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초상 또 다시 출발점에 서서

 

 

  아마 내가 젊은 날의 초상을 읽었을 때는 스무 살이거나 스물 한 살적인 거 같다. 중요한 것은 그때쯤 한창 치기어린 젊음의 열정으로 자신을 소비하던 나는 이 책의 주인공처럼 미친 듯이 책을 읽었고, 미친 듯이 방황을 갈구했으며, 미친 듯이 사랑을 탐했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전공이 신학이니 만큼, 밑도 끝도 없이, 아니 위도 한도도 없이, 사변적 진실을 추구했기에 당시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꽤나 감동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의 책을 폭식하기 시작했는데, 그 폭식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소화불량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 때문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도 기억은 나는데, 무언가 흐릿한 인상만 계속 지속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이렇게 생각한다. 첫째는, 내가 꽤나 이 책을 읽을 때 조소와 냉소의 시선으로 보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왜냐하면 당시 내 또래에 비해 이 경험 저 경험이 많고, 다소간의 허황된 지식을 자랑하던 나로선, 자신을 비슷하게 투영하여 보여주는 이 글이 꼴 같지 않게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해 겨울의 장면에서 겨울 바다로 가는 여정과 화자가 느낀 감정은 내가 대학을 입학하기 전 혼자서 겨울에 동해 바다로 갔던 기억과 매우 닮아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기억은 이문열의 글처럼 그렇게 과장된 미사어구로 치장되어 있진 않았다. 물론, 당시 소설보다는 시에 대한 열정이 과해, 그 과정을 시로 짧게 압축한 나와 이문열의 차이긴 하겠지만, 뭐랄까, 이 전체적인 어투와 문체에 대한 거부반응이라고 말하면 좋을까? 소설 내내 거하고 과하게 나열해놓는 이문열식 문체에 나는 꽤 거북스러움을 느꼈으리라 두 번째 이유를 추측해 본다. 그리고 셋째는 스스로 그렇게 과신한 경험과 지식의 짧음에 대한 이유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가장 이 소설에서 흐릿했던 기억이 하구인데, 당시 나는 거의 아파본 기억이 없으므로 그러한 감정과 기질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실제로, 이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당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너는 몸이 튼튼해서 이해하지를 못해?’라는 말이었다. 그때 생각하면 사실 별스럽지 않은 말이었지만, 이제 완연히 병이 들고, 평생 이와 같은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이제야 그 말에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적 우울함이란 정신적 예민함이 주는 고통과 절망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까닭이다. 그리고 친구들과의 치열한 논쟁과 문학회에 대한 일들은 사실 당시 내가 겪었던 일들은 아니었다. 그 일들은 차후에 겪었던 일들로, 어찌됐든 스물 살 적 나이에 서른을 훌쩍 넘긴 사람이 그 때를 기억하여 쓴 글에 대해 온전히 체감한다는 것, 어쩌면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하지만 이제는 내 나이가 소설을 쓴 이의 그 당시 나이를 넘었고, 경험 또한 더해져 많은 공감과 함께,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지나 간다. 왜 이문열일까? 왜 한국문학을 시작함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문열이어야 했고, 나 또한 왜 그러했을까? 그리고 왜 지금 다시 무언가 새로운 출발을 함에 있어서 나는 다시 이문열을 보게 되는 것일까?

 

