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을 맨 나중에 설명하다 지친 깊은 밤중에_

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책으로 가는 길을 내다.
 | 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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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것을 팔아 자기 것을 갖는 사람들, 지긋지긋하다. 문화, 언어, 욕망의 땅따먹기, 상스럽기 그지없다. 그레이스는 알지만 수지는 몰랐던 것으로 이어져나가는 소설. 나는 알지만 당신은 모르는 것 혹은 그 반대, 사이에서 느낀 두려움을 떠올리면 통역사(1.5세대)의 어려움과 애증을 이해하기가 쉬워질까. 진실은 언제나 별로 알고 싶지 않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알아질 것, 결국은 알아진다. 모국어, 정착, 회상, 비밀, 행간. 숨어있는 밀어들이 너무나도 슬프고 황폐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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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연암, 정조에 대한 학계, 문학계의 수많은 관행과 지식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생전 단 한 번의 만남도 없었다는 두 인물의 인연과 사주역학으로 읽는 라이벌 평전이라는 전무후무한 기획이 조선의 인기있는 두 학자를 재탄생시켰다. 서민문화 수준을 한껏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조선후기의 생활상이 비교적 평온했기에 하늘 아래 용납불가한 서로 다른 지도와 두 개의 별이 각각 군주 곁에 존재할 수 있었다. 적절한 인용과 독자적 해석이 전형적이지 않고 치밀한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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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진 건 체화할 능력이 부족해서였나. 시간의 흐름과 공간적 배경이 만나 이야기를 생산해내고 이야기가 모여 화석처럼 쌓일 때 비로소 역사가 된다. 그러고보면 문학과 역사는 그 줄기가 같다. 들려주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고나자, 문학, 그림, 음악, 철학, 역사, 사회과학이 모두 하나처럼 재밌게 느껴진다. 욕망을 탐하고 사랑을 맹신했다는 점에서 유럽 왕실의 수많은 왕과 왕비 역시 오늘을 사는 나(너, 우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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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있었던 혹은 있었을 법한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재구성하여 써내려갔다는 기지에 의의가 있다. 퇴폐와 찬란의 암흑기라 불린 중세에 한 권의 책이 가지는 의미와 중세에서 근대 르네상스로 변모하기까지의 태동과 과정, 책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책무를 포조 브라촐리니의 행적을 뒤쫓으며 엿본다. 루크레티우스의 고서는 물론, 유물론과 쾌락의 정신으로 요약된 에피쿠로스 철학의 계보를 잡아나가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독서다. 책을 보관하던 집이 책무게에 내려앉아 다시 짓는 등의 에피소드는 위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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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도서로 분류되어 있다. 이 세상 곳곳을 짚어보는 인문안내서에 가깝지만 소개하는 텍스트들은 청소년이 읽기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버거워보인다. 한권의 책이 어려운 수학문제 이상의 가치가 있기도 하다는 건 벌써 증명된 사실 아닌가. 존재하는 좋은 책을 들이밀기 위해 청소년이 처한 교육으로부터의 강박과 제도적 장치를 먼저 개선해주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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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살면서 한번 정도는 피카소의 전시회에 가더라도 바보처럼 멀뚱하게 서있지 않으리란 확신이 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피카소에게 맘이 열렸는데, 가장 서구적이면서 더없이 아프리카적인 혼합의 예술을 탄생시킨, 젊어서도 잘생겼고 나이 들어서도 멋지게 늙은 이 예술가를 말라가 아니 바르셀로나 어느 거리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죽은 사람을 다시 보겠다는 고백이 도발적이지 않다면 무엇이 그토록 창의적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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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별을 보며 살고싶다던 동생은 물리학과에 갔고, 날씨분석이 좋다던 동생은 대기과학과에 갔다. 각각 의사와 항공사 입사를 꿈꾼다. 간혹, 곧 다가올 그애들의 미래를 떠올리지만 별이나 은하를 보며 내가 느끼는 말랑하고 달콤한 정서는 거의 없다. 겨우 화장품 회사 입사를 꿈꾸는 화학과 지망생이었을 뿐이다. 비싼 우주천문과학장비도, 우주를 제대로 느끼는 시간도 평생 없을지 모르지만 기꺼이 밤하늘의 파수꾼이 된 자들의 꿈이 오래도록 간직되기를 바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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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손안에서 움직인다고 착각할 뻔한 이야기. 인포그래픽으로 세상 모든 주제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새롭다. 해석의 여지, 뻔하지 않은 방식에서 나는 세상을 다시 배우고 새로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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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 주의 주도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헬레니즘의 꽃으로부터 시작된 여정은 도서관이란 이름으로 시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쉴새없이 들려주다가, 대체 이 이야기는 어디서 왔을까, 만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지 않았다면 인류학은 좀 더 고차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이런저런 의문에 의문을 거듭하기 시작하면 끝난다. 서구예술을 아우르는 통찰력, 사고를 확장시키는 문체적 특성이 상당하다. 여름밤에도 겨울밤에도 도서관만한 기적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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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재즈에 한없이 약하다는 것과 취향이 곧 아집과 독선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