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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오르한 파묵의《내 이름은 빨강》. 강렬한 제목으로 다가온 책이다. 내게는 생소한 터키 작가의 작품이며, 오스만 제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 오리엔탈리즘적인 선입견을 품고 이 책을 읽게 되었지만, 뜻밖에도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작품의 주제 의식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신의 시간을 그리려고 하는 이슬람 전통 세밀화가들과, 서양에서 들여온 사실적인 화풍에 매력을 느낀, 당대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적인 화가들. 자신만의 스타일과 화풍이 드러나도록 작품을 창조하느냐, 완벽한 신의 시간에 파묻혀 자신의 스타일을 죽이느냐 하는 문제로 고뇌하고 갈등하고, 그로 인해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여인 세큐레를 둘러싼 카라와 하산 등의 러브 스토리가 얽혀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다만, 1권은 매우 재미있었지만 살인자가 윤곽을 드러내는 2권 후반부는 독자의 조급함에 이야기의 전개속도가 맞춰지지 못해서 주제를 파악하며 읽기 조금 힘겨웠다.)
전통적인 오스만의 세밀화가들은 신의 시간을 그리고 화가의 스타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며, 지상의 사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너머의 이데아적 사물을 묘사하는 것(현상 너머의 물자체를 그린다고 표현하면 잘못된 표현이려나;;) 것을 최상으로 여겼다. 그러한 전통에 익숙했던 에니시테가 베네치아에서 사실적인 초상화와 원근법을 접한 후의 강렬한 감동을 카라에게 이야기하는 장에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들에서 나타나는 매혹적이고 반역적인 무신론을 접하는 듯한 쾌감과 짜릿함을 느꼈다. 단지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그로 인해 고뇌했던 사람들을 이야기는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떠올리게 했다.
나로서는 매우 낯선 이슬람 세계의 풍속, 종교적인 마인드, 우리가 접할 수 없었던 이슬람의 신화들과, 이슬람 세밀화의 다채로운 묘사 등 이국적인 분위기에 취해서 읽는 묘미도 강했다. 또한, 이 소설의 백미는 50여개의 각 장마다 화자가 바뀌어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등장인물들 뿐만 아니라 금화, 나무, 심지어는 색채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펼쳐내는데,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내 이름은 빨강〉장의 강렬함은 너무나도 인상깊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읽는 동안 전율이 흘렀던 구절.
[뜻밖에도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나에게 정직함과 선의를 기대한 아가씨처럼 떨면서 물었다.
"내게 스타일이 있나?"
순간 나는 눈물을 쏟을 뻔했다. p.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