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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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

 

 너무나 익숙했던 이름의 탓일까? 그 익숙함과는 교묘하게 배치되게도 나는 버지니아 울프를 접한 적이 거의 없다. 10대 때 아주 오래된 번연본의 시집을 본 기억과 20대 때 영화 올랜도를 본 기억 정도? 그렇지만 사실 이마저도 마치 날조된 기억처럼, 거의 뇌리 속에서 지워져버려, 아니 그만큼 별 느낌과 인상을 받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거 같다. 물론, 이는 그 당시 나의 지적인 성장과 인생의 경험의 폭이 거기에 따르지 못했을 이유가 클 것이다. 더불어, 개인적으로 영미문학보다는 불문이나 독일이나 러시아문학 쪽에 줄곧 관심을 두어온 탓도 배제할 순 없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읽게 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그동안 왜 내가 버지니아 울프에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 왜 영미문학에 그토록 편협함과 비슷한 감정으로 다가서질 못했는지 반성해 보게 되었다.

 

 사실, 처음 글을 읽어 내려갈 때는 글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전날 잠을 제대로 본 잔 탓도 있었고, 흔들리는 전철에서 대충 시간을 때워 보려는 어중간한 심산도 한몫 했을 게다. 하지만 그만큼 익숙하지 않은 문체와 스타일이기도 했다. 표지에 쓰인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쓰인 기법’이라는 스타일이라는 것이 당최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동안 프랑스의 숱한 관념적이고 실험적인 소설도 접해 보고, 러시아식의 무겁기 그지없는 종교적 관념에도 굴하지 않았던 내가 왜? 대체 왜 그냥 길거리나 묘사하고, 날씨에 자기 기분이나 투영하는 한 여자의 글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동안 너무 외국소설과 장편을 등한시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엔 무언가 부족함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소설들이 추구했던 관념과 여기서 쓰인 의식의 흐름이란 기법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는 기본적인 관념소설의 특징은, 특히 내가 많이 읽어왔던 장르에선, 시간의 축이나 장소의 축이 중심이 되질 않는다. 즉, 현실이란 공간보다는 사유의 측면이 부각되어져, 소설의 가장 큰 틀이며 기본 축이라 할 수 있는 스토리가 부재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관념 속에서 현실은 너무나 생생하다. 그러하기에 여기엔 시간의 축도 존재하고, 장소의 이동도 공존하고 있다. 한 마디로, 스토리가 중시되는 관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순식간에 시간과 장소가 변경이 되고, 심지어 의식의 중심이 되는 인물도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어, 순간 집중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버지니아 울프가 이야기하는 스토리를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게 된다. 일반소설과 달리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속에선 친절하게 제 3자인 작가나 의식의 주인공인 화자가 시간을 알려주거나 장소의 변화를 알려주지 않는다. 갑자기 뒤바뀐 의식의 주인공인 어느 화자가 자신의 의식을 어느 시각과 장소에 투영하면서 독자는 시각이 바뀌었음을, 그리고 장소가 변경했음을 그제야 알 수 있게 된다. 때문에 독자는 때로는 페이지가 한참 지나서야 의식의 주체도 바뀌었음을 인지하게 되고, 시각과 장소가 바뀌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일부러 난해하게 그 의식의 흐름을 흩뜨려 놓은 경우는 없다. 내 개인의 경우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었을 때, 그런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작가가 일부러 의식의 흐름을 흩뜨리고, 난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어떤 그런 인상? 물론, 이 또한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날조되었을 확률이 크지만, 어찌됐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그러한 작위적인 복잡성을 띈 글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법의 소설은 흔한 소설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집중력이 없고, 익숙한 기법만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외면 받을 확률이 크다. 이 글이 단순히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이라는 측면만 강조 된다면,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의식의 흐름의 내면을 속속들이 보게 된다면, 그리고 그 의식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현실을 보게 된다면, 결코 이 소설을 그러한 기법의 소설로만 설명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식의 내면들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1. 클라리사 댈러웨이

 

