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의 연인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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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을 읽는, 고통스러운 즐거움

- 비극적 원형의 인물군상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희극적 묘사

 


 먼저, 이 비평의 제목을 이 소설집 뒤쪽에 나와 있는 문학평론가 신승엽의 해설집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했음을 밝혀두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의 비평을 읽은 것은 전혀 아니다. 원래 내 개인의 성향상 무언가 비평을 할 때 내 개인의 이야기와 엮어서 전혀 새로운 다른 이야기를 창출해내는 것을 나름의 재미라 여기고 있는 탓에, 기실 나는 거의 누군가의 비평을 읽는 경우가 드물다. 다만 우연히 읽어가는 도중에 본 이 소설집의 해설 제목이 내가 정미경의 소설을 읽고 느낀 바와 맞닿아 있는 맥락이 있어서 그대로 차용해 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미리 밝혀두고 싶은 바는 나는 이 소설집에 나와 있는 정미경의 소설 중 한 작품을 골라 비평을 하지 않고, 전 작품을 망라해서 비평을 해보고자 한다. 그만큼 한 작품 한 작품마다에서 느낀 재미가 개인적으로 남달랐고, 여운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어떻게 이 비평을 풀어나갈까 하고 몸이 달아있다. 아니, 읽는 그 순간부터 달아 있었다. 정미경이란 작가의 다소간의 색기 있는 묘한 얼굴이 내게 섹스어필한 작용을 한 구석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녀의 작품에 어른거리는 다소간의 냉소적이면서도 악착같은 그녀의 그림자에게서 내가 환영을 품은 걸 수도. 그 무어래도 좋다. 안달이 난 이 몸을 이 비평을 통해 다소라도 해갈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를 통해서 내 글의 또 다른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를 발견해낼 수 있다면, 이 비평이 단순히 내 자신을 위한 수음이 아닌, 그녀와 아니 그녀 문학과의 정신적인 접합이거나 접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그렇게 믿어보고 싶다. 그러하기에 먼저는 내 이런 안달의 이유부터 천천히 되짚어 보고자 한다.

 

 사실, 정미경의 소설집을 산 순간부터 나는 이미 흥분해 있었다. 이미 전에 ‘밤이여 나뉘어라.’를 통해서 그녀를 처음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고, 같은 소설집에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통해 일종의 내 이런 욕구에 대한 예감을 충분히 갖게 되었다. 제목부터 강렬하지 않은가? 마치 시그널 레드라는 원색처럼 강렬한 ‘나의 피투성이 연인’ 그리고 ‘밤이여 나뉘어라.’ 하지만 그때는 일종의 예감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거 같다. 왜냐하면 나중을 기약하며 그녀를 바로 찾아보아야겠다는 욕망을 억누르고서, 이내 지워버렸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소설집을 펼쳐드는 바로 그 순간 나의 모든 기억의 저변에 깔려있던 욕망들이 되살아났다. ‘너를 사랑해.’를 읽는 그 순간부터 바로,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 그 불꽃은 내게서 시그널 레드의 빛깔을 앗아가고, 경면주사 붉은 빛깔의 점이 비에 젖은 꽃잎처럼 착 들러붙었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붉은 원색이란 원형에 대한 집착을 앗아갈 만큼 강렬하게 붉은 기억과 욕망이다. 그렇지만 그 때문일까? 사람들은 그 경면주사의 붉은 빛깔을 주홍색이나 적갈색이라고 폄하한다. 게다가 비에 젖은 꽃잎처럼 그 빛깔이 착 달라붙었다고 한다면 대체 사람들은 무어라고 생각하겠는가? ‘시그널 레드’ 속 화자는 ‘미쳤구나.’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대신 스스로에 대한 초라함을 느낀다. 왜 일까? 글 속 화자는 타인에게 ‘미쳤구나.’라고 말을 꺼내게 될 때,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자신의 차가움에 진저리가 처질 거 같아서, 스스로에게 초라함을 느꼈다고 소리가 되지 못한 마음속의 말로 읊조리고 있다. 그렇게 글속 화자는 미친 경면주사의 붉은 빛깔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그 이유로, 원색과 유사빛깔 사이에 있는 색채에 대한, 다른 말로 단순하게 표현하면 광기에 대해 남다른 애착과 애증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쉬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빛깔이 글속 k에게 갖는 이유를? 그 빛깔 때문에 어느 날 누군가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면 우린 이해할 수 있을까?

