타협을 하여, 신을 자신의 욕망의 범주 한 가운데로 예속시켜 버리는 이들에겐, 악의 실체는 무력하기 그지없는, 원어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도니상과 같이 끊임없는 구원의 목마름과 물음 가운데 놓인 이들에겐 꼭 한번쯤은 바로 이러한 악의 실체와 대면하는 일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여하튼 그로 인해 도니상은 자신의 양심 속에서 현현한 악의 실체와 입 맞추게 되고, 이제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옭아매져 들어가는 악의 올무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에서 그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게 됨으로써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적... 그러나 기적이란 것은 사실 별 게 아닐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악의 실체에 대해, 절망해 대해, 깊숙이 내려가게 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악과 절망에 대해서 투시하고, 다른 인간들의 욕망을 간파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필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그러한 절망과 악의 실체 그리고 우리 욕망의 근본을 다 파헤칠 수 있다 하여도, 그리고 또 그러한 능력을 아무리 인간 구원을 향한 열망으로 사용한다 하여도, 오히려 그것이 다른 이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원죄의 구렁텅이 안으로 집어넣어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영화는 도니상과 무쉐트와의 만남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시금 악의 실체의 올무가 얼마나 잔인한 가에 대해 증명하고 있다.

 

 

 무쉐트.. 16살의 무쉐트는 영화 속에서 완벽한 악녀이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가녀린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의 이반 표도로비치와 같이. 그러하기에 그녀는 어쩌면 신이 없다면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러한 존재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이반 표도로비치와 같이 매우 연약하고,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매우 순결하고 고상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녀의 이러한 이미지는 영화 속에서 매우 포착하기 힘들게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배경이 나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강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면, 그녀는 일단 자신의 놓인 환경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다. 특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끔찍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없이 자유로워지기 원하는 존재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아버지란 존재는 늘 그러한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의 상징으로써 상정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그녀의 자유에 대한 열망의 표출은 영화 속에선 남성편력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역시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이 사회에서 (특히, 근대라는 시대상 속에서) 여성이란 존재, 더군다나 감성이 지극히 예민한 소녀란 존재가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순결이란 처녀성을 무기화 하여, 남자란 도구를 이용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독해질 수 없는 그녀는 한 가난한 소설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임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이 들통 나면서, 다시금 아버지로 인해 강제로 그 가난한 소설가에게로 귀속되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지긋지긋한 아버지 그리고 그 마을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동경의 도시 파리로 향하고 싶다. 그런데 그 가난한 소설가가 꿈꾸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녀와 함께 그 마을에서 전원생활을 꿈꾸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영영 도망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녀는 동시에, 그 지역 시의원이면서 의사인 갈레란 남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의 정부로서 그녀의 모든 고향의 삶을 청산하고 파리로 도망갈 것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사랑하던 그 가난한 소설가라는 걸림돌을 넘어서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의도야 어떻든 간에, 살인 충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와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은 다음 날, 무쉐트는 식탁에 놓인 그의 총을 주워든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처럼 똑같이 그녀를 억압하려는, 영영 고향에 자신을 가둬두려는, 가난한 소설가의 턱에 대고 총성을 울린다. 그러나 그녀는 그 총에 정말로 총알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충동에 의해 방아쇠를 당겼을 뿐, 정말로 살인이 일어날 지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원대로 살인이 일어났고, 이제 그로 인해 그녀는 완전범죄를 위해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낸 후, 그 지역 시의원이자 의사인 '갈레'에게로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순진하게 꿈꾸었던 파리로의 여행을 갈레에게 제안하지만, 갈레는 완벽하게 속물인 인간이기에, 여태껏 무쉐트 자신이 오히려 갈레에게 이용되어져 왔음을 그녀 스스로 깨닫게 된다. 아니, 영특한 그녀는 이미 그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애인이었던 가난한 소설가에 대한 살인의 죄책감으로 그녀는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고백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심적으로 공범자이기에 다른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을 갈레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쉐트는 갈레에게 자신이 살인을 했음을 고백했음에도 전혀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지울 수 없어, 이제 자신이 사랑하던 소설가와 자주 만났던 마을 외곽 우물가에서 자살을 꿈꾸며 서성이게 된다. 그런데 그 때 악마에게서 능력을 받아 새롭게 태어난 도니상 신부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악마의 키스로 사람의 마음을 투시할 수 있게 된 도니상 신부는 무쉐트를 보자마자, 바로 그간 무쉐트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구원을 설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가기에 급급한 무쉐트는 도니상 신부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하기에 도니상은 무쉐트에게 이제껏 일어난 그 모든 죄가 무쉐트 자신이 벌인 일이 아닌, 무쉐트와 혼연 되어 섞인, 그의 뿌리부터 그와 가까운 모든 존재에서 비롯된 원죄 바로, 그 악의 실체로부터 벌어진 일이며, 무쉐트의 순결한 영혼이 그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거기에 얽매어져 파괴되어지길 원했음을 밝히게 된다. 그렇지만 오히려 무쉐트는 그러한 원죄의식에서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모든 욕망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음을 그로 인해 깨닫게 되어, 자살을 하게 되고... 도니상 신부는 그 때문에 자신의 교구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도니상 신부는 무쉐트의 지울 수 없는 형상에 괴로워하며, 자신의 목숨과 영혼을 팔고서라도 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모든 욕망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 자신이 악마에게서 받은 능력으로 죽은 아이를 살려냄으로써, 모든 신의 섭리를 거스른 자신의 파멸을 신에게 고백하기까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한 갈등 가운데서 자신의 몸 하나 가눌 수 없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다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

