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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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 - 꽃을 향한 염원



부드러운 입술을 포개어

달콤한 혀끝 감각을 느끼는

당신의 아랫배는

따스하게 달떠 오르고

살짝 상기되어 불그스레한

당신의 수줍은 윗볼에

나는 갓 피어나 꽃잎을 펼친

당신의 질 옆 소음순을

상상하며 굵고 단단하게

그만 발기해버립니다.


온몸으로 발열하는 당신을

하나의 꽃이라고

살짝 젖혀진 당신의 입구를

하나의 꽃봉오리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지금 짐승처럼 발기한

나의 성기도

당신을 받쳐주는 줄기가 되어

바람에 흔들리듯 하늘거리며

당신 안에 흩뿌려질

나의 정액도

감히 꽃씨라는 이름을 붙여

하나의 의미 있는 아름다움으로

불리울 수 있을까요?

그렇게 당신과 같이 저도 감히

꽃이라 칭할 수 있을까요?


하나의 꽃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처럼 하나의 의미 있는

아름다움이고 싶습니다.



 언젠가 어느 여자에게 ‘꽃을 향한 염원’이란 제목을 달고 이런 시를 선물한 적이 있다. 그것은 그 여자와 나의 달콤한 하룻밤의 첫 정사를 꿈꾸며 내가 썼던 일종의 나 자신을 위한 고백이었다. 그렇다. 분명히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순전히 나 자신만을 위한 고백 그 자체였다. 꽃에 관한 강한 열망을 품은, 그러나 늘 꽃일 순 없는, 늘 꽃 앞에서 시방 위험한 짐승일 수밖에 없는, 그런 내 자신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품은....... 그렇게 짐승처럼 발기한 나의 성기도 꽃대이고 싶은....... 한때 이를 닦으며 뻐끔거리는 치약 거품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역함을 느끼게 만들었던, 코를 푸는 휴지 속에 맺힌 누렇게 하얀 콧물들 속에서도 종종 보아야 했던, 혼자만의 허공에 뿌려진 혹은 종종 여느 여자들의 배 위나 콘돔에 그대로 사장되어버린, 내 정액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이었다. 동시에 그 이유로 언제나 꽃과 의미에 대해 강렬한 콤플렉스와 함께 열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을 위한 충실한 고백이었다. 그렇게 온전히 내 자신만을 위한 고백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20살 때부터 나를 휘감아 온 화두들로부터 그 여자를 따로 분리시키지 못했고, 이렇게 추상화된 꽃이란 이미지로 그냥 그 여자 역시 여느 다른 여자들처럼 내 가슴 속에 묻어야만 했다. 그저 사랑하고 싶었고, 꽃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어떤 기억으로.......



 ‘자위일 수 없는 까닭’,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과 ‘신앙 없는 자의 기도’까지, 20살 때부터 내 뇌리 속을 사로잡았던 화두들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화두들에 휩싸이게 된 까닭은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사춘기를 휘어잡았던 신에 대한 열망과 거기서 비롯된 죄책감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게다.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춘기 때의 자위란 행위를 하면서 느꼈던 죄책감들, 그리고 20살이 되면서 차례차례 신을 떠나게 된 친구들의 방황과 그 속에서 한 여자에 대한 갈등에서 비롯된 정신적 고충들,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점층적으로 내 내면에 쌓여, 나는 그 모든 상황에서 비롯된 내 자신의 모순과 친구들의 절망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한없이 흔들려야 했던 한 여자에 대한 변명을 신이란 존재께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에 자위라는 혼자만의 외로운 몸짓도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바람이거나 기도일 수 있기를, 동시에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 한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의 사랑의 형태가 꽃 피어날 수 있기를...... 그렇게 인간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모순이란 형태의 언어와 나이에 갇혀버린 나와 우리의 부질없는 모든 20살의 행위들과 바람들마저도, 결국엔 하나의 신앙이거나 진실일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나는 그것들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고, 또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기 혼자만을 위한 자위와 사랑 그리고 신앙이란 곡조의 휘파람이란 얼마나 처량하기 그지없는지...... 어떤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는 혼자만의 진실을 비밀이란 신비로 포장한 그 마지막 곡조가 채 끝을 맺기도 전, 나는 그만 실소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시간이 지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20년이란 그 시간이....... 아니, 이제야 꼬박 그 20살이란 나이를 상쇄할만한 20년이 지나서야 겨우 알 거 같다. 꽃이란 실체와 그 꽃을 향한 내 강렬한 어떤 염원의 뿌리를.



