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룩크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 [초특가판]
울리 에델 감독, 제니퍼 제이슨 리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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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이 영화가 나온 지도 벌써 20년 정도가 지난 거 같다. 그리고 내가 이 영화의 제목만으로 매료되어 이 영화를 보겠다고 마음먹은 지도 어느덧 훌쩍 십년이 넘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 며칠 전에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몇 차례 시도가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그 때마다 무슨 일이 있어, 정작 비디오를 빌려 놓고서도 보지도 못한 채 갖다 주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10년이 넘은 오랜 기다림 끝에 이 영화를 본 지금, 나는 그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껴보며, 이 영화에 대해 무언가 써야하겠다는 강렬한 충동을 지금 여기에 옮겨보고자 한다.

 

 

  영화는 크게 세 구조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노조 총파업이라는 브룩클린의 상황 그리고 임시 노조 위원인 해리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창녀 트랄라의 이야기. 이 세 축을 중심으로 양념과 같이 게이와 건달들이 껴있다. 그리고 언뜻 이 정도의 이야기만 들었을 때 우리는 이 영화가 "분노의 포도"와 같은 노동 영화 계열이거나 혹은 인권 영화, 아니면 새로운 시각의 동성애 영화? 뭐 이런 것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모든 것들을 역으로 뒤엎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매우 강렬한 종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내 개인적 성향이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폭 좁은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탓이 클 게다. 그렇지만 어찌됐든 이 지면을 빌어 나는 나의 그러한 시각 하에 영화의 세 축을 중심으로 이야기 전개 구조를 새롭게 설정해 봄으로써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일단은 먼저 여기서 우리는 영화가 설정한 브룩클린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950년대 공장지대인 브룩클린 시는 노조가 완전히 총파업에 들어감으로써 매우 살벌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벌써 파업은 장장 6개월 간 지속되었으나, 경영자측은 묵묵부답이고, 모든 브룩클린 사람들은 노동을 포기한 채 노조가 주는 배급식량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제 이러한 장기적 파업 상황에 지쳐 중도이탈을 하여 한두 명씩 공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나머지 대다수들도 사실은 현 상황에 매우 지쳤으나, 이제까지 버텨온 6개월이란 시간 때문에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일 뿐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브룩클린이라는 상황이 얼마나 암담하고 절망스러운 분위기인지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되려,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노동자들의 절망 혹은 현실의 냉혹함 등에 전혀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 설정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래도 먹고 살만한 것으로 나오며, 우리의 주인공 해리의 경우엔 이 상황으로 인해 신분적 상승을 맞이한 케이스로 등장한다. 즉, 영화는 분명 노동과 파업이라는 어떤 현실 보다는 그 현실 속에 감추어진 무언가에 관심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주인공 해리에게로 건너가 보자.

 

 

