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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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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침에 퍼놓은 식은밥을, 두부와 호박을 썰어넣고 끓인 먹다남은 된장찌개를, 며칠전 무쳐 비빔밥 해먹고 냉장고에 뒹굴던 가지나물과 배추나물을 빨강색 음식쓰레기통으로 마구 쳐넣었다. 어떤 건 쉰내가 나고, 어떤 건 질렸다. 새로 끓인 김치찌개와 저녁을 먹지만 내일이면 김치찌개의 일부도 개수대를 거쳐 음식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죄많은 나에게 이 책이 가당키나 한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으며 나는 살아온 한순간 한순간이 죄지은 느낌이었다. 커피 두 잔과 매실차 한 잔, 심심풀이로 빵과 비스킷 등등 쉬지 않고 입에 넣는 나는 얼굴은 모르지만 그들 앞에 분명 죄인이었다.   

내가 TV앞에서 눈 깜빡이며 또 무언가 입에 쳐넣고 오물오물 거리는 동안 아프리카와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대륙 각지 각국에서 5초에 한 명 꼴로 굶어 죽는 아동들이 있단다. 만성적 영양실조로 시력을 잃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란다. 이 책은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저자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눈물어린 진실이다. 도대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걸까?  

지금보다 어릴 때, 아프리카는 날이 더우니 일을 할 수 없어서, 일을 하고 싶어도 척박한 땅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애초에 발전가능성이 없어서, 거기다 발전하고자 하는 토착민들의 의지가 없어서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국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대륙인 줄로만 알았다. 아프리카라는 곳은 저주받은 땅이라서 그 곳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죗값처럼 그 죄를 다 받으며 살아가는 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내게 사하라는 도달 불능의 멋진 곳이고 가끔 로망이기도 했다. 무식하고 어리석었다.  

이 책은 각지 각국의 기아실태를 보고하는 동시에, 지구촌이라는 명목아래 펼쳐지는 구호활동의 실상과 구호활동이 갖는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아문제가 전혀 나아지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고발한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대답하는 형태의 질의응답식으로 되어있어 이해가 쉽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구의 2배를 먹여살릴 수 있다는 오늘날의 식량생산량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구가 기아로 목숨을 잃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거기에는 수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지만 사실상 해결 불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니,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라 해결할 수 있는 자들에게 해결할 마음이 없을 뿐이다. 잘먹고 잘입고 멀쩡하게 사는 사람이 굳이 골치아픈 문제에 뛰어들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전 세계 기아들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제 몸 불리기에 더 급급하다. 먹을 것이 많은 나라가 못 먹는 나라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면 형평이야 맞춰지겠지만 한 국가내에서도 달성하기 힘든 제도를 지구촌에 적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이론적 해결에 그칠 뿐이다. 예를 들어 가격조절을 위해 수요, 공급의 형평을 맞춘답시고 곡식의 양을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도록 법으로 정한다든지, 멀쩡한 소와 돼지를 마구잡이로 도살처분하는 등 일련의 체제로 과잉 식량공급을 차단하려는 방법에서 기아문제를 해결할 마음이 없는 선진국의 본모습을 볼 수 있다.  

