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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초반부의 조금은 지루한듯했던 인물소개랄까, 발단부를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파이가 구명보트에 내려지고 난 후부터 일사천리로 줄줄 읽혔다. 부대상황을 그려내기가 상당히 곤란했지만-ㅅ-( 삽화라도 하나 넣어줄것이지!) 여튼 그렇게 상황을 그려보려 애쓰는 동안 자연스레 책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보는 동안 로빈슨 크루소, 캐스트 어웨이가 계속 떠올랐다. 채식주의자였던 파이가 물고기, 바다거북 가리지 않고 먹게 되는 설정 또한 불보듯 뻔한 것. 그런 것들 보다는 보트에 호랑이와 단 둘이 남겨졌지만, 호랑이를 죽여보려 (무모하지만-ㅅ-) 시도하지 않고 길들인다는 설정이 무척이나 인상깊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호랑이-리처드 파커-에게서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고 있는 파이를 발견하는 일은, 나약한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단 진리를 다시 한번 실감케 해주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 그리고 날치의 습격(?)-그나마 현실성 있는-이나 미어캣들이 사는 섬- 이 섬의 진실은 정말 쌩뚱쌩뚱:) - 따위의 조금은 공상적인 소재가 조금은 쌩뚱맞을진 모르겠지만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전개에 활력소가 되는듯하다.
어쩌면 단순히 '표류기'에 그칠 뻔한 이 소설이 나에게 조금은 인상깊고 무언가 담고 있는 소설로 남은 가장 큰 이유는 결말부의 파이와의 인터뷰에서 '공상'으로 치부되는 파이의 죽음같은 '현실'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의심도 없이 픽션에 몰입하는 순간 그것은 논픽션이 되었는데, 내가 논픽션이라 믿고 있는 이 픽션을, 이 픽션 속의 인간은 철저하게 픽션이라고 주장하는 그 부분. 마지막 부분에 와서 나 역시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얼룩말과 하이에나와 호랑이와 파이의 이야기가 모두 파이의 상상인가, 사실은 잔혹한 살인극이었던가'하는 생각을 하고 말았던 그부분.
순간적으로 우리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수조차도 잃은, 지독히도 이 속세에 찌들어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그 부분때문에
나에게 이 소설은 단순한 킬링타임용에서 주제를 품고 있는 소설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