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할인행사
에이나인미디어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옅은 파란빛 파스텔 톤의 영상에 누구의 손목인지 모를 가녀린 손목 위로 유난히 밝게 돋아 오른 새하얀 붕대, 한 손길이 애처롭게 다가서려 천천히 가 닿고 있지만, 어느 매정한 손길에 가로막혀 붕대를 두른 손목 위로 두 손길이 포개지고 있다. 그리고 산산이 조각나는 유리알들, 부셔진 창문의 창틀 사이로 한 소년이 비집고 들어와 진열장에 놓인 망원경 하나를 몰래 훔치고선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종교 영화의 거장, 블루, 화이트, 레드에서 보여준 빛깔의 마술사, 그리고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의 신비에 관한 끊임없는 모색. 같은 종교 영화 계열에 타르코프스키식의 무언가 기괴한 이미지와 분위기와는 달리 얼핏 보아도 연민으로 가득 찬 크쥐토프 키에슬로우스키 감독의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언제나 그랬듯이, 이렇게 무언가 따스하면서도 시린 뉘앙스의 묘한 전조와 함께 본격적인 이야기 구조로 들어가고 있다.

 

  매일 밤 어느 시각이 되면 시끄러운 시계 소리가 어김없이 울려 퍼지고 소년은 거실에서 재미있는 TV프로를 보다가도 갑자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보자기에 둘러싸인 망원경 안으로 자신의 시선을 집어넣는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어느새 소년이 가 닿아 있는 곳은 맞은 편 아파트에 비어있는 쓸쓸한 집 하나, 어느 틈엔가 문이 열리고 불이 켜지면서 한 여인이 들어서고 있다. 한 삼십대 중년에 그리 어여쁘지도 않고 무언가 찌들고 지쳐 보이는 그러나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듯한 여자, 여자의 옷깃이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여인은 훌훌 자신의 옷을 마침내 다 벗어 재끼고선, 매일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레 욕조로 가서 몸을 씻고 부엌을 정리하고, 우유를 마시고....... 아마도 한 열 아홉이나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 법한 소년은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사춘기적의 불타는 성적 호기심을 감당하지 못해 이렇게 관음을 즐기고 있으리라. 하지만 무언가 영화에서 풍겨 나오는 배경음악은 심상치가 않다. 소년이 망원경에 자신의 시선을 투입시키는 동시에 단조의 선율로 애잔하면서도 무언가 절제된 음악의 분위기는 대체 이 관음증 환자와는 어울릴 법하지가 않는 것이다. 히치콕의 ‘사이코`에서 나오는 관음증 환자의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샤론스톤이 나와 떴던 `슬리버`에서의 환자의 모습도 아니고....... 단지 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따스하고 애린 음악을 배경으로 깔은 것일까? 여하튼 왠지 모르게 심상치 않은 소년의 시선과 음악은 이러한 관음과 뒤엉켜 여인의 몸짓 하나 하나에서 풍기는 자태를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역시 아니나 다를까 여인은 그렇게 단아한 여인은 아닌 거 같다. 그녀의 집 문이 다시 열리고 그 나이 또래의 한 남자가 들어서는 순간, 벌써 강렬한 키스신과 함께 뜨거운 정사에 대한 예감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것은 이제 막 재밌어지려는 찰나에 소년이 갑자기 망원경에서 자신의 시선을 떼어놓는 것이다. 그리고선 이 놈, 어이없게도 수화기를 들더니 가스 점검소에다 맞은 편 아파트 그녀의 주소를 대며, 점검이 필요하다 거짓 신고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아니나 다를까 한참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하려는 두 중년의 불타는 남녀가 사는 그녀의 집에 초인종이 울리며, 가스점검부가 들어선다. 두 남녀가 극구 전화한 적 없다고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들어가, 두 남녀의 달아오른 육체를 식혀주는 것이 아닌가? 음흉하게 생긴 남자는 어이가 없어 그냥 돌아가 버리고, 여인은 요사이 자꾸 일어나는 이 일들이 심상치가 않다며 두려워한다. 그리고 소년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분명, 여기까지 모든 행위는 스토커 이상의 행위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작태임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나 아직도 여운이 남은 시린 소년의 시선과 함께 무언가 다른 예감들을 떠올려 보게 된다.

