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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mecoming (Paperback)
Pinter, Harold / Grove Pr / 1994년 1월
평점 :
귀향 - 해체 그 이후 시적 가능성에 대해
정확하게 몇 년 전에 귀향이란 작품을 보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인터넷을 경로로 해서 아마 귀향의 영어 대본을 처음 접하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보았을 때 그 충격이란... 이 건 분명 현대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야기 같긴 한데, 그렇다고 친부교살에 대한 치밀한 고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극적 형태만이 취할 수 있는 어떤 드라마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이...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태생적으로 호로 자식들이 판치는 콩가루 집안에 대한 이야기에, 순전히 드라마에 대한 해체를 위한 해체만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끌림’이 존재했다. 그것은 본래적으로 드라마에 대한 관심보다 드라마 이면과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에 대한 내 개인적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 때문에 나는 귀향 이 후, 헤롤드 핀터의 작품을 꽤 여러 작 찾아보았다. 뭐, 사실 대다수는 그리 좋은 작품이라고 평하기는 좀 그렇다. 그나마 괜찮았던 작품이라면, 대다수 비평가들이 호평한 작들과 내 취향이 우연히 맞아 떨어져, 귀향과 생일파티 그리고 관리인 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번 계기를 통해 세 번째 정도 귀향과 위의 작품들을 보게 되면서, 이제야 내 '끌림'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그러면서도 무언가 공허했던 그 느낌에 대해 대략이나마 설명할 수 있게 된 거 같다.
먼저, 내 개인적 끌림은 앞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드라마 자체에 대한 내 개인적 무관심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삶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내 무관심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드라마라는 것은 인간의 사소한 삶과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사건과 사건을 이루는 이야기 구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건이 어찌되었든 또 그 사건 때문에 그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미미하다. 물론, 나라고 그 자체에 초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극적인 반전과 긴장감은 늘 나를 끌리게 하는 부분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언젠가부터 나는 드라마의 사건보다는 그 사건 속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내 개인적인 사고의 출발이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창조하는 작업에 앞서, 무언가를 부수고 해체하는 작업부터 이루어진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귀향의 어떤 면이 이러한 나의 끌림을 발화시킨 것일까?
처음에도 밝혔듯이, 귀향엔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 볼 수 있는 치열한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그렇다고 어떤 극적인 드라마 형태를 포기하는 대신에 시적인 내면의 독백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이 극은 처음부터 그냥 해체된 상태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혼란을 느낀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를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넘겨버리고, 그들이 그녀에게 창녀 일을 시키려 하는 것을 묵인할 수 있단 말인가? 백보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그의 바로 두 눈 앞에서 자기의 와이프는 자신의 동생과 관계를 맺고, 그에 대해 자랑삼아 떠벌리는 것을 지켜 볼 수 있을까? 도저히 일반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그러하기에 많은 비평가들은 주인공 테디와 루스의 결혼생활이 실은 진짜가 아니라 거짓일 뿐이라고 부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이야기하면서, 달을 가리는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극의 본질은 테디와 루스가 결혼했느냐 안 했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테디와 루스로 대변되는 이성과 욕망의 대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분명히 극적으로도 테디와 루스는 결혼한 상태이다. 그를 증명하기위해 초반 테디의 아버지 맥스가 루스를 보며 아들이 데려온 창녀라고 의심할 때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테디의 아내임을 설명한다. 게다가 그들은 세 자식을 낳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테디는 이 모든 과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묵과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앞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테디는 루스의 남편이라기보다는 이 극 속에서 지극히 차가운 이성을 지닌 철학자로서 더욱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는 테디와 루스가 마지막에 헤어지는 장면에서 힌트를 살짝 얻을 수 있다. 그 장면에서 루스는 테디에게 <어디서든 이방인이 되지는 말라>고 충고한다. 