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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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20대 때 기형도의 시 중 나는 이 시를 가장 좋아했었다. 아마도 그것은 내 본연의 자기연민이거나, 역으로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에 관한 연민의식으로부터의 발아였을 것이다. 아니, 사실 아무래도 좋다. 그것이 자기연민이었든 타인에 관한 연민이었든, 분명한 것은 저 시를 통해 나는 지금의, 혹은 향후 앞으로의 나의 몇 년 후를 예감했던 것 같다. 속은 이미 헐어버렸지만 날렵한 듯한 외양으로 부러지지 못한 채 나무줄기에 매달려 있는 모양의... 무언가 잔혹한... 혹은 이미 말라 비틀어져 나무줄기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 생생한 줄기 앞에서 뒹구는... 무언가 황폐한... 그렇지만 나는 그 때 한 가지 예감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줄기에 매달려 있든, 줄기로부터 부러져 나오든, 그래서 잔혹하든 황폐하든, 그 존재 자체에 깃든 허무가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전혀 충일하지 않고, 그래서 전혀 나의 방어막이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 이것이 예상보다 무척이나 서글프고 서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나는 결코 예감할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나는 지금부터 이 슬픔에 대해 정직하게 정면으로 부딪쳐 보고 싶다. 이것이 비록 내 치부를 드러내는 치욕밖에 될 수 없는 작업이 될지라도.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


 

 사랑과 섹스가 별개가 아니었던 스무 살 적을 떠올려 본다. 그 때 비록 나는 나의 동정을 창녀촌에 갖다 파는 멍청한 짓을 했지만, 첫사랑의 손길엔 떨려했고, 첫입맞춤에 온몸을 뒤틀었다. 그렇게, 단지 그녀의 손끝 체온과 입술에서 불어오는 숨결만으로도 세포 하나하나 각자가 분열하여 ‘감각’이란 이름의 또 다른 세포를 낳고, 그 세포를 통해 ‘영혼’이란 이름의 또 다른 생명을 낳을 것처럼, 그렇게 믿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말했듯이 사랑을 배우고 알기엔 너무 멍청했다. 나의 동정을 그렇게 쉽게 팔았듯이, 나의 감각을, 나의 영혼을, 나의 사랑을 믿을 수가 없다는 그 이유로 너무도 간단하게 그 모든 소중한 것들을 단지 섹스란 행위 하나에 손쉽게 팔아버렸다. 아니, 그 밑 모를 바닥으로 너무 쉽게 매몰되어 갔다. 그런 황폐한 인간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아주 단순한 손끝 감각으로부터 전해오는 세심한 배려가 사랑의 시작이자 완성이라는 사실을...

 

 

발화는, 그렇게 끔찍했다.


 

 스무 살 적에 그녀에게 나는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갖고자 현학적인 말로 떠벌였던 것도 아니고, 그런 관계를 실제로 맺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실은 어느 누구보다 이제껏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비록 내 품에서 잠시 쉬고 있지만 그 누군가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나에게도 너무나도 소중한 내 친구라는 사실을. 그러하기에 그녀와 친구 둘을 모두 너무 사랑했던 나로선 그 말도 안 되는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이란 말로 내 스스로를 변명하면서, 애써 위로하며 자위하려 하였다. 하지만 말의 올무라는 것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그 단순한 현학적 말장난 때문에 나는 그녀와의 예정된 이별이란 수순 이후, 모든 관계 속에서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집착해왔다.

 

 

안마시술소를 나온 뒤 기분은 더 나락 속으로 떨어졌다.


 

 그녀 이후 이제까지 나는 많은 여자들을 만나왔고, 그녀들과 쉽게 관계를 맺고, 그렇게 쉽게 헤어져 왔다. 그러나 나의 대다수의 관계는 업소의 여자들과의 관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채팅으로 여자를 만나 하룻밤의 관계를 맺거나,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본 적도 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나는 그녀들에게 제대로 치근덕거려 본 적이 없다. 아니, ‘자자’라는 말이 내 입 밖으로 나온 적조차 거의 없다. 내 스스로 그런 내 모습을 너무 혐오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에게도 쉽게 성욕을 느끼는 내가 나의 그런 성욕을 자연스럽게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결국 나는 누구보다도 욕망을 추구하고 싶노라고, 그리고 그래왔다고 떠벌려 왔지만, 기실 나의 욕망을 부끄러워하고 치욕스러워 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내게 다가오는 여자들에게조차 나는 너무나 쉽게 자고 싶다고, 그렇지만 사귀기는 부담스럽다는 말로 철옹성을 치고서, 그녀들과의 관계를 거부해 왔다. 그리고선 아주 쉽게 안마시술소와 같은 업소의 여자들에게로 도망을 쳤다. 때론 그녀들과 연인 비슷한 오랜 관계를 맺기도 하면서...

 

 

내가 처음부터 은교를 음심으로 본 것은 아니다.