만약 거론되는 모든 문제를 넘어서 민간구호단체들의 식량공급과 구조활동이 투입된다해도 그저 그걸로 다가 아니다. 이렇게 공급된 식량들은 정치적 도구로 위장되어 정부에 넘어가거나 무장단체들의 피습에 이용되기 일쑤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구호활동이 피해가 될 수도 있는 현실이다. 이런 경우 정부와 테러단체의 공조로 인해 내전이나 전쟁 등으로 고스란히 피해를 입는 것도 이미 죽어가는 국민들이다. 하다못해 미국 같은 선진국은 식량원조를 핑계삼아 중동이나 아프리카 국가의 땅 속 깊숙히 묻힌 자원을 탐낸다. 때로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아 자국의 힘을 키울 생각에 앞서 있기도 하다. 이처럼 눈앞에 굶어죽어가는 목숨을 두고도 치장할 보석이 필요한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좇을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바로 지금 지구촌에서 가장 힘있고 부유한 국가들이 자유롭고 민주적이라 믿는 자본주의다.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는 인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로드킬 당한 친구를 지키려고 위험한 도로를 배회하는 개보다 못한 생명체도 인간이다. 처음엔 한 달에 3만원이면 굶어죽는 아이 하나 살릴 수 있다는데 뿌듯한 마음으로 기부나 한 번 해볼까 했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지만 과자 몇 봉지 덜 먹고 차비 몇 번만 아껴 걸으면 충분히 낼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꼭 부자가 아니라도 도울 수 있겠고 여러 명이 도우면 TV에 나오는 삐쩍 마른 아이들 덜 굶어죽는 날이 오겠지 싶었다. 이 책은 그 단순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준다. 있으면서도 돕지 않고, 돕고 싶으면서도 도울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나 한정된 자원 아래 인간의 자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기아로 인한 의도된 죽음이 오히려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 될 것도 같은 논리까지 감히 상상할 수 없던 부분까지 조목조목 알려주는 셈이다.  

나는 충격이 컸고 그만큼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낫다. 기아문제가 빠른 시일 내 해결 될 수도 없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국가가 더 많다. 그들이 없어야 그 땅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은 희망을 붙잡고 노력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움직이기 시작하면 달라진다고 했다.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이유는 상당부분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다. 기아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많은 구조적, 절차적 걸림돌이 있겠지만 인간애에 호소하는 기본적 양심이 가장 정점이 될 것이다. 1초, 2초, 3초, 4초, 5초. 5초는 내가 살아있는 걸 느끼는 데도 부족할 만큼 짧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조막만한 손으로 빵 부스러기와 물 한 모금, 쌀 한 톨과 옥수수죽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이들이 죽어가는 시간이자 내 양심이 우는 시간이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지만 소리없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살 수 있는데도 죽어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눈동자들이 나의 게으름과 나태를 다그치고 또 다그친다. 눈물이 난다. 우리는 과연 인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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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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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힌 반전에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그저 가만히, 한참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제목을 선뜻 소설의 내용과 연관시킬 수 없다. 그저, 음악 먼저 들어보고 읽을껄, 생각했을 뿐이다. 누가 말렸던 것도 아닌데 괜한 심통이다. 거기다 [카스테라]의 박민규만 알던 나는 한방 먹은 기분이다. 박민규가 이런 소설을 썼다니. 물론 인터넷 서점에서 온라인 연재될 때부터 읽기는 했다. 그다지 성실한 독자는 아니어서 그 때는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란 걸 몰랐을 뿐이다.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뒤에 첨부된 씨디와 엽서도 끝내 뜯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그와 그녀 그리고 요한의 이야기다. 그리고 작가 요한의 작품 속 이야기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자 아팠던 청춘의 고백이다.  