 

  어느 날 밤, 어김없이 소년의 시선이 망원경에 가 닿고, 비어있는 그녀의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있는데, 한참을 지나도 여인이 보이질 않는다. 아마 오늘은 밖에서 외박을 하는 거라 여기고 소년이 실망한 안색으로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거의 자정 지나 새벽쯤, 잠 못 들고 있는 소년의 귀에 요란한 차 소리와 함께 여인의 소리가 들려온다. 무심코 밖을 내다보니, 저 번에 그 남자와 여인이 다투고 있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알 수 없지만 남자는 여인을 밀쳐 버리고선 홀로 자신의 차를 타고 떠나버린다. 여인은 힘겹게 자신의 집으로 들어선다. 텅하니 비어있는 집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여인, 결국 가눌 수 없는 자신의 몸뚱이를 식탁에 엎드러뜨리고 서글픈 눈물들을 뿌리는데. 뜨거운 시선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소년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지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이다가 아직 잠들고 있지 않을 친구의 어머니의 방으로 찾아간다.

 

  여기서 소년의 캐릭터는 매우 특이하다. 고아인 소년은 친구의 집에서 살고 있는데, 친구는 세계 여행을 떠난 상태이고, 아마 소년이 친구의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듯하다. 그리고 학교에 다닐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우체국에서 정식 직원으로써 일을 하고 있다. 아마 법적 미성년 나이를 갓 지난 듯싶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상황이 이렇다면 분명 조금은 어둡거나 해야 할 소년이지만, 소년은 전혀 평상시에는 삐뚤어지지 않고 성실한데다 스스로 공부도 매우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여기서의 이런 소년의 캐릭터의 설정은 아마 감독 자신의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그 무엇일지도 모르겠지만, 중년의 여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나지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설정 가운데 얼핏 소년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소년은 친구의 어머니께 질문을 한다.

 

  "왜 사람들은 슬퍼하는 거죠?"

 

  "왜 그러니? 토멕(소년의 이름) 무슨 일이 있니?"

 

  "아니오. 그냥 책을 읽다가....... 어른들이 너무 힘들어하면서 사는 거 같아서요. 전 그런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어요."

 

  "토멕, 지금은 세계 여행을 떠난 네 친구가 아주 어렸을 적에 그러니까 아기였을 적에 일이란다. 너무 아파서 마치 곧 죽을 거 같은데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더구나. 정말 내가 그 고통을 대신 당할 수만 있다면 하면서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였어. 그런데 불현듯 옆에 코드를 뽑지 않은 다리미가 보이더구나. 그래서 내 어깨에 그 다리미를 조용히 갖다 댔어.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그러고 나니까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더구나."

 

  약간은 이해할 수 없는 키에슬로우스키식의 대화가 이렇게 오간 후, 소년은 자신의 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가위를 꺼내서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천천히 찍어 내린다. 한 번, 두 번, 가위는 손가락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조금씩, 조금씩 그 속도를 빨리 하고 있다. 그리고 소년은 눈을 감고....... 마침내 볼펜이 한 손가락을 거세게 찍어 내린 후, 선 붉은 핏방울과 함께 고통스러운 소년의 얼굴이 보인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소년은 미소를 머금은 것만 같다. 아마도 분명 소년은 여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물론 그 시작은 관음의 대상으로써 이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이제 여인의 주위를 배회하며 자신의 존재를 천천히 알려간다. 소년 특유의 그 순진함으로. 예를 들어, 소년은 자신의 직위(우체국 직원임)를 이용해 가짜 용지를 만들어서 여인을 우체국에 들리게 만든다거나, 여인이 우유를 항상 마신다는 사실을 알고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기 시작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괜히 수거하기 위해 내놓은 병을 몰래 치우고선 가짜로 빈 병을 받기 위해 새벽에 여인의 집에 초인종을 눌러, 여인을 귀찮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소년이 자꾸 가짜 용지를 만들어 우체국에로 여인을 헛걸음을 시키면서 여인이 우체국 직원들에게 모욕을 받게 되기까지 하는데 있다. 물론 소년이야, 아마 그 순진함 때문에 그런 거 저런 거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여인을 보기 위해 그런 행위를 한 것이겠지만, 어른의 사회에서 위조 서류라는 문제는 만만치 않은 것이기에 여인은 심한 모욕을 당하고, 서러이 우체국 밖으로 쫓겨 나가게 된다. 이에 소년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여인의 뒤를 쫓아가 소리를 질러 여인을 멈춰 서게 한다.