 어떻게 보면 허영심이 가득한 속물적이고, 차갑기 그지없는 귀부인이면서도, 모두가 주목하게끔 만드는 우아함과 기품을 지닌 댈러웨이 부인에 대해 한 마디로 축약하기란 쉽지가 않을 것 같다. 비단,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뿐 아니라, 다른 많은 인물들에 대해서 묘사할 때도 그 인물의 한 축만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이면에 대해 표현하기 위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묘사가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인물에 대해 묘사하려는 시도보다는 인물 내부의 의식으로 작가 자체가 들어가 인물과 동일시함으로써, 인물의 객관적 묘사를 시도하기에 더욱 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 말에는 다소간의 어패가 있기는 하다. 작가가 인물의 내면에 들어가 동일시한다는 것은 그 표현 자체에서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주며, 때문에 인물의 객관적 묘사의 정당성에 대한 반박의 여지를 얼마든지 갖게끔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한 인물만의 1인칭 시점일 때의 문제이다. ‘댈러웨이 부인’ 소설과 같이 여러 인물이 각자만의 1인칭의 시점을 갖고, 각자의 의식 속에서 서로 상대방을 의식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비판하고 애증 하는 관계 속에 있을 때엔, 이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인물 서로는 서로를 평가하게 되고, 이를 통해 독자는 각자 다른 시점 속에서 한 인물을 바라보게 된다. 동시에 그 인물의 의식 속에서 왜 그런 다양한 시점들이 그 인물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때문에 댈러웨이 부인은 그의 남편 리처드에게는 더 없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지혜로운 존재로서 가치를 지닌다. 그렇지만 피터 월시에게는 허영심 가득한 속물이면서, 동시에 차갑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그녀 스스로는 이러한 관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바로 어쩌면 이것이 가장 그녀를 설명하는데 어울리는 키워드라고 말해야 할 것만 같다. 왜냐하면 그녀가 소설 초반부에서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 4막 2장의 ‘더는 두려워 말라, 태양의 열기를, 사나운 겨울의 횡포를’이란 경구가 이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 나는 이 구절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생뚱맞다고 할까? 피카딜리의 거리를 걷다가 문득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면서 떠올린 이 경구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게다가 이 진부한 표현이란. 맨 처음 읽을 때 집중력이 없던 탓도 있었지만, 이 구절이 다시 인용되었기에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질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모두 읽은 후, 그녀의 단편 중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서 이 경구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이 정확하게 몇 년 도에 쓰인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읽은 번역본에선 1922년에서 1925년 사이에 쓰인 단편으로 분류하고 있다. 즉,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은 1925년에 쓰인 ‘댈러웨이 부인’의 초고 형태인 단편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이유 때문인지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은 ‘댈러웨이 부인’의 초반부와 거의 비슷한 구성과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거기서도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에서 나온 경구가 등장한다. 그리고 동시에 영국의 시인 퍼시 셸리가 존 키츠의 죽음을 애도하며 썼다는 ‘아도나이스’의 한 구절도 등장한다. ‘서서히 스는 녹으로부터 안전해진 그는 이제 더 이상 슬퍼할 수 없네. 가슴이 차갑게 식고 머리가 하얘졌네.’ 여기서 특히, ‘서서히 스는 세상의 녹으로부터.’라는 구절이 강조되면서,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의 구절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즉, 나이가 50이 넘은 댈러웨이 부인은, 더 이상 20대 때의 뜨겁고 격렬하게 피터와 사랑하고 싸우던 클라리사가 아닌, 세월의 풍파를 온 몸으로 겪어 늙고 닳은 한 여인으로써 이제야 삶에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서서히 스는 세상의 녹으로부터. 그러하기에 그녀는 동시에 젊은 날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던 태양의 열기도, 사회주의라든가 혹은 페미니즘이라든가 하는 그런 관념으로부터, 그리고 인생의 사나운 겨울의 횡포도, 피터와의 이별이라든지 혹은 미스 킬먼으로 대변되는 종교와 권력의 횡포라든지 하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이제 담담하고 자연스러워져,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 두려움을 인식하고 있다는 자체는 아직 거기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50이 넘은 그녀는 이제야 그 실체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됐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녀 자신이라는 그 실체를.

