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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예전에도 정조와 다산의 관계에 대한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연암과 다산의 라이벌 평전 <두 개의 별 두개의 지도>는 정조와 직접적 관련이 없지만 두 학자의 삶의 일부를 정조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었다. 내 지식이 무한하지 않다보니 이 리뷰가 좀 버겁다. 같은 얘기 반복하는 게 싫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나는 평균보다 더 잘 잊으므로 그때 배운 사실을 지금도 안다는 보장이 없다. 내가 이런 글을 썼었어, 화들짝 놀랄 때도 있다. 독서로 얻은 지식은 얼마든지 퇴보할 수 있다. 다산에 대한 기억 역시 일부는 겹치고 일부는 놓치고 일부는 새롭다. 다산 평전을 읽으며 알고 있는 다산을 확인했을 뿐, 그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된 건 거의 없다. 관리, 학자 모든 지위에서 성공한 조선 후기 최고 실학자라 일컬어지는 다산은 알려지지 않은 업적이 드물다.
아버지 역시 청렴한 분이고 천주교 박해가 대대적 정치탄압으로 번졌다는 사실과 다산의 가문이 풍비박산 났다는 진실을 알지만 다시 읽으니 새롭다. 기본적으로 운명에 순응하는 편이다. 그 반대라면 살아가는 게 너무 괴롭고 어렵고 힘들다.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태어난 시대와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 시대, 국가, 정권, 체제, 제도 등등. 개혁과 혁신을 부르짖는 삶을 산 자도 결국 당대의 흐름 안에서 움직이고 멈출 뿐, 뜻과 의지만으로 처한 상황을 완전히 격파할 수는 없다. 흘러가버린 역사의 소소한 사건에 '만약'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건 달콤한 반면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지만, 이런 상상의 확장조차 닫아버린다면 오늘날 흘러간 책을 읽고 옛 인물을 배우고 지난 역사를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많은 방향에서 생각해볼 만한 가치를 찾을 수 있지만 다만 이 한 가지 물음을 안고 리뷰를 써본다. 다산의 군주가 정조가 아니었다면. 다산의 세상이 고려 혹은 현대였다면. 정조가 다산보다 오래 살면서 군주의 자리에서 그를 돌봤다면. 평전으로서의 평점은 현저히 낮지만 평전이 아니라 다산이라서 고른 책이므로 업적에 주목할 수만 있다면 평전이 아니라도 상관 없다.
한 인간의 운명은 역시 자신의 뜻이나 의지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일인가. 다산 같은 불후의 대철인도 그것만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 시파와 벽파의 싸움에 늘 시달려야 했고, 서교,서설이라는 천주교 문제 때문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파였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한없이 애달파하던 정조의 지우知遇를 입어 승승장구 벼슬길이 트이기도 했지만, 숱한 고초를 겪지 않을 수도 없었다. 천주학으로 인해 서양 과학 사상까지 섭렵하여 사상의 폭이 넓어진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반대로 쓰라린 유배생활을 감내해야만 했다. 고난의 생활이 계속되어 불행하기도 했지만, 벼슬을 차단당하고 긴긴 세월 동안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어 위대한 업적을 이룩해 내기도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비태否泰다. 인생의 행과 불행, 한 인간의 운명, 화와 복, 즐거움과 괴로움은 물고 물리면서 순환하는데, 누가 작위적으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pp.83-84)
다산 연구소에 들어간 학자는 칠십 프로쯤 좋아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굉장히 일할 맛 나겠다. 지루할 틈이 없고, 한 분야만 깊게 팔 일도 드물고, 지루해지면 다른 쪽을 살짝 파도 되고, 정약용 지겨우면 정조나 그의 형제들을 뒤적여도 되고, 정 안되겠으면 역사 기행을 떠나면 된다. 단언하건대, 유배지 다산 초당을 비롯해 남한산성이나 수원 화성에서 하늘과 산을 등지고 한참 놀다오면 두말 없이 다시 일하고 싶어질 듯하다. 남한산성이 바로 얼마 전 한국의 열한 번째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다양한 시간(역사)을 껴안고 있으나 병자호란과 인조 탓에 늘 굴욕의 장소로만 떠오르는 곳인데 너무 멀지만 기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다산이 남긴 저서가 자그마치 500여권이고, 역사, 지리, 문학, 과학, 건축공학, 의학, 약학, 천문학, 음악까지 절대로 양립하지 못할 것 같은 분야를 넘나들며 백과전서적 경지에 이르렀으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후 이런 분 처음 본다. 하나라도 제대로 하지, 이것저것 손 대는 사람 치고 하나도 제대로 하는 거 못 본다는 비난을 들을 만도 한데 그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이유 중에는 많은 분야에서 그의 연구가 해박하고 정밀하며 전문성이 높고 치밀하다는 점도 포함된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함은 인지상정이다. 과거 합격 전부터 다산에 대한 정조의 총애는 지극했고, 다산 또한 능력껏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나타냈다.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다산의 이런 행운의 뒤에는 또 다른 악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산이 그런 정도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천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산은 책이라고는 보지 않은 책이 없었고, 제자백가의 책을 모조리 섭렵하며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 시절 이미 다산의 학문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체계와 방향이 잡혀 정조 같은 학자 군주로서는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다산을 향한 정치적 반대파들의 시기와 적의는 그때부터 싹텄다. (pp.136-137)