 

 ‘너를 사랑해.’를 읽는 순간, 문득 그리스 비극이 떠올랐다. 아마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사랑하는 남녀가 생이란 팍팍한 현실을 위해 서로의 사랑과 감정마저 포기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하지만 왜 하필 그리스 비극이었을까? 그리스 비극을 남달리 읽은 적도 별로 없고, 아마 고등학교 때 문고판으로나 읽어본 게 전부일 텐데. 그저 철학을 공부했을 때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조금 언급된 비극의 원형에 대해 들은 풍월과 그리스 철학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에 대해 이름만 알 뿐인데. 하지만 단 한 가지 선명한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12명의 자식이 죽은 후에도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라고 하는 구절을 어디선가 최근에 내가 읽고서, 내 깊숙이에 각인시킨 그런 기억이.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그리스 비극을 검색해 보았다. 그를 통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이 내게 꽤 맞을 거 같다는 정도였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이야기하는 ‘하마르티아(판단착오 혹은 도덕적 결함)’이 결여된 모순덩어리 그 자체를 다룬 비극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과격한 인물군상들과 구성들이란 무언가 다른 비극작가들과 궤를 달리하는 바가 언뜻 봐도 훤히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작가들은 직접 읽은 것도 아니라,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원래 처음에 찾고자 했던 작품도 내 기억 속에 있는 ‘그녀는 12명의 자식이 죽은 후에도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란 내용이 들어간 비극작품이었는데, 전혀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보이지도 않아, 이 기회에 그냥 큰맘 먹고 그리스 비극을 정독해 보자란 마음으로 알라딘 중고샵에서 약 9만 원가량 되는 그리스 비극 전집을 결제했다. 그리고서 새벽에 우유배달을 한 후 집에 들어가서, 근래에 봤던 철학원서를 뒤져보았다. 분명 거기 어디선가 그리스 비극에 대해 읽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책엔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그리스 3대 비극작가를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새벽 지겨운 영어문자들이 난립하는 가운데에서도 차분하게 정신을 가다듬고 찬찬히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았지만, 내가 찾는 구절은 어디에서도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오쯤이라고 해야 할 거 같다. 여하튼 그 시각에 불현듯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시몬느 베이유’ 전집이 있는 것이 기억이 나서, 한 1시간가량 또 책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뜻밖에 내가 찾던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 원래 내용은 이러하다. ‘머리칼이 그토록 아름다운 니오베도 식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란 구절인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잃고 상심한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에게 테베의 여왕이었던 니오베가 자식 열둘을 잃고도 식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이 고사를 통해 프리아모스를 위로하며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내용이다. 한 마디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난 완전히 삼천포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전혀 그리스 3대 비극작가와도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에우리피데스’니, ‘하마르티아’니 하는 작가도 말들도 그냥 뻘짓에 불과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토록 그 구절에 집착한 까닭과 그를 통해 그리스 비극을 3-4시간 이상 일일이 검색해 가며, 과감히 지름신의 임재를 통해 결제까지 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쭉 돌고 돌아 온 정경미 소설의 색기인 그 경면주사 빛깔에 대한 이야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이디푸스’니 ‘엘렉트라’니 하고 많은 유명한 비극들을 놔두고, 왜 잘 알지도 못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와 있는, 그것도 그저 고사로 이용된 니오베의 이야기에 나는 꽂혀있던 것일까? 그리고 왜 불현듯 정경미의 소설을 읽었을 때 그 구절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비극의 지점이 기존에 그리스 비극을 논할 때 흔히 말하는 운명과 굴레라는 지점이 아닌, 이런 현실의 기반 위, 다시 말해서 비극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이란 비극의 지점에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마치 ‘너를 사랑해’에서의 두 남녀의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비극의 서막 같은 결말처럼, 그리고 ‘들소’에서 여주인공 ‘수혜’가 그가 그토록 끔찍이 여기던 남편 ‘하윤’이 죽고 난 이후에도 그 ‘하윤’의 그림자 속에서 나머지 생을 묵묵히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비극은 오히려 모두가 죽거나 벌 받거나 하는 식의 간단한 결말이 아닌, 생을 살아가는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자식이 많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니오베가 자신의 모든 자식이 죽고 난 후에도 식사를 거르지 못했던 것처럼, 그러하기에 비극은 오히려 생에 대한 강한 집착과 천착으로 이어진다. 그 때문일까? ‘바람결에’에서 여주인공은 사랑 없는 관계에서 태어날 아기에 대해서 집착하고, 그 아기에 대한 희망마저 꺼져버린 그 순간조차 억척스럽게 비빔밥을 비벼 먹는다. 그리고 ‘매미’에서 ‘간질’ 비슷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쓰러질 듯한 36kg의,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 뻔뻔스러운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공 남자에게 생을 살아가기 위해 남자라는 특별한 다른 약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인간군상들 뿐이란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 말대로, 이 모든 것은 그저 ‘하마르티아’라는 판단착오와 도덕적 결함이 빚어낸 인물상들에 불과한 걸까? 하지만 역으로, 그런 판단착오와 도덕적 결함이 없는 인물은 또 누구란 말인가? 그런 인물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봤을 때, 비극의 탄생은 이렇게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모순된 우리들을 판단착오와 도덕적 결함이란 잣대로 재단하여 만들어낸 죄책감과 죄의식이란 관념으로 붉게 물들게 하는 그 경면주사 빛깔에 있지 않을까?

