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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한시 산책 2
김용택 엮음 / 화니북스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아침 출근길, 숨이 막힙니다. 사람들에 휩쓸려 지하철에서 내리면, 그때부터는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과 전쟁합니다. 서울에 살면서 매연으로부터 단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지만, 아침 선선한 바람에 묻어오는 자동차 배기가스는 그 도度가 지나쳐 폐장肺臟이 깜짝깜짝 놀라는 것을 느낍니다.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숨을 쉬다 멎기를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그럴 때는 정말 서울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회사가 공기 좋고 한적한 외곽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청복淸福은 지금보다 나을 것이 없어
열 칸짜리 집을 개울가에 지었네
담장 동쪽에는 대나무를 심어 가꾸고
울타리 밑에는 국화를 심었네
높은 선비 사는 곳은 어디나 즐거워라
벗들의 시가 저마다 일가를 이루었네
산 속에 사느라 티끌 같은 저 세상 오래 끊겼으니
아침저녁 이 경치를 누구에게 자랑하랴
장혼의 시입니다. 열 칸짜리 집을 지을 수 있으니, 아마 좀 사는 집안 선비인가 봅니다. 청복은 정신적인 복, 그러니까 고뇌가 없는 것을 뜻하고, 탁복은 물질적인 재물복을 말합니다. 복에도 급을 나눈 옛 사람의 지혜가 묻어나는 말입니다. 저 선비, 탁복 없다는 말 안 하는 걸 보면 재물은 좀 있나 봅니다. 거기다가 한적한 개울가에 집을 지었네요. 담장과 울타리에 국죽菊竹을 심어놓고 바라보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강가에 집이 있고 마당에 꽃과 나무가 있어 봄,여름,가을,겨울 자연과 벗삼아 지낼 수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저렇게 살고 싶습니다.
새벽에야 뜨는 저 조각달
선명한 빛이 얼마나 갈까
작은 둑은 간신히 기어오르나
긴 강은 건널 힘이 없겠지
집집마다 단잠에 빠졌는데
외로이 나 혼자 깨어 노래 부르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쓴 시입니다. 원하지 않는 고립의 상태에서 새벽에 깨어나 달을 바라보는 정약용의 아린 마음이 전해집니다. 자연 속에 사는 모습만 보자면, 개울가에 열 칸짜리 집을 짓고 사는 저기 위 저 선비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그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네요.
뜰 밑에는 천 그루의 대나무
선반 위에는 백 권의 책
아득한 봄날의 꿈을 꾸며
나름의 일생을 살고 있구나
초엄 스님이 탁발을 나가다가 이 처사處士의 집 앞을 지나갔나 봅니다. 스님이 보기에도 참 부러웠나 봅니다. 어찌 아니 그렇겠습니까. 저렇게만 살 수 있다면야 굳이 도道를 깨쳐서 무엇 하겠습니까. 저 처사 사는 곳이 이미 도원桃園인 것을.
내가 태어난 산 깊고 물 맑은 그 곳,
20년 가까이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그 곳,
이 아침 문득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어쩌다 보니
고향은 없고 향수만 남았습니다.
《김용택의 한시산책 2》의 주제는 청빈淸貧과 인생人生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읽을 만합니다.
김상유 화백의 그림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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