 

  "잠깐만요.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너무나도 어이없는 한 마디, 순간 놀란 여인이 뒤를 돌아 소년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니?"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요."

 

  "그래. 난 아무 잘못도 없어. 하지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혹시?"

 

  "네. 다 제가 꾸며 낸 거예요."

 

  "왜? 무엇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기가 찬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소년을 모멸 차게 바라다보다가 다시 소년에게 놀라 묻는다.

 

  "뭐! 뭐라고... 사랑한다고... 날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오. 전 당신을 잘 알아요. 어젯밤 당신은 울었어요!"

 

  소년의 어이없는 대답들에 여인은 이제껏 자신의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감을 잡고선 너무나 경악을 한다.

 

  "그럼 이제까지 너였단 말이야! 전화를 하고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가짜 용지를 만들어서 나를 곤란하게 하고, 우리 집 주소로 전화를 해서 있지도 않은 가스점검을 받게 한 게 다 너란 말이야!!"

 

  "네..."

 

  너무나 화가 난 여인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년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럴 수가.. 그게 다 너였다니.. 정말 꼴도 보기 싫구나.."

 

  그리고선 여인은 '획' 하니 돌아서 소년을 남겨두고서 떠나버린다. 그리고 그 날 밤, 여전히 소년의 시선이 여인의 집에 머물고 여인은 예전에 그 남자와 같이 있다. 그런데 여인은 소년을 의식한 듯 되려, 더욱 과감하게 옷을 벗어 재끼고선 가장 눈에 띌 만한 자리에 침대를 돌려놓는다. 남자는 뭔가 이상한 듯 주춤거리지만 여인의 적극적인 태도에 이내 의심을 풀고 다시 중요한 작업에 돌입하려 불을 끄려고 하는데, 여인이 자꾸 불을 못 끄게 만든다.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한 남자가 여인에게 왜 그러냐고 다그치자 여인은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흥분한 남자는 수화기를 들어 소년에게 신호를 보낸다. 순진한 소년은 그 신호에 그대로 응하고, 여인의 집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 남자가 밖으로 나오라고 하자 무력하게 나와 남자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여인은 불쌍하다는 듯이 남자를 말리고, 멀리서 소년의 친구 어머니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소년이 어김없이 시퍼런 눈덩이를 하고 여인의 집에 우유병을 치우러 들어섰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갑작스레 여인이 튀어나온다.

 

  "괜찮니?"

 

  여인의 손길이 소년의 파란 눈덩이로 다가서려 하자 소년은 두려운 듯, 시선을 떨군다.

 

  "미안하구나. 그렇게까지 할 줄은 나도 몰랐어. 하지만 이제 뭘 잘못했는지는 알겠니?"

 

  말없이 소년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정말로 순수하기 그지없는 소년의 모습, 그래서였을까? 여인은 못내 애처로운 시선으로 소년을 응시하며 묻는다.

 

  "그리고 어제 나한테 했던 말.... 정말이니? 그러니까.. 어제 내가 우체국을 나왔을 적에..."

 

  "네..."

 

  "뭐라고 했었지?"

 

  집요하게 여인은 소년을 추궁한다. 대체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였을까..?

 

  "사랑한다고요.."

 

  "음... 사랑이라...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구나.."

 

  무언가 닳고 닳았으면서도 그리웠기 때문이었을까? 여인의 표정은 찌든 듯 냉소하면서도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근데 너 같은 애가 왜 나같이 나이 많은 여자를 좋아하는 거지? 대체 넌 사랑이 뭔지 알고나 있는 거니?"

 

  "그냥... 같이 있고 싶어요... 자꾸 생각이 나고... 보고 싶고..."

 

  "그래? 재밌구나. 흥미롭고.. 그럼 오늘 같이 저녁이나 먹자꾸나. 어때? 괜찮겠니?"

 

  "네.."

 

  갑작스레 환희의 들뜬 소년이 미친 듯이 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내달리기 시작한다. 층계를 내달리며 옥상까지 숨 쉴 틈 없이 달려가 한 움큼 쌓인 눈덩이를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대고선, 뜨거운 청춘의 미열을 달래본다. 분명 소년은 환희를 꿈꾸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날 밤, 같이 저녁을 먹고 이제까지의 모든 얘기를 솔직하게 나눈 뒤 헤어질 무렵, 여인은 자연스레 소년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아주 능숙하게 소년을 유혹하기 시작한다. 샤워를 하고, 잠옷 차림으로 갈아입고선....... 아직 자신의 미열을 감당할 수 없는 소년에게

 

  "난 지금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단다. 한 번 만져 보지 않을래..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자연스럽게 만질 수 있는 거란다. 왜냐면 사랑은 터치니까."