 

 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 ‘라신’이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히폴리투스’란 작품을 각색하여 만든 ‘페드르’란 작품이 있다. 내용은 간단하다. 전쟁을 나간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의 새 아내를 부탁하고 떠나는데, 그의 새 아내와 아들 사이에서, 다시 말해서 의붓아들과 새 어머니 사이에서 연정이 들끓어 올라, 결국엔 모두 자살로 끝나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정미경 작가가 ‘시그널 레드’에서 다소간 이 이야기의 원형을 자신의 소설 속에 끌어들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소설을 읽는 동안 했었다. 하지만 비단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이런 류의 금기된 사랑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려 있다. 그런데 왜일까? 정미경은 ‘시그널 레드’에서 그 금기된 사랑 이야기를 ‘경면주사 빛깔’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면주사 빛깔’이 진짜 원형이 되는 시그널 레드의 빛깔을 앗아가 버린다는 이야기 구성을 취하고 있다. 왜, 금기된 사랑의 강렬함이 원형적 사랑의 형태를 앗아가 버리는 걸까? 왜, 똑같은 사랑인데 하나는 원형이고 하나는 금기가 되는 것일까? 만약 색의 맹이라면 그 두 색의 구분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 개인적으로 실제 색약인 나는, 그것도 적녹 계열의 색약인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일정부분 공감하는 바가 있다. 색약검사를 하는 책자를 내가 읽을 때마다 학교 친구들은 큰소리로 웃었다. 분명히 내 눈엔 33으로 보이는데, 86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나는 어릴 적부터 이공계열과 예술계열에는 발을 들이미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물론, 내 기질상 그 근처로 감히 갈 수도 없었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권리를 빼앗기고, 소싯적 소방공무원 시험에는 이 문제로 인해 시험 응시 자격조차 얻을 수가 없는 실제 불이익을 겪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는 다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다. 실제 불이 났을 때, 색의 구분이 모호할 경우, 판단착오를 내려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고도 대형사고로 이어지게 만들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런 색약인들을 위해 색약안경도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원형이란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분명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구분해 놓은 색의 규정에 따르면 분명히 색의 원형은 나름 존재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소설 속에서도 나오지만 색의 구분이란 것은 너무나 인위적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서 나라마다 가장 다른 정의와 구분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색이라고 한다면 우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실제로 색이란 원형은 우리 인간의 눈이 가진 관념으로 구분 짓고 규정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런데 그 규정 때문에 우리는 많은 동류의 색을 단 몇 가지 원색 안에 묶는 일반화의 오류를 매일 범하고 있다. 왜, 경면주사 빛깔의 점이 비에 젖어 착 달라붙으면 안 되는가? 비록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그널 레드와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같은 종류의 붉은 빛깔 아니란 말인가? 파랑을 붉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붉어서 붉다는 것뿐인데... 