연재소설의 완성도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괜시리 "미리 써놓고 분량 나눠 올린 거 아냐?" 생각한다. 아예 시비조다. 오랜만에 정통 한국소설을 읽은 나는 새삼 친정에 온 새색시가 된 느낌이다. 장르나 소재는 타 국가에 비해 한정적이지만 국내작가는 우리나라 사람의 감수성에 딱 맞는 언어를 사용한 감동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재주를 가진 것 같다. 오랫동안 머리맡에 두고 표지와 제목만 읽곤 했는데 이제와 그 시간들이 왜 후회가 되는지 모를 일이다. 그와 그녀와 요한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모를 것이다. 지금 흐르는 청춘의 아까움을 모를 뻔 했다. 계획하는대로만 살아지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을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다.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오늘날의 청춘을 궁지로 내모는 감정들인지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와 그녀와 요한이 청춘이던 시절, 휴대폰과 이메일은 왜 없는 거냐며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예상 못한 결말에 비로소 나를 내던질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뜨겁게 타오르는 가슴과, 어딘가로 분출되어야 마땅할 열정과, 부족함이 주는 용기의 아름다움이 목숨보다 소중해진 까닭이다. 또 그와 그녀와 요한의 청춘과 삶을 믿는다. 박민규 작가는 이 소설이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다룬 첫 번째 소설이 될 거라고 했다. 그 말이 참 슬펐다. 그와 그녀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너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때, 가엾던 청춘을 위해, 단지 상대를 위해, 사랑이란 이름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아련한 추억이 눈물에 번지는 것 마냥 촉촉하고 잔잔하게 적셔지던 단아한 스무 살 연애감정과 단순히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희망에 관한 이야기, 또는 삶의 절망. 청춘이라 해서 절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더이상 그와 그녀의 사랑을 질투하지 않는다. 다만 외로워하는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두 말 없이 건네고 싶은 책 한 권이 생겨 좋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게 뭐냐고 묻는 이에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들이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 읽고 나서 <HOPE>라는 간판이 보이는 <BEAR>라는 호프집에서 켄터키 치킨과 마른 오징어를 안주 삼아 함께 맥주를 마시자고. 외롭다. 삶은 누구나 외롭다. 그러나 외로워하지 말자. 청춘은 고독하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말자. 청춘은 누구나 그런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누구에게나 가슴 아픈 것이다. 상처받은 사랑의 추억은 애틋하되, 살아갈 수 있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살다보면 알게 된다. 모두,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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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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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내용을 설명하는 일은 무의미하고 부적절하다. 그저 끝까지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픈 사랑을 경험한 것 마냥 허망하고 쓰라리다.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야 진짜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지만 [체실 비치에서]의 두 주인공이 더 아름다운 이유는 이언 메큐언이라는 작가가 만들어내는 언어와 언어가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클래식 음악선율 같이 은은하고도 열정적인 문체 때문이다. 섬세하게 다듬어진 감정들에서 구슬같이 찬란한 방울소리가 난다. 플로렌스가 연주하는 모차르트 현악오중주 D장조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순수하고 떨리던 사랑, 마침내 결합하게 된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식, 그리고 첫날 밤. 너무 사랑해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날 밤의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고 서로의 어긋남을 서서히 알게 되는 두 사람의 절규같은 외침은 결국 파경으로 치닫게 된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는 그렇게 헤어진다.  

40년 후 추억하는 사랑. 에드워드는 젊은 날 한 순간의 선택으로 잃었던 사랑이 진정 사랑이었음을 안다. 사소한 오해로 가지 않았던 길, 실망과 두려움으로 선택하지 못했던 길, 그 끝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평생을 그리워한 사랑이지만 이제는 가 닿을 수가 없다. [체실 비치에서]의 사랑은 과거와 현재의 철저한 교합으로 한층 예술성을 갖는다. 잔잔하고 은은하기에 더욱 품격있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기억된다. 결혼 여덟시간만에 신혼여행지에서 이별하고 돌아서는 두 남녀의 슬픈 사랑은 어긋나고 비껴가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최대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의 순간과 아련한 기억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은 아찔한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답고 아름답다.  

누구든 가지 못한 길을 다시 갈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충실한 현재에 발을 들여놓는 길 뿐이다. 후회없이 사랑하고 후회없이 이별하자. 그것만이 민트빛 체실 비치 저 멀리 연보랏빛 드레스를 휘날리며 서 있는 플로렌스와 그녀를 홀로 두고 뒤돌아보지 않고 걷는 내내 그녀를 사랑했을 에드워드를 기록하고 사랑하고 추억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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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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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백의 미학과 시공간의 초월을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해낸 소설을 여지껏 본 적이 없다. 작품을 읽은 기억은 없지만 칼럼만으로 최근 유일하게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작가 김연수의 글에서 이 소설을 처음 만났다. 최인훈의 [광장] 같은 부류인가 싶었던 소설의 첫 장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시작하자 당황했던 것 같다. 18세기, 베트남으로 가는 프랑스 선교단의 바다길. 그 뱃길은 포르투갈, 모로코, 탕헤르, 아프리카 해안, 희망봉, 마다가스카르, 인도, 세일론을 거쳐 열세 달 만에 목적지에 닿는다. 이후 그들의 삶.  