 

  여인의 손이 소년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벅지에 얹어 놓는다. 소년은 괴로운 듯 그러나 뜨거운 본능을 어이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며 점점 여인의 깊은 곳으로 자신의 손길이 미끄러지고 있음을 응시하고 있다.

 

  "지금 축축하게 젖어있지? 그건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그 걸 하고 싶을 때 나오는 거란다... 괜찮아.. 더 가까이.. 더.."

 

  마침내, 끝까지 미끄러진 소년의 손길과 함께 소년은 그만 그 순간 사정을 해버리고, 여인의 무릎 위로 엎드려 진다.

 

  "벌써 끝이야? 안됐지만 사랑이란 건 이게 전부란다..."

 

  씁쓸한 여인의 말이 채 방안에 여운을 띄고 맴돌기도 전, 소년은 벌떡 일어나 여인의 집을 뛰쳐나간다. 그리고 마구 내달려 자신의 집으로 들어선 후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 대야에 물을 받고선 칼 하나를 떨리 듯 움켜 쥔 채 자신의 손목으로 가져간다. 투명한 물 깊은 곳곳으로 뭉게구름이 퍼져 가 듯 빨간 선혈이 번져 지고 있다. 그렇게 소년은 쓰러지고서, 앰뷸런스에 실려 간다.

 

 

 

 

 

 

  여자의 예감이란 항상 무언가 분명하진 않지만 사건의 분위기를 감지 할 수 있는 더듬이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여기 주인공인 여인은 소년을 떠나보내고선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닫고 소년의 집 쪽으로 응시를 한다. 그런데 그 아파트 단지에 앰뷸런스에 누군가 실려 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선, 여인은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우유 배달 시간, 소년이 자신 때문에 자살 시도를 하여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때부터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날마다 소년이 여인을 응시하던 그 시선이 여인에게로 전이가 되어, 여인이 이제 부재하고 있는 소년의 집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창문에 `돌아와! 내가 잘못했어!`라는 글귀를 써 붙이고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소년을 기다리고 있는 애처로운 여인의 모습은 이제껏 닳고 닳은 사랑에 대해 불신하던 어제의 여인이 아니다. 여인은 소년의 사랑이 자신을 바꾸었음을 깨달게 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제 용기를 얻어 소년의 집으로까지 찾아가게 된다. 다행히도 소년은 죽지 않았다. 마치 죽음에서 부활하여 사랑을 가르친 그리스도처럼 팔목에 새하얀 붕대를 두르고서 그렇게 누워 잠들어 여인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소년의 친구의 어머니가 여인을 그냥 쉽게 들어서게 해줄 리가 만무하다. 몇 번의 헛걸음 끝에, 간신히 잠들고 있는 소년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친구의 어머니는 그것도 매우 불안하여 소년의 방에 들어선 여인을 뒤쫓아 들어온다. 그리고 여인의 손길이 자신 때문에 고통당한 소년의 손목에게로 가 닿으려는 순간, 여인의 손길을 매몰차게 가로막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 많은 여인. 어이할 줄 몰라 서성이다가 돌연 여인의 시선이 소년의 망원경에게로 멈추어 선다. 그리고 마치 소년이 자신의 집을 쳐다보았을 때 같은 그 심정으로 천천히 망원경 안으로 자신의 시선을 집어넣는다.

 

  분명 비어있는 그녀의 집, 거기엔 서러움에 견디지 못하고 있는 여인 바로 자신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몸뚱이를 가누지 못하고 탁자에 엎드려 너무나 슬프게 울던 날, 엎드려진 여인에게로 소년이 천천히 다가서고 있다. 소년은 가만히 여인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놓는다. 마치 어떤 거룩한 성화처럼 천천히 고개를 쳐든 여인의 뒷모습은 소년의 손에게로 기대어 지고, 자신의 가련한 손길을 소년의 어깨 위로 기대어 놓는다. 마치 구원을 향한 간절한 염원처럼. 그리고 망원경에서 시선을 뗀 여인의 옅은 미소가 어린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원래 키에슬로우스키 감독의 단편 연작 시리즈물이었던 ‘십계’ 중 여섯 번째 ‘간음하지 말라’라는 작품을 연장하여 각색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순수이 종교적으로 바라다 볼 것이 많기도 하지만, 좀 더 다양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읽힐 수가 있다. 사실 맨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적에 나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선 조금은 야할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그런데 영화는 나의 이러한 관음증과 욕망을 배반하고서 오히려, 그러한 욕망을 통해 시작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내 안의 진정한 갈망을 여실히 목도하게 해주었다.