  사실, 위의 질문에는 약간의 어불성설이 있다. 왜냐하면 애초에 나는 이 글을 별로 읽고 싶지 않았고, 때문에 모임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분명 병과의 일별을 꿈꾸며 이제 새로 시작해야 하는 지점에 서있는 것은 맞지만, 이 지점에서 사실 나는 이문열을 애초에 떠올리진 않았다. 그런데 우연과 우연이 더해져 이문열이 나의 시작이 되었다. 그것도 가장 그의 치기어린 소설인 젊은 날의 초상.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란 참 이상한 존재 같다. 아니면 나라는 인간이 그런지도 모르겠다. 늘 무언가 구실을 찾고, 이유를 찾아, 정당화시키려는 기질이 있다고 말해야 할까? 어떻게든 말도 안 되는 두 가지를 끌어들여서 접점을 찾으려고도 하고, 때문에 우연을 필연이라 우기기도 한다. 그 까닭에 지금부터 어떻게든 필연으로 가고자 발버둥을 쳐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왜 이문열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한국 문학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논외로 치더라도, 내 개인이 왜 이문열로 한국 문학을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지금 잠깐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는, 그 사변적인 문체의 동질성에서 찾아야 할 거 같다. 아니, 그보다 더 솔직하게 근본을 파고들면, 주제에 대한 동질의식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거 같다. 일단, 한국 문학에서 내가 아는 한 이문열보다 더 치열하게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관념적 주제에 대해 문제제기 해온 작가는 없다. ‘사람의 아들을 필두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황제를 위하여’, ‘금시조’, 그리고 최근에 호모 엑세쿠탄스에 이르기까지, 그의 정치적 사상이 어찌됐든 혹은 관념이 옳든 그르든,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혹은 가장 타당한 보편성에 대해 그는 소설을 통해 줄곧 고민해왔다. 그 때문인지 늘 외국 소설의 거대담론에 익숙해있던 내게 이문열은 처음부터 친숙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 이유로 자기 거울에 대한 일종의 혐오의식 또한 존재해왔다. 게다가 처음에 언급한 그 사변적인 어투와 문체, 비록 나이가 들면서 정제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과장법은 정말 보다보면 어지러울 지경이다. 특히, 지금 읽은 이 젊은 날의 초상엔 얼마나 망()이 많은지, 소망이나 희망이면 그만인 것을, 섬망, 미망, 열망, 갈망 등등, 끝도 없는 망()들 때문에 나 또한 새벽에 불현듯 깨 나의 망()과 또 다른 망()에 대해 생각해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칭찬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한자어의 난립으로 소설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질책이기도 하다. 어찌됐든 그럼에도 이문열은 이 두 가지 칭찬과 질시에 가까운 질책을 양립하여 넘어선 작가인 것은 분명한 거 같다. 비록 그가 한국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제시했다고 말하긴 힘들겠지만, 나와 같이 사변적인 인간에겐, 그리고 서구 학문의 찌끄러기에 길들여진 인간에겐, 어차피 거대담론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그런 소설이 아니라면 무언가 허전함을 느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내게 있어 결국 한국 소설의 출발점은 역시 이문열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왜 젊은 날의 초상이어야 하는가이다. 사실, 여기는 많은 어패가 있어서 어떤 장황설을 늘어놓든 변명에 불과할 것이란 진실을 먼저 전제하고 싶다. 왜냐하면 내 출발점은 애초에 사람의 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우연히 찾아온 젊은 날의 초상에 대해 나는 또 다른 시작점이란 지점으로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내가 아직 내 이야기에 대해 정말 정직하게 풀어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물론, 지금까지 나는 열 개가 넘는 소설을 썼고, 거의 다 내 이야기를 했다. 정말로 순전히 내 이야기를. 그렇지만 정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내 자신을 바라보고 썼느냐하고 누군가 되묻는다면, 글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니라고 밖에 말할 방도가 없지 않을까? 사실, ‘젊은 날의 초상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의 다른 글보다 훨씬 덜 정제되어 있고, 때문에 과장과 치장으로 한껏 들떠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그의 젊은 날에 대한 아린 향수이며, 그 아린 향수는 당시의 퇴폐적 낭만주의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그의 미망에 들뜨거나, 섬망으로 휘몰아친 낭만주의라고 해두는 게 더 좋을 듯싶다. 그럼에도 그가 꼭 쓸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부끄러운 자화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기반이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을 이루는 그 출발점이었던 이유에 있지 않을까? 그 이유로 나의 출발점 또한 젊은 날의 초상과 유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출발해보려고 한다. 나 또한 모든 망()이 술이 되어, 낭만이 되고, 낭만이 자학이 되어, 밑도 끝도 없는 방황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부터,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니까, 그것이 내 진실이니까. 비록 그것이 나 자신만을 위한 하나의 아린 향수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거기서부터가 내 출발점이니까, 내 부인할 수 없는 거울이니까. 또 다시 시작해보련다. 문학에 대한 긴 여정을, 그와 함께 시작될 내 자신에 대한 과도한 연민과 끝 모를 허상에 대한 갈망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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