다다를 수 없는 땅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가.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의 사랑만큼이나 예상할 수 없는 결말. 그 허무와 공허가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의 짙은 이미지를 형성한다. 아름답고 슬프고 청명하다. 그들의 여행길과 정착 후 삶에 대한 의미는 내게 있어 미치도록 불안한 열정이었다. 목적을 가지고 떠난 복음의 길이건만 마침 조국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발한다. 그들은 차차 잊혀진다. 여기서 미지의 베트남은 하늘길에 닿는 비단길이고 조국 프랑스는 회귀해야만 하는 죽음의 길이다. 그들은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향하여 모두 벗어던지고 전부 얻는다. 망각은 숭고하다. 고통스러운 혁명도, 사랑과 고독의 마침표도 결국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함이라.  

한층 성숙해진다. 짧고도 아름다운 한 문장 한 문장을 통해 살아나는 나의 자아는 버림을 통해 얻고 얻고 난 다음 사라진다. 때로는 탐미스럽고 때로는 청결하고 때로는 단순한 행과 행이 만들어주는 나만의 여백 한 켠. 여백을 채우고 비워야 하는 것이 인생. 생전 처음, 삶을 받아들었다. 무겁고 휘청거리는 어떤 낯선 경험으로 인해 믿음에 대해 생각한다. 선교, 복음, 사랑, 고독. 과연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것은? 가끔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나는 오래도록 마지막 장을 덮지 못한 채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를 생각했다. 그것만이 현재 허락된 유일한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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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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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상금 1억원, 제1회 세계문학상' 이라는 타이틀에 혹하여 무작정 읽어내려간 [미실]은 충격 자체였다. 역사는 물론이고, 역사 속 인물에도 별 감흥을 갖지 못했는데 고대에 이토록 정열적인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둔한 내 머리를 울렸다. 나는 지금껏 性愛를 이토록 눈부신 언어로 묘사한 소설 또한 보지 못했다. 어느날, 사극 <선덕여왕>에 미실이 등장하는데 고현정이 캐스팅 됐단다. 선덕여왕과 미실은 무슨 관계일까? 역사 연대기에 무지한 나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극 속 고현정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미실]을 다시 읽었다. 그런데 [미실] 속에 선덕여왕은 없다. 속은 느낌이다. 미실의 집안과 태생, 미실이 색공한 수많은 왕과 남정네들, 미실의 권력과 아름다움이 펼치는 장마다 속속들이 녹아있지만 선덕여왕과 미실의 대적은 그저 TV 속 컨셉인가 보았다. 소설은 영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오늘날의 윤리로 이해하려 해봤자 혼란만 가중되는 고대의 性 이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했다. 차차 익숙해진다 싶었는데 책을 덮고 나니 또다시 집요하게 불안하다. 골품제도를 공부할 때만 해도 성골, 진골이란 게 이런 식으로 혈통이 이어지는 지는 꿈에도 몰랐다. 엄마랑 아들, 아빠랑 딸만 관계를 안 맺는 셈이다. 그치만 더 나을 것도 없다. 온통 근친상간이다. 우리가 끈질기게 요구받은 유교적 가치관에 물든 내 편견일 수도 있겠다 싶어 애써 떨쳐내려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럼 그저 받아들이자.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실은 아름답다. 여자가 품을 수 있는 여성상을 전부 보여주기에 가치있다.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미실을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니 그녀의 삶과 죽음을 뭐라 평가내릴 수 없겠지만,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미실의 생애는 천 오백 년의 시공을 뛰어넘는다. 한 인간으로서, 한 여자로서 나고 사라짐에 있어 무엇이 가장 소중한 가치인가에 대한 끊임 없는 고찰이 그것이다. [미실]은 미색으로 시대를 가졌던 한 여인의 일대기다. 역사소설을 표방하고 있지만 휴머니즘적 요소가 한층 빛나는 이유도 작가관에 근거한 것일테다. 그저 조금 더 재밌게 <선덕여왕>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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