  주인공 해리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파업이라는 상황을 통해 임시적으로 노조위에서 노동자들의 배급과 기타 상황들을 관리할 수 있도록 임명한 임시 노조 간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원래 파업 전에는 일반 노동자와 같은 신분이었으나 이러한 파업이라는 상황을 통해 급격한 신분상승을 체험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을 통해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해리가 다소 단순무식한 과격분자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과 오히려 파업이라는 상황을 다소간 즐기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현듯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없는가? 우리의 과거를 잠깐 기억해 보자. 아마 소설로써 우리는 그 상황들을 간접 체험 했겠지만, 6.25 당시 공산주의가 들어왔을 때, 단순하고 무식한 사람들에게 채워 주었던 완장의 힘과 공포를 우리는 잠깐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의 주인공 우리의 해리는 그 정도로 무식하거나 단순한 존재는 아니다. 다만, 그의 파업이라는 상황을 통해 쥐어진 신분을 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러하기에 영화 내내 다소 불안해 보이고, 약간은 초조한 듯한 기색을 띄운다. 사실 그 전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잘 알 수는 없지만, 노조위원이 되면서 그는 건달들과 자주 어울려야 하는 상황에 접하게 된 듯하다. 이를 통해 노동에 익숙해 있던 자신의 모습이 아닌 되려, 술과 유흥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동시에 그는 노조위원이라는 커다란 직책으로 인해 가정에는 매우 소홀해 지게 되는데, 이러한 소홀함은 아내 앞에서의 성적 무력함으로 표현되어지고, 게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진다. 그런데 왜 하필 게이인가? 사실 영화는 여기서 다소 모호한 구석이 있다. 왜냐면 기존의 게이가 놀림감의 양념처럼 등장한 영화라 하기엔 게이의 비극적 상황에 대해 너무 생생이 표현되어져 있고, 그렇다고 게이를 위한 영화라 하기엔 게이라는 대상이 주체가 아닌 객체로써 영화에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간의 억지적인 설명을 부가해 보자면 노동을 잃은 노동자의 모습과 남자이면서 남자가 아닌 게이의 모습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과, 이 영화가 남자인 해리 그리고 여자인 트랄라 중심의 축 속에 중성의 인간 게이라는 축을 숨겨두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여하튼, 해리는 같이 자주 몰려다니던 건달들과 함께 어울리던 게이들을 알게 되고, 그 중 한 게이와 친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은 어이없는 것은 이 해리가 좋아하게 된 게이의 경우 매우 호사스런 생활과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 면을 부각시킴으로써 마치 해리의 신분상승이 아니고선 접근할 수 없는 존재처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여기서의 게이의 이미지는 고급매춘부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바로 이 고급 매춘부인 게이에게 해리가 깊이 빠지게 됨으로써 이제 해리는 스스로 파멸을 맞이하게 된다. 왜냐하면 게이의 호사스런 생활수준을 맞추어 주기 위해 해리가 공금을 마구 이용하게 되고, 노조 일에 소홀해 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조위원회는 해리를 바로 해고시키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은 노동을 잃은 노동자가 파업의 상황에서 상승한 신분마저도 잃게 됨으로써 가장 무력한 인간 실존의 상황의 모습으로 변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완벽한 무력함을 입증하는데 있어, 영화는 해리가 집착하였던 게이에게마저 철저히 버림을 받음으로써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해리에겐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다. 그러나 해리는 그 전에도 가정에서 무력하였다. 그런데 이제 아무런 직위도 없는 그가 어떻게 가정에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쉴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게이라는 존재에 깊은 애착을 가진 그에게 아내의 존재가 눈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불행히도 해리는 술에 취해 자신이 좋아했던 게이의 이름을 부르며, 거리에서 방황을 한다. 그리고 거의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서 길가에 엎드려져 있는 순간, 자신을 일으켜주는 한 미소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욕정으로 불타올라 해리는 소년을 강간하려 한다. 그러나 소년은 해리를 뿌리치고 달아나, 바로 얼마 전까지 해리 자신 밑에서 자신을 돕던 건달들을 불러온다. 그리고 바로 그들에게 해리는 끔찍하게 얻어맞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이런 해리가 완전히 피투성이가 된 채 마치 십자가에 걸린 모습처럼 어느 철조망에 매달려 "오~ 하나님,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절규를 부르짖게 하며, 해리를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서 잠깐 해리의 이야기를 멈추고 트랄라의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단순히 해리라는 한 가지 축으로만 설정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또 기존의 방식인 해리와 트랄라라는 공동주연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둘은 서로를 알고 일정선상에서 연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둘은 전혀 다른 삶들을 통해 각기 무언가를 대변하고 있고, 그것은 브룩클린이라는 마지막 상황과 대치되어 부각되어 지는 것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어쩌면 너무나 천박한 창녀 우리의 여주인공 트랄라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트랄라는 말 그대로 완전히 걸레 같은 창녀이다. 