 

 

 무쉐트.. 그리고 원죄.. 도니상 신부..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이 복잡한 관계의 고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신학생으로서 젊은 도니상 신부의 고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지만, 무쉐트의 경우는 도저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아마 원작가인 베르나노스의 경우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다시금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라는 글을 통해, 무쉐트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집착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의 경우, '사탄의 태양 아래서'와의 무쉐트와 달리, 같은 자살의 맥락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살이 구원으로 귀결되어지고 있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소설 '기쁨'의 경우에서는 좀 더 확연하게 소녀의 죽음이 갖는 이미지가 구원 쪽으로 그 의미가 드러나 지게 된다. 왜냐하면 ‘샹탈’이라는 지극히 순결한 소녀의 존재가 지극히 이기적이며, 지극히 비열한 소녀의 아버지와 그의 식구들로 인해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고, 또 그를 통해 어떻게 소녀의 순결이 이 땅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 살며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골 사제의 일기'에서는 비록 소녀는 아니지만, 한 젊은 신부의 고뇌와 죽음을 통해 이러한 모든 소녀의 죽음들에 대해, '그 모든 것이 은총이다!'라는 귀결을 내놓고 있다. 즉, 베르나노스는 소녀란 이미지를 통해 줄곧 순결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하여왔음을 우리는 여기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이러한 소녀와 순결이란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나는 뭉크의 그림들을 떠올려 보고자 한다.

 

 

 흔히 많은 이들에게 '절규' 혹은 '비명'으로 각인되어 있는 뭉크의 경우, 그의 다른 많은 그림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관념에 대한 상징주의적 그림 뿐 아니라, 많은 소녀들의 그림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소녀의 그림들이 주로 순백이나 빨간 색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다리 위의 소녀들' 그리고 '빨간 색과 흰색'이란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표현이 두드러져 있음을 우리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빨간 색과 흰색으로 대비되어져 있는 소녀의 모습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한 우울한 소녀의 모습이 어느새 빨갛게 달아오를 것처럼만 느끼게 된다. 특히, 기묘한 달빛이 어우러진 가운데 소녀들이 사내들과 뒤섞여 춤을 추고 있는 그의 다른 그림 속에선 하얗던 소녀마저도 빨갛게 변해버리면서, 마치 죽음과 키스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아침이면 어데 소녀는 간 데 없고, 발가벗은 나부의 모습을 한 요염한 여자가 남자의 시신 위에서 일어나, 이상한 해골처럼 변한 남자 혹은 뭉크가 길길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렇다면 대체 소녀는 어디로 가고, 남자의 마른 시체 한 구와 길길이 비명을 지르는 해골만 남아 있단 말인가? 어느새 새하얗게 순결했던 소녀가 붉게 달라올라 요염한 나신의 여자로 변해버린 것일까?

 

 

 

 

 

 

 

 

 

 

 

 

 

 

 

 

 

 


 너무나도 보편화된 관념들 속에서, 우리는 뭉크와 같이, 소녀의 순결이 사라져 버리고, 소녀가 여자로 변신한다는 사실에 많은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순결의식이 단순히 성적관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조르주 베르나노스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나 지게 된다.

 

 