 

2. 피터 월시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개인적으로 많이 몰입하고 흥미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비록 나이는 다르지만 50이 넘은 그와 40이 가까운 내 나이에서의 작은 연대감을 찾을 수가 있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헛된 사랑과 꿈을 찾아 헤매는 방랑자의 모습을 통해 나를 쉽게 투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때문인지 피터 월시에 대해서는 꽤나 단순하게 내게 읽혔다. 물론 피터 월시의 캐릭터 자체가 특별한 것은 분명하다. 젊을 적 지금의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와의 사랑에 실패하여, 마치 도피하듯이 인도로 향하며, 그 인도로 가는 배에서 처음 본 여자와 결혼을 하고, 다시금 애가 둘이나 있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온 철없는 남자가 어디 흔하겠는가? 하지만 작가가 여자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야기의 축이 아무래도 피터보다는 클라리사에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피터는 어떤 면에서 피터 그 자체로 읽히기보다는 ‘클라리사’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대변하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물론, 피터 자체에 대한 의식의 투영도 버지니아 울프는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지만, 너무 특별해서 일까? 아니면 나라는 개인적 인물과의 유사성에 기인한 익숙함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왜 피터 월시는 그 의식의 흐름 속에서 클라리사와 대비되는 불안감과 자유라는 측면 그 외에 피터 월시 그 자체의 이야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클라리사의 파티에 마지막이 이르기까지 부외자로 겉도는 피터 월시는 그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의식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내내 부유한다.

 

3.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와 루크레치아

 

 댈러웨이 부인과 피터 월시를 축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은 그 둘과 교묘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의 구조 속에 놓여있지만 이 두 인물만큼은 별도의 관계망 속에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둘과 연관된 월리엄 브래드 쇼 경이라는 당대 최고의 정신과 의사는 클라리스의 파티에 등장하기도 하고, 직접적으로도 이 두 인물이 클라리사와 피터가 함께하는 산책과 여정 가운데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는 한다. 하지만 이 부부는 이 소설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클라리사 파티에 등장하고 있지는 않다. 아니, 마치 그 파티 이면에 가려진 비극의 전초처럼, 아니면 파티를 가능케 하는 비극적 자양분인양, 셉티머스의 불행한 자살과 함께 파티는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왜 버지니아 울프는 이 두 인물을 등장시킨 걸까? 그것도 그렇게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어머니의 죽음 때부터 시작되어 그녀 말년의 비극적 자살까지 이끈 그녀 자신의 정신 병력을 떠올려 볼 때 나름 수긍이 가는 점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소설가와 소설은 분명히 분리되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이 소설 속에서 이 부부의 비중은 왜 이렇게 큰 것일까? 심지어 어떤 면에서 이 두 인물은 많은 이들에게 이 소설 속에서 축이 되는 두 인물인 클라리사와 피터 월시보다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지도 모르는 인물들이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클리리사의 귀족적 삶과 피터 월시의 방랑자적인 삶은 비현실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당시 세계 1차 대전을 겪은 후, 그것도 그 전쟁을 참여했던 당사자였던 셉티머스란 전도유망한 한 젊은이의 불행은 훨씬 리얼리티를 담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불행한 젊은이의 죽음은 소설 속 정점이 아닌 그 정점을 이루기 위한 출발선에 놓여 있다. 피터 월시가 클라리사의 파티로 향하는 여정의 사이렌 소리로, 그것도 먼 곳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로. 이 소설의 정점인 클라리사의 파티와는 마치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렇지만 이 불행한 부부가 참여하지 못한 클라리사의 파티에 그들의 불행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블래드 쇼 경은 등장한다. 그것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단으로 클라리사 파티를 이용하기 위해서. 특히나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셉티머스를 자살까지 내 몬 블래드 쇼 경 그 자신의 다소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철학을 정책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그가 파티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러하기에 어떤 면에서 윌리엄 블래드 쇼 경은 클라리사의 파티의 감춰진 위선과 거짓을 폭로하고 있는 구심점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클라리사의 파티는 이들과 무관하게 클라리사를 위해 그리고 피터 월시를 위해 존재해야 하고, 이 소설의 정점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대체 또 무슨 이유일까?

