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의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례로 한 권씩이 안 되는 편이다. 언제나 이거 펼쳤다 저거 펼치게 되고 묵히다가 다시 돌아갔다가 아님 내쳐읽다가 비로소 작별한다. 어떤 식으로든 블로그에 소감을 남겨야 진짜 작별하는 느낌이었는데 지난 시간 오래 덜어냈고 또 비워서 이제 꼭 그렇지도 않다. 가장 좋은 독서법은 여러 분야 책을 한 권씩 골라 네다섯 권을 두고 내킬 때마다 돌려읽는 것이다. 사람 기억력이 이틀을 가기가 어려워 이틀 이내 반드시 그책을 다시 잡아 한 장이라도 읽어야 한다는 철칙 아래라면 충분히 가치있는 방법이다. (추리)소설 한 권, 역사책 한 권, 사회학책 한 권, 과학책 한 권 이렇게 하고 나머지는 끌리는 책으로 한 권 더. 거의 대부분 좋아하는 분야 책만 읽다가 다른 책은 밀리고 또 밀리고 그러겠지(만). 그래서 써본다. 지난 시간 털어내기, 지난 책과 이별하기-추리소설 편.
<악의 숲>은 앞선 몇 작품으로 악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듣는 프랑스 스릴러 작가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소설이다. 평점이 그리 높진 않은데 난 좀 의외다. 지식형과 사회고발형이 뒤섞인, 사건과 결과, 일상 속 사건이 전부가 아닌 고인류학, 심리학, 유전학, 정신의학 언어들이 담겼다. 어두운 방안에서 혼자 읽으니 그 기운이 배가 되긴 했겠지만 그후로 더 흥미로운, 오싹한, 뒤가 궁금한, 얼른 끝났으면 좋겠고 되도록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스릴러가 없었다. 오롯이 혼자이던 그밤이 그리워진 거겠지, 그래도 그밤에 누군가 지금처럼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옆에 있어줬다면 덜 무서웠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 숲>이 가진 한계는 제법 빨리 범인이 보인다는 점이다. 스릴러에서는 멀쩡하게 제일 오래 등장하는 인물이 범인이기 마련. 스릴러 혼합형 소재로는 특이해보이는 자폐, 유전, 원시라는 키워드가 인도하는 중남미 어두운 역사를 거슬러가는 생생한 묘사는 범인 찾기보다 흥미진진하다. 예전에 읽은 스릴러가 문득 생각난 이유는 <마크드 포 라이프>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은 <악의 숲>과는 장르가 다르고 지식형 소설도 아니며, 요즘 심각한 세계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난민이라는 훌륭한 키워드를 범죄스릴러 소재로는 흔한 마약으로 받는 결정적 실수를 하지만. 그렇게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약한 작품으로 변한 데 대해선 아쉬움이 크지만 어쩐지 서글프고 불쌍한 사람들이 오래 남는다.
어떤 작품이든 두 번 읽으면 처음 읽을 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다시 말하면, 아, 다시 읽으니 그 정도는 아닌데 왜 이토록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지? 에 가까운 경우. 한번 좋았던 부분은 언제나 당연히 좋다. 어쩐지 한번 읽고 서랍 깊은 곳에 넣어버린 책 속 기억은 애증으로 양분되어 떠오른다. 왜.
<마크드 포 라이프>를 끝내고나서 <올빼미는 밤에만 사냥한다>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여행중입니다>와 같은 노르웨이 작가 비외르크의 소설인 걸 알지만, 서늘한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분위기와 숲에서 여섯 살 여자아이의 시체가 발견되는 파격적 설정으로 시작하는 것 치고는 읽었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져버린 그리 기억에 남지 않는 작품이었다. <올빼미...>를 몇 장 넘기면서 미아와 뭉크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내가 <나는...>을 지루해했던 이유는 사건을 시리즈 등장인물들과 너무 엮어놨기 때문이다. 유난히 많은 팀원과 각자 사생활 보여주기에 할애하는 지면이 가정사나 섹스는 넣어두고 계속 사건을 물고늘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비외르크의 시리즈는 좀 약하다. 확 당기거나 밀어내지 않는다. 휘몰아치듯 썼다기보다 이렇게 쓰고 싶어 이렇게 계획해서 쓴다는 조심성이 느껴진다. 사실 스릴러 소설로선 좀 실패일지도. 상징적 제목은 좋은데 살인소재의 광기에 비해 뒤로 갈수록 실망스러워진다. 독자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며 결말로 나아가지 않고 궁금증을 증발시켜버리는 식의 허무함이 다음 작품에서는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우린 이미 북유럽이란 타이틀만으로는 추리소설을 집어들지 않은 지 오래다. 스티그 라르손과 헤닝 만켈, 요 네스뵈를 거치며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낯선 지명과 공기의 차가움, 사회고발적 날카로움, 광기와 불안을 충분히 경험했기에.
여기까지 글감이 바닥났다 여기고 등록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신기해서 여즉 제대로 읽지도 못하겠는 이름을 가진 작가의 작품이 떠올랐다. 북유럽이라는 키워드로 위 작가와 묶을 순 있겠지만 <부스러기들>과 <마지막 의식>에서는 소설적으로 설정된 시공간적 배경이 강해서인지 공간적 배경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부스러기들>의 공간은 배이고, 사건은 발견된 텅빈 배이다. <마지막 의식>의 소재는 북유럽 신화와 중세 기독교 역사로부터 나온다. 소설 전반에 중세 마녀사냥과 흑마술에 대한 지식이 깔린다.
뿌려진 흔적과 단서를 통해 1486년 도미니크회 수도사 요하네스 슈프랭거와 하인리히 크래머가 집필한 마녀사냥 지침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를 추적하는 데 성공하고, 이 책은 실제로 번역되어 있는 책이다. 주인공이 피해자쪽 변호를 맡은 토라라는 여자인 점은 두 작품의 공통점이지만, 두 작품의 사건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이어서,
이 책들은 진지하게 읽기 시작해 끝을 봤지만 리뷰를 쓸 수 없는 혹은 쓰지 않을 책들이 되었다. 이제 그만 결별하자, 안녕. The END.
다음에 읽을 추리소설은 제프리 디버였다가 이언 랜킨이었다가. 시리즈 순서는 뒤죽박죽된 지 오래.
이미 다른 분야도 쫙 줄을 세워뒀다. 이 독서법은 즉흥이 매력일텐데 난 늘 차후에 읽을 열 권의 책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니 언제쯤 이 대기열이 식어들지 궁금할 뿐이다. 독서에는 반드시 끝이 있고, 그러나 시작도 있다. 진짜 안녕.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