 나는 지금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을 읽은 지 채 30분도 되지 전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급박한 호흡에서 글들은 ‘비평’으로써 그렇게 바람직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게다. 왜냐하면 이런 호흡의 경우 대개 글들은 감정의 결들은 살아있지만 당최 냉정하지가 않아서, 나중에 보면 마치 하룻밤의 정사를 꿈꾼 듯 격한 감정과 욕망만 뒤섞여 있어, 그 난잡함에 언제나 후회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감정의 결들을 최대한 살리고 싶고, 또 이로 인해 후회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격한 감정의 결들이 비록 나중에 봤을 때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격정 그 이상이 아닐지라도, 이를 통해서 내 나름의 절실한 고백을 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면, 아니 지금의 이 격한 감정의 이유를 알 수 있다면, 내게 후회할 어떤 까닭이 전혀 없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을 보고서 이런 격한 감정에 휩싸여 내 고백을 해야 할 절실한 까닭을 발견하게 된 것일까? 전혀 예상치 못한 내 시와 그녀의 글의 어떤 공감대를 내가 발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 글에서 온 어떤 압도적인 몰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 사실이지만, 내 절실함을 끄집어낼 만큼의 진실은 아니다. 기실, 내 절실함은 어떤 수치심에 가깝다. 그동안 내 자신의 글에 대해 한없이 스스로 오만했던....... 때문에 타인과의 공감대 없이 나 혼자만의 소리를 내려했던, 내 스스로에 대한 미욱스러움 그리고 부끄러움........



