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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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여인의 키스 거대한 어머니의 품에 관해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쯤 우연히 이 영화의 비디오 케이스를 본 기억이 난다. 무작정 집을 나와서 노가다 판을 전전하면서 하루하루를 살면서, 저녁이면 비디오방에서 에로 영화를 보곤 했었다. 그때 우연히 이 영화의 비디오 케이스도 봤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면, 한참 영화광인 어떤 선배를 따라 영화를 볼 때, 본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어떤 여인이 거미줄 배경으로 가면을 쓴 채 있었던지, 정확한 그림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무언가 조금 많이 야해 보였다. 그 때문인지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로 되어있어서, 내 기억 속에 거미 여인의 키스는 야한 영화? , 이런 식으로 이제까지 각인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심지어 얼마 전까지 이 영화가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는 것도 사실은 잘 몰랐다. 거기에 덧보태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라는 것조차도.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내 대학 때만해도 해외 문학이라는 게 접하는데 일정부분 한계가 있었다. 그저 유럽의 고전정도만 소개되었을 뿐, 전공자가 아닌 이상 제 3세계 문학은 거의 접할 수가 없었다. 가까운 일본조차 겨우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소개되어, 히트를 치기 시작했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이번에 거미 여인의 키스를 읽으면서, 반드시 영화 또한 같이 보리라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결국 보지 못하고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다운을 받지 못한 건 아니다. 게을렀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고, 또 다른 이유는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무언가 말하고 싶은 바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소설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술방식이고, 두 번째는 내용의 구성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소설 내 동성애에 관한 9개의 긴 각주가 등장하고 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읽다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마디의 문학적 지문이나 해설도 없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영화 이야기를 해주는 서술방식을 취하다 보니, 매우 쉽게 읽히고, 문학적 서술방식이라기보다는 다소 연극적이고, 영화적 서술방식으로 느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내용의 구성방식 또한 첫 번째 서술방식에서 그 이유가 기인한다. 이 소설은 희곡처럼 총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거의 대부분이 6편의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각 이야기는 두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와 엇물려 나름의 복선과 상징의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표범 여인의 이야기의 경우는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주인공 몰리나의 현재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게릴라 청년의 관한 영화 이야기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발렌틴에 관한 이야기의 또 다른 변주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 마지막 기자와 여배우의 사랑 이야기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마지막 사랑에 관한 암시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끝으로, 이 소설 내 사용된 9개의 긴 각주에 대해선 다소 해석의 여지가 많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그저 동성애에 관한 객관적 각주를 통해 저자의 나름의 생각을 표명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 소설을 읽고서 왜 내가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는지 말해보고 싶다. 읽자마자 처음으로 든 의문은 이 소설이 왜 표범 여인의 키스가 아니라 거미 여인의 키스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사실, 앞에서 이 소설에 등장한 영화 세 편 이야기를 했지만, 소설을 읽고 나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이야기는 첫 번째 영화였던 표범 여인의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이야기 자체도 서두에 등장하는데다 자극적이기까지 하여 기억에 꼭 박히기도 하였고, 너무 생생하게 이 글의 두 주인공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나머지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다소 중복이거나 쓸데없는 페이지 낭비라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지루한 감방 생활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생각도 했다. 더불어, 어찌됐든 점진적으로 발전되어가는 둘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영화 이야기가 크게 매개체가 된다는 점도 인지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마지막에 가서 생뚱맞게 거미 여인으로 몰리나가 상징이 되어버리는지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아예, 그럴 거면 처음부터 표범 여인이야기를 꺼내지를 말지, 거미 여인이란 말인가? 사실, 이 때문에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읽고서 바로 품평을 쓰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이 탓에 영화를 보면 혹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다. 그렇지만 여차저차 핑계로 내내 미뤘고, 그렇게 이 소설은 내 기억 속에서 별로 중요치 않게, 차츰차츰 잊혀졌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이 소설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그것도 그동안 내게 다소간의 혐오대상으로 인식한 심리학책들을 읽으면서, 이 글의 거미 여인이 알게 모르게 어머니라는 여성성을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소간의 꿈을 해석하는 정형적 공식이 적용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내용을 떠올려보면 주인공 발렌틴에게 거세된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된다. 특히, 이 소설 내에서 이 부분에 대해 가장 도드라지게 나온 장면은 게릴라 영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속에서 상정된 부르주아 어머니와 발렌틴의 어머니는 일정부분 연장관계를 갖고 있다. 물론, 그 장면에서 발렌틴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려는 것처럼. 그러나 마지막쯤, 자신의 모든 존재를 몰리나에게 까발릴 때쯤, 발렌틴은 거세된 어머니 대신 자신의 옛 애인 마르타를 사랑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마르타는 한때 자신의 혁명동지였지만, 나중에 그 집단을 빠져나와 원래 그녀 자신이 속했던 부르주아 집단으로 되돌아갔던 사실을 시인한다. 그 때문에 그녀와 결국 결별하게 됐지만, 발렌틴 그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던 건 혁명동지로서의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위치, 다시 말해서 부르주아였던 어머니의 대리로써 사랑했을지도 모른다고 몰리나에게 토로하는 부분이 나온다. 결국, 이렇게 그는 어머니의 거세라는 애정의 결핍을 인정하게 되고, 마지막에 이르러선 몰리나를 통해 그 결핍을 충족하게 된다. 마치 거미 여인의 거미줄에 꼭꼭 옭아매져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벌레처럼,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무덤에 푹 빠져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이 단순히 동성애 문제로 뜨거운 화제가 되고, 논란이 되는 건 조금 우스운 현상인 것 같다. 그건 아마 이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한 다수가 논하거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사실, 이 소설의 이야기 중심은 순수한 사랑에 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혁명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반대급부인 혁명에 관해 이야기함에 있어선 다소 조심스러워 할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반대급부로 혁명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이 소설의 배경이 혁명의 중심지인 남미라는 사실도 있겠지만, ‘혁명속에 거세된 애정에 관한 이야기를 아마 저자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애정을 통해 혁명의 시대를 살아간 남미의 젊은이들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도 느껴졌다. 왜냐하면 애정만이, 오직 순수한 애정만이, 어머니와도 같은 바다보다 넓은 애정만이, 지치고 쓰러진 그들을 품어주고 안아줄 수 있으리라 저자는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사랑이 너무나 잔혹할 만큼 거대하여 모든 혁명의 에너지마저 무기력하게 만들지라도, 그리고 성적 소수자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희생을 강요받는 어머니라는 대상을 상정하는 것일지라도, ‘혁명이란 거대한 조류 속에서 차마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의 이름을 한 번은 불러보라고, 한 번쯤은 그 품을 기억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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