 

  군대를 제대하고서 주체할 수 없었던 그 때, 진종일 새벽길을 홀로 몇 시간씩 나다니며, 이제 주어진 내 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신학생으로써 신에 대한 열망, 동시에 인간에 대한 열망, 욕망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으로 신 앞에 엎드려질 수는 없는 것일까? 되묻고 되물었던 그 때, 내 욕망과 관음의 전이를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소년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이기도 하였다. 왜냐면 욕망으로 시작한 소년의 관음이 여인에 대한 따스한 사랑의 연민의 시선으로 뒤바뀐 것처럼 스크린을 향한 내 관음의 욕구가 소년의 사랑, 그리고 죽음,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인을 통해 나 자신의 닳고 닳은 사랑에 관한 불신을 목도하고, 동시에 어느 날 밤 괴로웠던 그리고 외로웠던 나의 날들에 나를 지켜준 까닭 모를 손길들의 존재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특히 전혀 충격적인 영상이 아니었음에도 여인의 시선 속에 되새겨진 마지막 장면, 여인이 고통으로 슬피 울던 날 소년이 함께 하던 그 여린 두 뒷모습은 신성한 충격이었고, 내내 잊을 수 없는 황홀함을 내게 심겨다 주었다.

 

  분명, 인간이란 존재의 근원에서 신성한 것과 고귀한 것을 찾는다는 것은 우스운 얘기일 게다. 우리의 모든 시선은 관음에 가 닿아,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어쩌면 우리의 모든 무의식은 성적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가 우리의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그런 의구심을 버려본 적은 없다. 하지만 아마 키에슬로우스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우리 존재의 욕망의 시원으로부터 신성한 것으로의 전이를 꿈꾸며, 영상에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담아낸 것 같다. 그리고 이쯤에서 나는 그러한 그의 질문을 다시금 떠올려 보게 된다. 정말 그런 것이 가능할까? 사람의 욕망이란 것이 신성함으로 전이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소외가 끝이란 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처럼 그렇게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홀로' 있어도 ‘홀로’가 아닌 ‘함께’라는 존재의 신비가 가능한 것일까?

 

  창밖엔 비가 내리고 이럴 때면 항상 나는 서글픈 상념에 빠져들곤 한다. 누군가를 바라보았던 내 애틋한 시선들과 또 그것이 거짓이라 믿어야 했던 기억들, 그것은 내 몫이 아니어서 더욱 슬프다는 어느 시인의 지쳐버린 연민, 버거운 처녀성을 견디지 못하고 숨죽여가며 자신의 순결을 내어버리고서도 다시금, 거대하게 가로막힌 순결의 성 앞에 질식해 버린 어느 소녀에 관한 기억들....... 마치 꼭꼭 숨어서 유난히 도드라진 꽃처럼 모든 욕망의 손길들을 배반하고서 잡을 수 없는 하늘의 별이 되어버리신 나의 그리스도의 초상. 이런 것들이 뒤엉켜 마치 사랑은 금기처럼 가 닿을 수 없는 경계처럼 내 시선 저 멀리 저 어딘가 파도가 거꾸로 밀려드는 수평선 사이로 아스러지고 사라져 가는 것만 같다. 그렇게 내내 그리운 것들, 다시 상념들....... 오늘 괜스레 떠올려본 한 영화에 대한 기억들과 어울려 다시금 생각해 본다. 아니 기도해 본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신앙 없는 내 차가운 맘으로 모든 존재에게로 아니면 그저 아득한 당신에게로, 사람의 그 모든 욕구들이 이루어지기를....... 그것을 통해 당신의 신성함으로 가 닿을 수 있기를....... 더 이상 당신의 그 구원으로 그 누구도 소외당하지 말기를.......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랑으로써만이 가능케 하고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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