『경세유표經世遺表』는 관제, 토지제도, 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를 제시하고,『목민심서牧民心書』는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다.『흠흠신서欽欽新書』는 형법서,『마과회통麻科會通』은 마진(홍역)에 관한 의서이다. 또 분수分數와 소장逍長에 밝아 산수 같은 분야의 학문에 통달할 거라 했던 아버지 정재원의 판단대로 수리학에 뛰어나고 과학적 사고가 탁월해 기중기와 거중기 등의 기계를 제작하고, 수원의 화성과 한강의 배다리 등 공학적 기능이 높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다. 다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슬픔에 젖어 3년 상을 치르고 나서 33세의 나이로 암행어사 벼슬을 내려받는다. 임무 수행 중 경기 관찰사 서용보의 비행을 고발한 것이 발단이 되어 18년 간의 긴 유배생활이 계속 된다는 점에서 시작을 주목할 만하다. 보복 차원이었을까, 다산이 풀려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리자 자리에 있던 서용보가 가로막거나 저지했기 때문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초계문신에 발탁되어 국왕과 머리를 맞대고 국사를 의논하며, '공정과 청렴'으로 나라에 모든 정성을 바치기로 결의를 다진다. 다산은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던 정조 나이 열한 살 되던 해 태어나 1800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정조보다 36년을 더 산다. 두 사람이 함께 한 18년의 역사는 창조의 드라마였다. 온 마음을 다 바쳐 군주를 보좌하는 관리, 관료의 지혜와 능력을 인정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군주의 몰입과 시너지는 엄청났는데 곁에 있는 누구라도 시샘했을 만하다. 배교 혐의로 벼슬을 내려놓고 떠나야 했을 때 임금의 간절한 만류를 뿌리쳐야 할 정도로 끈끈한 연대를 유지한 그들이었다. 시작은 퇴계의 '이발'과 율곡의 '기발'이 학문상 논쟁을 넘어 노론과 남인의 당파 싸움으로 번지자, 남인의 신분으로 당당히 율곡의 견해에 동조하는 다산에게서 자신과 닮은 신념을 본 정조가 묘한 동질감을 느낀 데서부터다. 다산은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관료로서의 길과 자의반 타의반 학자로서의 길을 평행선처럼 걸어간다. 세상을 바로잡고 국가의 화합을 위해 애쓰지만 신유옥사로 핏빛 어린 종교 재판의 희생자가 되어 가문이 초토화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 사건은 겉으로는 서교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지만 실질은 권력 싸움의 패악상을 반영하며 진보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지식인들을 처단하는 구실로 이용된 사건이다.
이에 격분한 다산은 위에서 확인했던 대로 강렬한 상소로 임금을 설득하였다. 목민관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 들어 본 적이 없을 만큼의 큰 죄를 지은 사람을 임금의 측근이었다고 처벌하지 않는다면 '중민수법重民守法', 즉 백성을 중히 여기고 법을 지킨다는 통치 원리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따지면서, 다산이 일생 동안 추구했던 통치술의 대명제인 자신의 경세 철학으로 임금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pp.45-46)
서교와 서학의 분리를 가장하고, 형의 긍정을 부정하는 등 다산으로서는 구렁이 담 넘듯 흐르고 싶은 타협과 굴복의 순간이 분명 있었다. 정조 말엽부터 시파, 즉 남인 계열의 세력이 확연히 기울고, 체제공과 정조라는 옹호자들 때문에 근근이 버티던 신서파들에게 정조의 죽음은 사교도라는 비난을 더욱 강력하게 옭아매는 토대로 작용한다. 천주교는 조선의 유교 근본을 뒤집고 왕조 정치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조상의 제사조차 폐하려 하니 당대 전통으로 인정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 있었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의 끝은 흑산도와 강진이었고, 시대의 흐름에 답하지 못하는 조선 왕조 말기의 보수성은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모든 지위와 위치에서 구구절절 옳은 말과 행동을 하고 촌철살인의 비판 정신과 끊임없는 연구성과, 뛰어난 문학성을 보유한 점도 그렇지만 지독한 외유내강형 인물, 그는 자신을 컨트롤하는 힘이 엄청난 사람인 듯하다. 능력은 물론 이성과 감정까지도. 귀양살이의 아픔도 다산의 삶을 꺾지 못한다. 유배 시절 이룩한 높고 깊은 학문의 경지는 강고한 의지와 희망과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외로움, 쓸쓸함, 서러움에 빠져 고독과 어둠으로 침잠할 때도 많았지만 이는 고스란히 시와 문학을 창작하는 토대가 된다. 가장 낮은 곳에서도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그마저 훌륭한 업적으로 남았다.
다산은 가르치고 읽고 연구하고 쓰면서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애국자가 된다. 다양한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와 시대를 감내한 저릿한 삶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몽땅 믿기도 어렵다. 정조 곁의 다산도 좋지만 학문과 사상을 정립시키며 제자를 가르치고 동시대 학자들과 치열한 토론을 주고 받던 후기의 다산이 더 좋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지만 그에게서 특별히 권력지향적인 야망이 보이지 않는 점이 돋보인다. 인간이 칠십 평생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던 인물이라 몇 가지 흠이 있어도 과감히 이해했을텐데 이 평전에는 정말이지 한 치의 허물이나 의혹도 없다. 천주교를 믿은 게 잘못은 아니고, 가족과 신념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걸 두고 그가 나빴다고 말하기 어렵다. 최근 현 정부 인사도 그랬다. 객관적으로 공적인 자리에 미달된 이력의 인물을 들고 나온 경향도 있지만 상대편에서 하나만 걸려라, 물고 뜯겠다, 하고 덤벼드는 게 능사는 아니고, 정권이 정권인 만큼 통과할 사람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애절과 절실을 넘어 바른 뜻으로 지어올린 하나의 삶을 보았고, 이제 황홀에 지친 나머지 그의 모든 업적과 그로인한 매혹의 체험을 완전히 덮는다. 나도 다산이 그립다. 아니, 이 시대에 다산 같은 사람이 많아지길 바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