 '사탄의 태양 아래서' 무쉐트의 경우, 오히려 순결은 너무나도 잔혹한 의식이다. 그녀는 차라리 그러한 순결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악녀가 되길 원하였고, 가차 없이 자신의 몸을 남자들에게 내맡겼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순결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그녀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가난한 소설가와의 사랑을 통해 더욱 명백히 그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지금껏 자신을 옭아매 온 족쇄인지는 누구보다도 그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다시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순결의식을 더럽히기 위해, 의도적이었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자신의 살인충동을 실현시키게 된다. 그럼에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그녀는 소설가와의 추억이 깃든 우물가에서 서성인다. 그런데 이제 타인의 속을 꿰뚫어 보는 도니상 신부가 갑작스레 나타나, 그녀에게 그러한 진실을 명백히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녀 스스로 얼마나 순결하기를 집착하고 있는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엇나가기 위해 그녀 스스로 자신을 원죄 속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도니상 신부는 과감히 밝혀내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그녀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의미하는 바이다. 그녀는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제껏 자신이 증오해왔던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그대로 혼연 되어져, 평생 그 올무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순결이란 감옥 속에서... 그렇다면...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순결의식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어떻게 원죄의식으로 귀결되는 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해 우리는 무쉐트를 통해, 도니상 신부를 통해 가늠해 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무쉐트와 같이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를 말살시킨 남자로 대변되는 우리이기에, 뭉크와 같이 여성 공포증에 시달리면서, 마치 자신이 무쉐트에게 살해당한 가난한 소설가라도 되는 양, 비명을 길길이 지를 수밖에, 그럴 수밖에 없단 말인가? 혹은 순결이고, 원죄고, 이러한 관념의 잔치들을 벗어나, 신이 없다면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 믿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반 표도로비치처럼 아버지의 살해라도 교사해야 하는 것일까? 정녕 우리에게 순결이란 건 커다란 족쇄 이외에 그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이러한 무쉐트의 죽음이 너무나도 안타까웠기에, 그의 다른 많은 작품들을 통해서 이미 원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상처투성이인 순결이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 돋아 오르는 순결의식을 지켜내기 위해 소녀들의 또 다른 죽음들을 설정하고 있다. 결국, 그 잔혹한 순결의식을 포기하지 않고서, '모든 것은 은총이다'라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계속되는 소녀의 죽음을 소설이란 매개체를 통해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순결이란 것이 더욱 원죄로, 악의 실체로 옭아매 들어가는 사슬일지라도, 그를 통해서만이 인간 구원이 가능하고 신의 은총을 인간이 확인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하기에 그에게서 뭉크와 같이 소녀가 농염한 여자의 나부로서 변신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사탄의 태양 아래서'의 무쉐트 조차도 뭉크 그림에서의 남자를 살해하고 발가벗은 여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잠깐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체 순결이란 게 무엇이기에, 우리를 그 원죄의식이란 절망 가운데에서 다시금 구원으로 향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쉐트의 죽음을 단지, 또 다른 무쉐트의 죽음을 통한 구원으로 그렇게 쉽게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에선, '사탄의 태양 아래서'의 무쉐트와 달리, 순결에 대한 의식이 없는 가운데, 갑작스레 어느 날 숲 속에서 밀렵꾼에게 겁탈 당하게 되면서, 되려 그 동안 잠재되었던 무쉐트의 순결의 의식이 되살아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무쉐트는 다시 더럽혀 지지 않을 자신의 고귀한 순결을 위해, '사탄의 태양 아래서' 무쉐트가 미처 스스로 떨어지지 못한 마을 외곽 어느 우물가에서,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그로써 영혼의 쌍생아인 두 무쉐트 모두 영혼의 안식을 얻게 되는 것처럼 보여 지고 있다.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 자살처럼... 사탄의 태양 아래 놓인 무쉐트를 구원하고, 겁탈로써 오히려 새롭게 피어난 자신의 순결을 영원불변하도록 간직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소녀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혹은 구원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소녀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그것도 자살이라는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으로 가는 길일지라도, 너무나도 잔혹한 것 아닐까? 그리고 다시 나는 되물어 본다. 대체 무엇 때문에, 소녀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이토록 순결에 집착해야 한단 말인가?

 

 

 오늘날 이 시대에 순결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분명 너무나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순결이란 족쇄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얘기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취급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감히 순결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말하는 것은 금기와도 같이 느끼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우리에게 갈증처럼 되살아나는 순결의식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남자와 혹은 어떤 여자와 잤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순결이 끝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조금 더 정결한 사랑을, 조금 더 순수한 사랑을 꿈꾸면서, 자신에게 가시처럼 돋아난 순결의 보호막을 대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시금, 그 이전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 아닌, 새로운 사랑을 꿈꾸게 된다. 아니, 매 순간 새롭게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그러한 순결에 대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다시 새로운 사랑을 꿈꿀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배신의 막다른 골목길로 몰아세우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어차피 불결해진 자신의 존재를 더욱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놓아 버리고, 포기해 버리는... 그래서 마치 사탄의 태양 아래 놓인, 그 잔혹한 원죄 의식에 놓인, 우리의 가련한 무쉐트와도 같이..

 

 

 아마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사탄의 태양 아래서'를 접하면서 느꼈던 혼돈들을 그대로 느꼈으리라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순결이란 것이 이곳에선 너무나도 간단치 않고 복잡하게 엉켜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순결의식은 순결의식이고, 원죄의식은 원죄의식이라고 하면 매우 간단할 것을, 영화는 아니, 베르나노스는 그 둘 사이에 전혀 명확한 구분 없이 헝클어진 경계를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시금,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이 사탄의 태양 아래 놓인 은총이라고 결론짓고, 우리의 잃어버린 순결에 대한 집착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그 누가 이 사탄의 태양이라는 뜨거운 불구덩이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 누가 그 뜨거운 불구덩이 지옥 가운데서 정금처럼 정결하게 내어 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녕, 그 벗어나기 힘든 순결에 대해 아직 집착하는 이 있다면, 그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방이 불길에 아스러지는 그 처참하면서도 황홀한 자태로..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그런 이들에게 정말로 순결한 사랑의 입맞춤 있기를, 무력하게 바라며 글을 마친다.

 

 

 

 

 

 

 

 

P.S.

 

 글 서두에 '사탄의 태양 아래서' 국내에서 구할 수 없다고 했지만, 이 글을 쓴지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구해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저도 읽어 보았습니다. 영화와 약간 구성이 다르지만, 맥락은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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