즉, 테디는 그의 철학교수라는 직업에 대해 설명하면서 스스로 고백하듯이 어디서든지 늘 능동적인 참여자가 아닌 관찰하는 이방인으로써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그의 부부관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묵과할 수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아니, 그냥 혼자 외떨어져 그 모든 혼돈으로부터 비켜 나갔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에 비해, 그의 아내 루스는 그 반대급부인 욕망으로, 특히 모든 남성들의 욕망이 투영된 대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여기서 먼저 나는 극의 마지막 부분을 잠깐 떠올려 보고자 한다. 테디가 루스와 작별한 후, 맥스는 루스에게 키스해 달라며 애걸하면서 루스가 종국엔 그들의 지배자가 될 것임을 예감하게 하는 독백을 한다. 그리고 동시에 루스는 마치 여왕처럼 의자에 앉아 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러한 예감에 상응하는 복선을 그 도도한 자태로 드러낸다. 즉, 집안의 권력의 축이 맥스에서 루스로 이동하게 될 것임을 이 글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미 그의 아들들에게조차 쉽게 무시당한 낡아빠진 권력을 가진 그였기에, 우리는 그에게 어떤 권력이 있었는지 의구심을 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초반 카디건을 입고서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짚고 등장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늙은 왕의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두에도 밝혔듯이 이 글은 바로 이런 측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현대판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전 세기의 카라마조프가 형제들과 바뀐 것은 우리의 왕인 아버지가 그 전 세기와 달리 이제는 너무나 그 권력이 쇠퇴하여 너무 늙고 힘없는 왕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처음부터 이 글은 레니와 조이를 통해 늙어빠진 구 권력인 아버지 맥스에 대해 조롱하고, 새로운 권력에 대한 갈망을 여성성을 대변하는 루스를 통해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새로운 권력으로 대변되는 루스가 과연 우리가 문학과 예술에서 요구하는, 그리고 특히 희곡에서 궁극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시적 담화나 시적 독백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속에서 루스는 작가가 남자인 까닭일지는 모르겠지만, 남성들의 욕망의 투사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어머니로서의 여성, 아내로서의 여성, 그리고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 그리고 루스는 영리한 것인지, 아니면 누드모델이었던 태생적인 이유 때문인지, 이러한 욕망의 투사에 대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심지어 이를 너무나 잘 이해하여, 이러한 남자들의 욕망을 이용하는 방법을 그녀는 이미 터득하고 있다. 극의 2막 초반부에 테디와 레니의 철학에 대한 정의에 관한 담화에서 루스는 이런 독백을 한다.
지나치게 장담 마. 잊은 것이 있어. 날 봐요. 내가 … 다리를 움직인다. 이것뿐이야. 그렇지만 난 … 속옷을 … 입고 있어. 속옷이 나하고 같이 움직여 … 그것이 남자의 정신을 사로잡아. 아마 오해하고 있는지도 몰라. 행동은 단순하단 말이야. 이건 다리고 … 움직이고. 왜 이런 것에 대한 관찰을 억제할까? 글쎄 입술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지도 몰라.… 입을 통해 나오는 말 자체보다도. 명심해 둬요… 이런 가능성도.
즉, 그녀는 그녀 스스로 남자의 정신을 사로잡는 방법을 알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관찰자인 테디와는 정반대 급부에서 철학의 저변을 이루는 사변적인 언어와 그 의미의 중요성을 부인하고, 그 언어가 발화되고 있는 행위와 그 행위의 시작점인 입술이라는 대상 그 자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 때문에 극 속에서 남자들은 이러한 루스의 다리와 입술에 정신이 사로잡히게 되고, 동시에 의미가 모두 해체된 언어를 남발하면서 행위 그 자체에 (특히, 루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성적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행위 자체는 루스의 이야기를 별도로 두고서라도, 남자들의 본능이고 욕망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주도권이 더 이상 남자들이 아닌, 루스라는 대상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는 작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전혀 감정선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이 차갑기 그지없는 극에 시적 가능성의 차원을 남성성이 아닌 여성성의 영역으로 남겨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우리는 이렇게 모든 남성적 욕망이 투사된 루스라는 인물이 여성성 그 자체를 논할 수 있는 대상인지, 그리고 이런 왜곡된 여성성의 루스가 어떻게 시적 가능성이 될 수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루스가 이러한 왜곡된 남성들의 욕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욕망을 그녀의 욕망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중화시켜가는 가능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이렇게 개방된 욕망의 인물들이 난립하는 세계 속에서 (그녀 자신을 포함해서), 혹은 이를 회피하는 인물들과의 대립 속에서 (샘과 테디로 대변되는), 이런 혼돈 속에 권력다툼에서의 정복자와 파괴자가 아닌, 새로운 관계의 화해의 가능성을 대변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면, 그랬다면 우리가 받아들였을 처음의 당혹스러움과 마지막 허탈함을 조금은 메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문학의 영역이 시적 창조에 대한 고집스러운 영역 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거울과도 같은 묘사와 미래에 대한 차가운 예견을 포함한다면, 여기까지의 작업이었을 뿐이라도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여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니, 그 자체가 어쩌면 시적인 가능성을 남겨둔 작업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