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라시보 > 동네친구

어제밤. 프링글스를 먹으며 책을 보고 있는데 아는 후배 소양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양은 최근 혼자 독립을 해서 살기 시작했는데 외로움에 몸을 떨며 날이면 날마다 전화질을 하더니만 요 며칠 잠잠하다 싶었더니 또 전화질을 해댄것. 소양은 외로움에 뼈가 녹는듯 하여 며칠전 홀연히 게임을 하며 챗질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우연히 나이도 비슷하고 사는 동네도 같은 사람과 채팅을 하게 되었다. 안그래도 외로웠던 참에 너 잘걸렸다 싶어서 소양은 자신의 지긋한 나이를 잊은채 '우리 같은 동네인데 얼굴이나 볼까요?' 따위의 글을 날렸다. 그런데 이게 왠일. 일이 되려고 그랬던지 상대방도 '그럴까요?' 로 응수. 결국 그들은 서로 동네친구가 되기로 합의를 하고 그 동네에 산다면 누구나 아는 편의점 앞에서 만나자고 했단다.나는 그냥 친구랑 동네친구가 뭐가 다르냐고 했더니 소양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동네친구는 세수를 하지 않고 머리를 감지 않아도 만날 수 있으며, 무릎나온 추리닝에 쓰레빠 차림으로도 만날 수 있으며, 만나자고 마음을 먹으면 최대한 10분 이내에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동네친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나 한동네 사는 지인이 필요하다면 반상회나 나가보라고 했지만 그녀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녀는 부담없는 동네친구를 만들었다는 기쁨에 젖어 동네 편의점으로 갔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그녀의 차림새를 살펴보자. 일단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있었으며 무릎나온 추리닝에 입으면 럭비선수 같아지는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두둥. 소양의 동네친구는 쫙 빼입고 나왔던 것이다. 추우니까 어디가서 오뎅이라도 먹지 라고 말 하려는 순간. 그녀의 동네친구는 이 근처 스타벅스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소양은 쪽팔림을 무릎쓰고 동네친구와 함께 구질구질한 몰골로 별다방을 들어섰다.

소양의 동네친구는 키가크고 매우 잘 생긴 남자였다. 소양은 그저 키도 고만고만하고 생긴것도 부담없어서 그야말로 가끔 동네어귀에서 몰골 신경쓰지 않고 만나서 떡볶이나 한접시 할 수 있는 사람을 원했으나 그는 전혀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일단 직업이 모델이었으며 (동네친구의 직업치곤 참 안어울리지 않는가? 동네친구란 자고로 전파상집 아들이라던가 수퍼집 둘째아들 정도가 딱 좋다.) 날씨가 추운것에 비해 옷을 허술하게 입었길래 춥지않냐고 물었더니 자긴 간지가 살지 않기 때문에 옷을 두텁게 입지 않는다고 했다. 거기다 큰 가방을 둘러매고 나왔길래 동네에 나오면서 뭘 가방씩이나 가지고 나오냐고 했더니. 그 모델 동네친구는 주머니에 이것저것 넣으면 간지가 살지 않기 때문에 자긴 꼭 가방에다 소지품들을 넣어 다닌다고 했으며, 오늘은 의상의 특성상 큰 가방을 메어줘야 어울리기 때문에 별로 넣을건 없었지만 조금 큰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고 했다. 이쯤되니 소양은 슬슬 동네친구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웬걸. 이 잘생긴 모델 동네친구는 소양을 너무나 마음에 들어했다. 자기도 혼자 산지 얼마 안되었고 심심했던 찰나에 동네친구가 있었으면 했었다며 소양과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며 해맑게 웃었다. 그 이후 소양의 부담은 시작되었다.

동네친구는 동네친구 답게 저녁에 자주 연락이 왔다. 소양은 핑계를 대고 나가지 말까 싶다가도 자기를 너무나 서스름없이 대하는 동네친구이기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동네친구가 직업이 모델일수도 있지 뭐, 그래 동네친구가 간지에 목숨을 걸수도 있지 뭐 하면서 말이다. 허나 만나면 만날수록 동네 친구는 부담스러웠다. 대체 옷이 몇벌인지 몰라도 만날때마다 다른 옷차림이었으며 (집구석 웨어이긴 했지만 그건 잡지에서나 나오는 느낌의 옷들이었다.) 목도리도 매번 바뀌었고 (거기다 목도리를 메는 방법도 매번 바뀌어서 소양은 세상에 그렇게 다양한 목도리 메는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미처 몰랐었다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고 모델스런 포즈와 모델스런 웃음을 날린다고 했다. 성격도 좋고, 착하며, 동네도 같고. 등등 동네친구로써의 자격을 다 같추었긴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 동네친구는 좀 거시기했다. 그렇게 동네친구를 만나다가 어제 문득 소양은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동네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회사갈때보다 더 열심히 메이컵을 하고, 입고나갈 옷을 고르기 위해 몇번이나 거울 앞에서 옷을 입었다 벗었다 했으며, 심지어는 동네친구 만나기 두 시간 전에 때목욕까지 갔다가 왔다고 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꾸질꾸질한 차림으로 만나서도 같이 과자를 씹으며 동네어귀를 어슬렁 거릴 수 있고, 집에서 뒹굴다가도 만나서 붕어빵을 함께 사 먹을 수 있는 편한 동네친구를 원했건만. 이건 한동네에 산다는 것을 빼고는 아무것도 동네친구스럽지가 않은 것이었다. 모델이 직업인 동네친구는 날마다 화보촬영장에서 트레이닝 웨어 지면광고 촬영을 하다가 막 튀어나온것 같은, 이지하되 패셔너블함을 결코 잃지 않는 차림으로 기어나오고. 떡볶이와 오뎅과 풀빵을 동네친구와 함께 먹고팠던 소양의 소박한 바램과는 달리 오직 별다방만을 사모하며 어쩌다 군것질을 하더라도 조각케잌이나 던킨도넛이 그 모델 친구의 최대한 널널하면서도 편한 간식꺼리였다. (그 앞에서는 오뎅이나 닭꼬지라는 말을 하는것 조차 불경스러울것 같았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그녀는 어제 결심했단다. 동네친구를 그만 만나기로. 비록 조인성을 닮아서 보는 즐거움은 무엇에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자기에게 참 잘해주는 동네친구였지만 도저히 부담스러워서 더이상은 안되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혹시나 동네친구가 만나자고 할까봐 회사를 마치고 집에 도착해서도 결코 일정기준 이상은 흐트러진 차림새를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피로하다고 했다. 좀 아쉽지만 이쯤에서 동네친구에게 이별을 고할것이며 그 잘생긴 모델 동네친구가 자기보다 훨씬 더 근사한 동네친구를 만나서 여전히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램을 말했다.

그동안 다소 부담스럽긴 했으나 잘 만나왔던 동네친구와 이별을 해야하는 소양은 많이 아쉬운듯 했다. 허나 한편으로는 이제야 비로서 마음이 홀가분하다고도 했다. 세상은 참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다. 대략 10년을 혼자 살면서도 동네친구 같은건 생각도 안해본 나는. 동네친구를 만들려고 노력을 하고, 동네친구를 사귀고, 그 동네친구로 인해 부담스러워서 아쉽지만 작별을 고하는 소양이 신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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