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기다린만큼의 보상을 해주었다고 해야 하나? 이 책은 나에게 큰 감정의 파고를 일으켰다. 도대체 왜 그녀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절망으로 종결짓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내내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나는 중반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불륜. 행복한 순간의 끝을 언제나 절망으로 끝맺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사랑해"
  애인은 나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구선,
   "나도 사랑해"라고 말한다.
  나는 매일 조금씩 망가져 가고 있다.

누가 끝을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고 했는가. 끝을 알고 있어 절망하고, 끝을 알고 있어도 떠날 수 없는 자의 모습이 여기 있지만, 죽음에 다다르는 절망속에서 소리없이 절규하는 그녀의 모습은 결코 추하지 않다.
절망과 죽음과 사랑이란 음표로 그려진 오선지를 연주하는 '웨하스 의자'를 듣고 있노라면 끝이 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며칠 간을 절망에 허덕이게 했지만 나는 이 책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은 곧 절망이요, 죽음인 것이다.


어렸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은 웨하스였다.
바삭하고 두툼한 것이 아니라, 하얗고 얇고, 손바닥에 얹어만 놓아도 눅눅해질 듯 허망한 것이다. 잘못 입에 넣으면 입천장에 들러붙어 버리는.
사이에 크림이 살짝 묻어 있지만, 그것은 크림이라기보다 설탕을 녹여 만든 풀처럼 엷다. 얇고, 애매한 맛이 난다.
나는 그 하얀 웨하스의 반듯한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약하고 무르지만 반듯한 네모. 그 길쭉한 네모로 나는 의자를 만들었다. 조그맣고 예쁜, 그러나 아무도 앉을 수 없는 의자를.
웨하스 의자는 내게 행복을 상징했다. 눈앞에 있지만, 그리고 의자는 의자인데, 절대 앉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초반부의 조금은 지루한듯했던 인물소개랄까, 발단부를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파이가 구명보트에 내려지고 난 후부터 일사천리로 줄줄 읽혔다. 부대상황을 그려내기가 상당히 곤란했지만-ㅅ-( 삽화라도 하나 넣어줄것이지!)  여튼 그렇게 상황을 그려보려 애쓰는 동안 자연스레 책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보는 동안 로빈슨 크루소, 캐스트 어웨이가 계속 떠올랐다. 채식주의자였던 파이가 물고기, 바다거북 가리지 않고 먹게 되는 설정 또한 불보듯 뻔한 것. 그런 것들 보다는 보트에 호랑이와 단 둘이 남겨졌지만, 호랑이를 죽여보려 (무모하지만-ㅅ-) 시도하지 않고 길들인다는 설정이 무척이나 인상깊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호랑이-리처드 파커-에게서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고 있는 파이를 발견하는 일은, 나약한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단 진리를 다시 한번 실감케 해주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 그리고 날치의 습격(?)-그나마 현실성 있는-이나 미어캣들이 사는 섬- 이 섬의 진실은 정말 쌩뚱쌩뚱:) - 따위의 조금은 공상적인 소재가 조금은 쌩뚱맞을진 모르겠지만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전개에 활력소가 되는듯하다.

어쩌면 단순히 '표류기'에 그칠 뻔한 이 소설이 나에게 조금은 인상깊고 무언가 담고 있는 소설로 남은 가장 큰 이유는 결말부의 파이와의 인터뷰에서 '공상'으로 치부되는 파이의 죽음같은 '현실'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의심도 없이 픽션에 몰입하는 순간 그것은 논픽션이 되었는데, 내가 논픽션이라 믿고 있는 이 픽션을, 이 픽션 속의 인간은 철저하게 픽션이라고 주장하는 그 부분. 마지막 부분에 와서 나 역시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얼룩말과 하이에나와 호랑이와 파이의 이야기가 모두 파이의 상상인가, 사실은 잔혹한 살인극이었던가'하는 생각을 하고 말았던 그부분.
순간적으로 우리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수조차도 잃은, 지독히도 이 속세에 찌들어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그 부분때문에
나에게 이 소설은 단순한 킬링타임용에서 주제를 품고 있는 소설로 남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