그 빛깔이 유난히 강렬하고 야하게 비쳐지는 까닭은 혹 그 경면주사 빛깔을 같은 붉은 계통의 색이 아니라는 오해에서 오는, 단순하게 말해서 그냥 금기시하는데서 오는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하기에 비극은 탄생하고, k는 아파트 베란다에 뛰어내릴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그 스스로도 분명 경면주사 빛깔에 대한 고정된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테니까. 끝끝내 그가 뛰어내리는 순간까지. 하지만 악착같이 생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이러한 비극적 코드도 얼마든지 희극으로 바꾸어 놓을 힘이 있을 것이다. 마치 정미경의 이 소설집 속 과장적이고 비극적인 인물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유머러스하고 희극적으로 써내려가진 문체 그 자체처럼. 그 때문인지 나는 정미경의 소설집을 읽는 내내 카페에서 사람들 눈치를 봐가며 혼자서 키득거렸다. 물론, 정미경의 소설은 그런 비극적 삶에 대한 나름의 애착과 애증의 시선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가볍게 키득거리는 것이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나머지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리고 문학이란 이 덧없는 놀이에 함몰하기 위해, 이 정도 냉소적인 웃음 약은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 이런 거라도 없으면 대체 어떻게 생을 영위해갈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 해봐야겠다. 처음부터 방만하게 이야기를 벌려 놓아서 산만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느낀 바는 사실 간단하다. 정미경 작가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에 관한 부분이었다. 정미경 작가는 뛰어난 이야기 구성을 가진 작가도 아니고, 그런 구성을 구태여 짜지도 않는 작가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일까?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생생하고 감정선이 살아있다. 마치 그리스 비극의 과장된 인물들처럼. 그렇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그녀는 소포클레스나 아이스킬로스처럼 인생의 굴레라 말할 수 있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에우리피데스의 극중 인물들과 같이 악착같은 인물들을 좋아하는 듯하다. 자신의 남편에게 복수하기 하기 위해 남편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마저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도 잘 먹고 잘 산다는 식의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처럼, 그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파르티아’로부터 자유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비극에 초연하거나 초탈해 있지는 않다. 그저 다소 냉정하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즐긴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 때문에 비극을 코믹하게 표현하고 생생한 생으로 엮어낼 수 있는 것 아닐까? 거기에 비해 내 개인은 이제껏 내 개인의 이야기에 똬리를 틀거나, 관념 속에 파묻혀, 캐릭터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해 왔다. 사실, 기본적으로 이야기 구성이 약한 나로선 이 부분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험과 고름 짜내기란 명목 하에 너무 관심을 두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때문에 이번 계기를 통해 그리스 비극과 다른 캐릭터의 정형성이 살아있는 작품들을 공부해 봐야겠다는 의지를 다져본다. 어쩌면 다소 과장되고 어이없는 이런 캐릭터 구성들이 내게 더욱 어울릴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속에서 내 나름의 경면주사 빛깔의 점이 비에 젖어 착하고 달라붙는 그런 느낌의, 강렬한 원색에 대한 도전을 써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아마도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내, 내 개인은 거기에 천착해 왔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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