 이 글을 읽기 전 나는 오랫동안 구상했던 글을 쓰고, 스스로 비평도 해보며, 동시에 여러 사람과 함께 평가도 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었다. 글의 내용은 어떤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갇히면서, 어떤 흐릿한 형태의 여자 형상을 보고서 그간에 자신의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갖게 된 공포감과 수치심을 그 여자의 형상에 투영한다는 내용인데, 오랫동안 구상한 것에 비해 너무나 형편없이 졸렬하게 글이 써져 버렸다. 아마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글이 처음에 내 의도와 달리 너무나 추상적으로 가버린 데다, 엘리베이터 속의 여자 형상과 남자의 기억 속의 여자들의 연결고리가 미흡했기 때문이었을 게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결국 너무 내 혼자만의 이야기를 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로 그 글은 어떤 묘사도 인과관계도 없이, 화자의 추상 속에만 머물게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비슷한 구상의 ‘몽고반점’은 내용 자체는 관능에 대한 추상과 관념을 다루고 있지만, 전혀 추상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않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내 글과 그녀의 글의 간극이 이렇게 똑같은 성적 관념을 다루는데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가로 놓인 것 같은 차이를 만들어낸 걸까? 지금부터 나는 그 이유를 살피기 위해 먼저 이 글 ‘몽고반점’에 대해 나름 분석한 후, 내 자신이 부족했던 부분을 대조해보고, 글을 갈무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 글은 ‘몽고반점’이라는 어떤 현실적인 소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 소재는 다소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생소한 ‘몽고반점’이란 소재를 육체의 ‘순수성’과 연결 짓는 다소 시적인 연결고리는 일반인들에겐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렇게 매우 소소한, 그렇지만 일반적인 현실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소재를 글에 끌어들임으로써 독자의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동시에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녀는 능수능란하게 ‘몽고반점’에 성적인 관능과 함께 예술적 색채를 부여해 나간다. 특히, 여기서 그녀가 뛰어난 점은 이 ‘몽고반점’을 통해 드러나는 성적인 관능과 예술적 자연의 색채가 전혀 이물스럽지 않다는데 있다. ‘몽고반점’은 아직 어릴 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순수성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 순수성은 육체적 순수성과 결부될 수 있고, 동시에 자연 그대로의 순수성으로도 연결되어진다. 그리고 이는 이 글에서 화자와 함께 가장 중요한 축이라 말할 수 있는 화자의 ‘처제’의 캐릭터를 구성하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벗은 상태를 즐기고, 육식을 거부하는 문명에서 외떨어진 존재. 그 때문에 그녀는 그녀 식구들에게서조차 외면 받고, 모두에게 정신병자라고 오인 받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화자는 바로 그 이유로 그녀에게 성적인 욕구를 느끼기 시작한다. 또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화자가 사회적인 영상을 찍던 작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회에서 고립된 자신의 ‘처제’에게서 성욕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로 더 이상 사회적 작품이 아닌 관능 그 자체, 그리고 그 관능이 자연 그 자체로 표현되는 색채가 담긴 영상을 찍고 싶어하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경계는 너무나 미묘하고 위험하다. 왜냐하면 관능과 자연이 하나 되는 지점과 포르노그래피의 지점이 불분명할 뿐 아니라, 그 자신도 그 때문인지 처제에게 투영하는 자신의 욕망이 예술적인 욕망인지 관능적인 욕망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기실 처음부터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순전히 관능적인 욕망이었다. 때문에 동시에 순전히 예술적인 욕망으로 승화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확신하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는 경계와 구분을 나누는 하나의 도덕률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그’와 ‘처제’라는 관계, 동시에 ‘정상’과 ‘비정상’이 구분이 모호한 ‘처제’와의 관계가 어떻게 예술적 승화로 인정받고 용인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소설은 그냥 동화처럼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는 식으로 끝내지 않는다. 소설이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경계의 끝까지 이른 후, 이제까지 ‘화자’와 ‘처제’의 그런 모든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용인해 왔던 ‘화자’의 ‘아내’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이 경계가 애초에 무리였음을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끝을 맺는다. 즉, 하나의 관능적 실험으로써의 소설의 분명한 선과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내 스스로에 대한 비판과 앞으로의 글의 방향에 대해 잠깐 생각해 봐야겠다. 일단, 앞에서도 이미 밝혔듯이 내가 시도했던 관능의 실험은 너무나 추상적이었다. 때문에 캐릭터도 불분명했고, 배경 자체도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물론,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엘리베이터에 갇히다’라는 설정 자체에서 분명한 캐릭터와 현실적 배경을 끌어낸다는 자체가 이율배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떠한 추상과 비현실도 실제와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나는 잠깐 잊고 있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추상과 비현실적인 소재를 가져다 와서 쓸 때, 그리고 그것을 주제로 삼을 때, 더욱 실제와 현실의 디테일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단순히 ‘시’적인 글을 쓰겠다는 막연한 논리로, ‘추상’과 ‘비현실’을 써내려간다면 어느 누구와 소통하고, 또 어느 누가 공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2%를 위한 실험이었다고 한들, 그러한 글은 그 2%와도 소통할 수 없는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가 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그러하기에 이제까지 20살 때부터 집착해온 나의 화두들은 분명히 이 지점에서 나의 글쓰기에 걸림돌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아니, 분명 그러한 화두가 일반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다른 부분을 보게 한 점은 있겠지만, 동시에 그 시야를 함께 나누기를 스스로 거부하게 만든 걸림돌 그 자체였다고 말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그 때문에 나는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에서 다루었던 비슷한 내용의 ‘시’를 쓰고서 어느 여자에게 선물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나도 꽃이 되고 싶었음을, 그렇게 누군가처럼 의미가 되고 싶었음을 읊조렸는지도....... 결코,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 될 수 없는, 속으로만 타들어가는 소리로 그렇게 읊조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단순히 꽃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 그렇게 모든 존재에 대해 시기와 질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이제 와서야, 내게 하나의 꽃이었던 대상도 그 실체도 사라져버린 지금에 와서야, 조심스럽게 내 마지막 시구를 바꿔보고 싶다.



당신과 하나의 꽃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나의 의미 있는

아름다움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하나의 온전한 시가 된 이 시를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에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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