 

4. 결말 : 클라리사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

 

 앞에서 언급한 대로 클라리사의 파티는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의 자살과 그의 젊은 이탈리아 부인 루크레치아의 불행을 떠안은 채 시작된다. 동시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집결되는 장소가 된다. 영국 수상에서부터 대대로 권력 군인가문인 레이디 브루턴, 모사꾼인 휴 휘트브레드, 정신의과 권위자인 월리웜 블래드 쇼 경에, 클라리사의 옛 친구인 셸리까지. 그렇지만 그 모든 인물들은 다시금 소설 말미에 두 축으로 압축된다. 하나는 리처드 댈러웨이와 그의 딸 엘리자베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피터 월시에게로. 하지만 이 두 축은 사실 클라리사 댈러웨이를 통해 연결되어지고, 갈라진 축이다. 하나는 리처드와 엘리자베스로 대변되는 행복한 부녀관계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댈러웨이 부인으로써의 삶의 일면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피터 월시로 대변되는 그녀 자신 클라리사로서의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따로따로 분리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마지막에 피터가 느끼는 두려움과 황홀감 속에서의 이 두 삶의 축은 ‘클라리사로군.’이란 한 마디로 축약되어져 접합점을 찾고서, 소설은 바로 거기에 클라리사가 와 있다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런데 이 마지막의 간단한 피터의 외마디 경탄은 내게 있어서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첫째는 그 동안 줄곧 부유하던 피터의 정체성이다. 피터의 정체성은 바로 클라리사 그 자체였다. 클라리사라는 존재 속에 피터의 모든 사랑과 절망이 존재해 왔고, 때문에 피터는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클라리사는 이미 자신의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피터는 클라리사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녀 없이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그 어떤 삶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피터의 삶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클라리사에 대한 미적 의식으로 확장되게 된다. 왜냐하면 피터가 ‘클라리사로군.’이라고 외마디 경탄을 했을 때, 피터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줄곧 자신이 비판해온 클라리사의 허영과 거짓마저도 인정해버리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분노와 공포감이 아닌, 황홀감과 두려움 속에서 클라리사의 이름을 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클라리사는 결국 이 글 속에서 본인 스스로는 아니더라도, 피터를 통해 나르시시즘을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 부부의 불행과 파티에 온 모든 인간 군상들을 떠안은 그녀의 파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엔 세상에 스는 모든 녹이 존재해 있고, 동시에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사나운 겨울의 횡포가 공존해 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으로부터 어우러져, 동시에 외떨어져, 아름다움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클라리사’의 ‘나르시시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나르시시즘’이 피터를 통해 확언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나르시시즘’의 확장인 진정한 ‘미’에 대한 획득으로까지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이야기를 다소간 정리해 보아야 할 거 같다. 이 글을 어떤 면에서 나와 같이 미적인 측면에서 읽는 것은 분명 위험한 해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 글은 ‘클라리사’로 대변되는 삶의 모순적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느끼고 있다. 비록 그것이 셉티머스의 불행한 죽음과 여러 인간 군상들의 위선을 바탕으로 한 것일지라도, 그래서 인생이 아름답다는데 반론을 꺼내야 한다면 어떤 인생이 행복할 수 있고, 또 어떤 인생에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인생은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사나운 겨울의 횡포도 존재한다. 그리고 동시에 세상에 스는 녹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천천히 우리를 좀먹어 들어, 눈치 챘을 땐 이미 늦었을 때가 대다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뜨거운 태양의 열기 속에 감춰진 찬란한 태양이 지닌 빛의 충만함을 쉽게 부인할 수 없으며, 사나운 겨울의 횡포 속에 가려진 눈 내리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함부로 외면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에 스는 녹은 어떤 면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들이다. 아니, 어떤 면에서 분명 세상에 스는 녹은 아름다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세상에 스는 녹이 없다면, 그렇게 우리가 모르게 머리에 새치가 생겨나고 이마에 주름이 늘어가는 그 세월의 녹이 없다면, 우리가 젊은 날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란 존재가 이러한 세월의 녹들 가운데서도 혼자가 아닌, 그 어느 누군가에게는 두렵게까지 황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 무엇보다 이 불행한 삶 가운데 놓여진 우리의 존재를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는 동인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왜 쉽게 이렇게 우리의 삶의 동인이 되는 누군가의 외마디 경탄을, 우리에 대한 존재 고백을 들을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이미 가 닿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주 가까이에... 너무 낮은 읊조림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잠시 귀 기울여 보자. 또 다른 방황하는 ‘피터 월시’라는 우리의 자아가 아주 낮은 목소리지만 두려움과 떨림을 가득 품은 황홀감으로 읊조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클라리사로군.’이란 외마디 경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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