그녀에게 남자는 오직 돈이며,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남자를 유혹함으로써만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그녀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트랄라는 해리 밑에서 일했던 그 동네 건달들과 한편을 이루어, 보통 지역의 순진한 군인들을 유혹하여 부둣가로 데려온 다음, 군인들을 기절시킨 후, 동네 건달들과 함께 돈을 갈취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러니 당연 브룩클린에서 트랄라의 평판은 좋을 리가 없다. 게다가 트랄라의 생김새는 어찌 그리도 천박한 창녀 모습 그 자체인지... 그럼에도 철없는 한 소년은 이런 트랄라를 매우 연모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나 트랄라란 여인 속에선 낭만이라든가 사랑이란 감정은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조그만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소 건달들과 군인을 유혹하여 돈을 갈취할 때에 여자이기 때문에 건달들로부터 불평등하게 돈을 분배 받는 것에 못마땅해진 트랄라는, 이제 군인을 유혹하여 건달들에게 넘기는 것을 그만두고, 아예 군인들을 유혹하여 돈을 뜯는 방법으로 사는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던 중 트랄라는 이제 갓 훈련소에서 나와 이제 곧 있으면 해외로 파견 나가게 될 한 젊은 군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매우 불안해 보이지만 순진해 보이기 짝이 없다. 그러니 우리의 트랄라의 레이더에 어찌 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트랄라는 평소처럼 군인을 유혹하여 군인과 자고 난 뒤, 군인이 잠 든 틈을 타 호주머니의 모든 돈을 털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순진한 이등병은 잠들어 있지 않았고, 트랄라가 자신의 옷에서 돈을 찾고 있는데도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창녀 냄새 풀풀 나는 트랄라에게 며칠이라도 좋으니까 자신이 해외로 떠나기 전까지 함께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트랄라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붕 떠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트랄라가 그 정도에 넘어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제껏 그가 살아온 삶이 어떠했는가? 그 거친 삶들을 생각해 볼 때, 트랄라는 이 젊은 군인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면 더 돈도 많이 뜯어낼 수도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지금 하는 짓으로 봤을 때 이 순진한 녀석이 떠나기 전 자신에게 간이라도 빼줄 거 같아 보이기에, 밑져야 본전인 셈으로 함께 한다. 아니, 트랄라는 완전히 봉 잡았다 생각하고 며칠 동안 그오 함께 한다. 그렇지만 동상이몽이었을까? 군인이 떠나가는 날, 트랄라는 군인이 파송될 배까지 마중 나온다. 그리고 군인이 자신에게 지불할 화대를 기대하며 강한 눈초리로 군인을 바라다본다. 그런데 군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마치 자신의 애인을 두고 떠나는 양 쉬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아쉬워하다 트랄라에게 떠나기 바로 전 봉투 하나를 건넨다. 봉투에 두둑한 느낌이 돈이라고 생각한 트랄라 만면의 미소가 지어지고, 마지막 키스와 함께 트랄라는 군인을 떠나보는데, 웬 걸? 봉투 속엔 땡전 한 푼 들어가 있지 않고, 편지만 달랑 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군인 자기 자신을 위해 기다려 달라는 말, 자기도 트랄라를 위해 돌아오겠다는 말,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 그러니 우리의 창녀 트랄라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는가? 순진함도 유분수지 이게 어디 될 법한 말인가? 그러나 트랄라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말들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었으며, 자신도 한 번도 떠올려 보지 못한 그것들을 모르게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앞으로도 창녀이어야 하고, 그것만이 자신의 살아갈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바로 여기서 트랄라는 심하게 갈등하게 된다. 영화는 트랄라가 가득 취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대변해 주고 있다. 마치 미친 듯이 술에 취한 트랄라는 수많은 남녀들이 춤추고 있는 술집에서 자신의 웃옷을 벗으며 당당히 소리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슴이다!!" 서글프게도 바로 이 말은 그 젊은 병사가 자신의 작은 가슴을 불평하자 해주었던 말이었다. 그리고서 트랄라는 수 십 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관계를 갖기 시작한다. 실신하여 정신을 잃어버릴 때까지....... 그녀는 모든 남자의 욕정을 위한 도구가 되어 찢겨진 채 바닥에 엎드려져 있고, 그럼에도 수많은 남자들은 마치 그녀가 그것을 원하는 양 착각하여 그녀를 농간하고 있다. 그리고 거의 죽어가기 일보 직전, 이제까지 남몰래 트랄라를 연모하던 소년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서, 주위의 모든 남자들을 쫓아낸다. 그리고선 트랄라의 벗겨진 몸을 덮어주며 처절히 통곡한다. 마치 수 십 명에게 얻어터진 듯, 고통스러운 표정의 트랄라가 가까스로 일어나며, 소년을 가슴에 안고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어 준다.