 

 

 결국, 이 모든 말들이 변명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찌됐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거의 모든 여자에게 음심을 품기 시작했다. 물론,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내 음심을 쉽게 드러낸 적은 없다. 너무나 황폐하게 변해버린 내 감정을 내 진심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고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자꾸 보고 싶기도 했고, 자꾸 생각나기도 하긴 했다. 그렇게 하나의 욕망의 구멍이라는 존재로서 여자가 아닌, 존재 그자체인 여자로서의 누군가가 못 견디게 그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나를 휘감아버리는 음심에 그만 나는 절망해버렸고,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국, 모든 감정을 부인하곤 했다. 마치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아니 아무런 감정의 미동도 파동도 없었던 것처럼.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 내가 만난 그날 밤의 슬픔은 후자였다.


 

 언젠가 절친한 후배 하나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형은 책 읽고 울어 본 적 있어요? 나는 초등학교 때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고 1주일 동안 울었었는데...’ 잠깐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버지가 어릴 적 어머니와 이혼을 해서, 남달리 감성이 예민할 수밖에 없던 후배의 상황, 그리고 그에 비해 정작 문학을 한다고 하지만 빈약하기 짝이 없는 감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인간... 문득, 삼국지를 읽었을 때 관우가 죽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서 후배에게 그 장면에서 분해서 한 번 운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후배는 내 대답이 너무 엉뚱했던 탓에 ‘형은 진짜 남자다.’고 말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분명 코믹한 상황과 대화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때를 돌이켜 보면, 나는 자꾸 서글픈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실은 그 삼국지에 관한 기억마저도 날조된 기억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오기 때문이다. 대체 내가 슬픔을 터뜨렸던 그 마지막 때는 언제였을까? 나라는 존재는 실은, 남자다움이거나 혹은 담담함이란 외피를 가장하며, 줄곧 내 모든 감정을 삼켜오기만 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쉽게 내 진심을 외면한 채 나락해가며, 동시에 수인으로서 이제까지 내 모든 시간을 써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거울 속에 들어서 있는 남자는 내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이 모든 얘기들이 전혀 소설과 관계없는 허튼 소리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실 처음부터 나는 이 글이 이럴 것이라는 예감을 가졌다. 아니, 글을 읽자마자 이 글의 적요 속에 감춰진 ‘나’라는 인간의 황폐함과 그 슬픔에 정면으로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니, 일이었다. 이미 일주일 이전에 개략적으로 나는 글을 완성시켰지만, 도저히 바라다 볼 수가 없었다. 텍스트의 모든 맥락과 이야기 그 자체를 무시한 채 ‘나’라는 인간만 가득한, 그것도 징징 짜는, 마치 나의 외로움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모두 전가시키는 듯한 이 글을 도저히 바라다 볼 수가 없었다.

 

 

육체의 과실이 어느 생생한

물통에서 멱감는다

그러나 물 밖에선

투구와 같은 힘센 실다발을 풀며

떨어지는 물에 목이 잘리는

황금의 머리가 빛난다


           -P.Valéry, <목욕하는 여인>에서

 


 

육체는 다만, 풀과 같은가.


 

 흐트러진 감정을 추스르고, 이야기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야 할 거 같다. 처음 나는 기형도의 시 ‘노인들’을 인용하면서, 내 본연의 자기연민과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에 대한 연민의식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발아를 기점으로 시작된 내 사랑과 동시에 그렇게 시작도 해보지 못한 내 사랑의 나락에 관해 줄곧 두서없이 이야기해 왔다. 그러면서 한 가지 소홀했던 것은 내 지나친 감정이입 탓에 처음에 밝힌 어떤 예감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은 이미 표현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감춰진 언급은 거의 어떤 자기변명과 가까웠다. 그러하기에 그것이 어떤 예감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필연으로 표현되어진 느낌을 내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필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코 필연이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결국 필연이라는 말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자기책임을 다른 무언가로 전가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예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미 처음 그녀와 관계가 시작됨과 동시에 끝나가는 것을 예감하면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예감하고, 줄곧 그 예감에 따라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삼십대의 내 모습이 이렇게 황폐할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무줄기에 날렵하게 매달려 있는 추악한 마른 나뭇가지의 모습이나 이미 말라비틀어질 대로 말라비틀어져 나무줄기로부터 잘린 채 그 앞에서 나뒹구는 마른 나뭇가지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의 육체가 풀과 같다면 어떨까? 푸르지만 유연하지 못하고 뻣뻣한 나무줄기가 아닌, 거센 바람에도 이리저리 몸을 누일 수 있는 풀과 같다면, 그렇다면 어떠할까?


 

은교. 아,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이고 내 영원한 ‘처녀’이며, 생애의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애처롭게 발밑을 밝혀 주었던, 나의 등롱 같은 누이여.

 

 

불에 타고 난 노트의 재를 그녀가 울면서 화장실 변기 속에 주워넣고 있었다. “할, 할아부지...... 아무 죄...... 없어요! 진짜로...... 시......인이었어요!”

 

 

 인간은 결국 죽는 순간까지 풀이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때론 시를 통해 시 속에서 풀과 같은 인간을 창조하며 풀이 되는 인간들이 존재할 수 있을는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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