 

 

 "울지 마....... 제발 나를 위해 울지 말아줘......."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가 경영측이 모든 노조 측의 조건을 수락함으로써 승리한 노동자들의 의기양양한 출근의 모습을 담아내며 끝을 맺는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매우 복잡한 구조와 별 개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 이야기 하려다 보니, 내용 전개가 너무 길어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별개의 이야기들을 통해 하나로 나아가고 있기에 매우 특별하다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처음에도 밝혔듯이 이 영화는 결코 노동자 영화이거나 인권 영화가 아니다. 마치 영화의 설정과 마지막은 그러한 것처럼 우리를 착각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은 브룩클린으로 가는 출구가 아닌 비상구이다. 즉, 해리와 트랄라라는 파업에 있어 가장 소외되고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 새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려가고 있음을 감독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기존의 파업 영화였다면 우리는 여기서 파업이 가져다 준 절망과 더불어 그것을 겪고 일어난 인간성의 승리에 집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되려, 영화는 파업의 희생양이며 산 제물이었던 해리와 트랄라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던 민주주의, 진보, 좋은 세상에서 감추어져 왔고 숨겨져 왔던 진실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더 나아가 여기에 어떤 종교적 의미까지 상정한다. 해리는 바로 우리시대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리고 트랄라는 우리시대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상이다. 우리는 늘 그들을 밟고, 그들을 짓이김으로 발전의 도상으로 나아가 왔고, 영화는 바로 그 밟히고 밟혀서 가장 닳고 닳은 우리 시대의 처참한 그리스도와 마리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겐 다소 억지성 해석이라 받아들여 질 수 있겠지만, 영화는 서두부터 이러한 종교성의 물음으로 시작된다.

 

 

  "I will get up now and go about the city, through its streets and squares;

 

  I will search for the one my heart loves."

 

-Song of Songs 3:2

 

 

  "내가 지금 도시의 거리와 광장에서 일어나 나의 마음의 사랑하는 자를 찾을 것입니다."

      

  -아가서 3장 2절 중에서

 

  그리고 영화는 바로 현대라는 도시와 브룩클린이라는 거리에서 파업이라는 광장 속에서 우리의 마음의 사랑하는 자 해리와 트랄라를 진심으로 찾은 것이다. 더불어 영화 중간에 이와 함께 또 다른 축으로 해리가 거느렸던 건달을 사랑했던 한 게이의 죽음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보아야만 할 것이다. 다만, 감독으로써 그러한 게이에 대해 중심을 두지 못했던 것은 그러한 중성적 인간에 대한 감독의 입장이 명확하지 않고, 단지포용대상으로써의 객체적 인식 속에서 자리매김 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는 우리 시대에 짓밟힌 그리스도와 어머니 마리아가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끝없는 탐욕은 파업의 승리의 깃발을 치켜세우며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현대성이라는 거대한 공장 속으로 발걸음 하고 있다.

 

 

  그러나 제발 나를 위해 울지 말기를....... 정녕 그러하다면 오! 하나님!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지막 영화 속 절실한 물음을 던져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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