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십자가가 비거의 가슴에 걸려 살갗에 닿았다. 그는 목사의 말을, 삶이란 세상에 못 박힌 육신이라는 것을, 흙의 나날에 갇혀 갈구하는 영혼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미국의 아들>은 시카고의 흑인 빈민가를 배경으로 흑인 소년 비거의 비정한 현실을 심층적으로 담는다. 부유한 백인가정의 운전기사로 취직한 첫 날, 그 집 딸을 살해한 이후의 감정묘사와 도주과정, 재판의 변론을 통해 인종 갈등과 불평등이 최고조에 달하던 1920-1930년대의 사회상 속에 개인상을 녹여낸다. 1940년 출간된 소설 속의 흑인 소년 비거와 현재 미국 땅에 거주하는 흑인 소년의 모습은 과연 다른가. 빈민가에서 푸대접으로 일하며 천대와 멸시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여전히 많고, 많은 경우가 사회에 만연한 인종갈등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렇지 못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흑인 대통령의 시대를 두 번이나 연 세계최강국 미국조차 흑백 간 충돌, 흑인에게 불리한 차별과 억압, 남과 북의 격차, 가난과 결핍 그리고 소외, 이 모든 것을 어쩌지 못한다.
북부도시 빈민가. 바퀴가 득실대는 좁은 방에 엄마와 비거, 두 동생이 산다. 스무살 비거에게 엄마는 백인 가정에 들어가 운전기사가 되기를 종용하고, 딱히 더 할 것이 없는 비거는 면접을 보기 위해 백인의 집으로 간다. 희망 없는 삶과 청춘이란,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는 것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다르지 않은 말이다. 면접 날, 합격통보를 받은 길에 딸 메리의 부탁으로 데려다주면서 메리와 남자친구 잰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메리와 잰은 비거의 공간을 헤집고 들어온다. 두 사람이 귀찮기만 한 비거에게는 흑인의 인권과 평등을 부르짖는 그들이 여느 백인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해 흑인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다가오는 그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비거에게 그날 밤 일은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우연일 뿐이었다. 바로 그 날, 지금껏 당해온 서러움과 울분이 일촉즉발하여 쏟아진다. 취한 메리를 방까지 옮기다 사람 기척에 놀라 술투정하는 그녀의 입을 베개로 막았다. 잠시 후, 그녀는 더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
처음에는 당황과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비거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에 원망과 복수의 칼을 숨겨둔 무서운 불꽃이었다. 곧 메리를 죽인 것을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통쾌한 복수라 여긴다. 살기 위해 죽였다는 비거의 마지막 변론이 당시 백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충격이었을지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살기 위해 살인하는 것. 그런 이상한 논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비거는 숨이 끊어진 메리를 트렁크에 들어가게 잘라 들고 내려와 거실 벽난로 속에 던져버린다. 후에 여자친구 집에서 메리의 납치극으로 돈을 뜯어내려는 편지를 쓴다. 사건은 점점 죄가 죄를 낳는 연쇄현상을 띠기 시작한다. 행위 자체는 실수지만 비거를 짓누르는 백인에 대한 분노가 이미 허용할 수준을 넘었다는 것에서 개인적 분노가 사회적 분노로 전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날 버젓이 메리의 방에 들어가거나, 행여 살점이 남았을까 벽난로 곁을 서성이거나, 자기 몫으로 차려진 아침을 약간 떨면서도 태연히 먹는 것에서 그가 내적으로는 이미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 혹은 타당화 하고있음을 본다. 증인신문에서는 잰을 살인용의자로 몰기까지 한다. 비거의 죄는 처음에는 한낱 개인의 실수였다가, 다소간의 인종적 지능범죄였다가, '소수의 공산주의자에 의해' 흑인집단의 고통으로 낱낱이 까발려지면서 겨우 인종범죄의 희생양으로 탈바꿈한다. 비거는 메리의 방에서 우연히 메리를 죽였다. 그들이 함께 식사하거나 이야기 나누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시대 혹은 사회였다면 비거가 과연 메리의 방에 둘만 있다는 것과 메리가 술에 취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녀의 숨통이 끊어질 정도로 세게 베개를 눌러야 했을까.
재판장님, 저는 이 피의 순환을 씻어내려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을 깊이 파고들어, 증오와 두려움과 죄의식과 복수 밑에 어떤 충동들이 얽혀 있는지 보여드리려는 것입니다. 만일 단지 일이십명의 흑인이 노예가 되었다면 불의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흑인 노예는 전국적으로 수십만에 달했습니다. 만일 이런 상태가 이삽년 계속되었다면 부당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백년이 넘게 계속되었습니다. 삼 세기라는 긴 세월 동안 계속되고 수십만 제곱미터에 걸쳐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가해진 불의란 더이상 불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에 하나의 기정사실이 되어버립니다.
살인은 내면적인 동기로 일어났다. 차별당한 모든 흑인이 백인을 죽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비거는 살인했다. 무너진 자존심, 순환되는 가난, 제대로 받지 못한 교육, 소외된 흑인이라는 지위,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번듯한 일자리, 반복되는 괄시와 무시, 빈번한 핀잔. 이 모든 것이 살인의 동기였다. 이 모든 것이 메리 즉 백인을 죽였다. 비거에게 씌인 살인동기는 '강간', 계획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여자친구마저 죽인 비거에게 아무도 그녀의 목숨값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흑인 여자는 다만 백인 여자의 살인증거로 활용될 뿐이다. 밥을 주지 않는 것과 사람대접을 해주지 않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은 사람이라서 빵만으로는 온전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흑인들의 소망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노력한 만큼 얻는 백인과 같이 공부하고 일하며 그만큼의 대접을 받는 것, 단지 사람으로서의 삶을 누리는 것뿐임에도 그들 앞에 놓인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 외의 잔인함과 사악함이다. 하필이면 메리의 가족처럼 흑인에게 유연한 태도를 취해 온 사람들이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사태의 추이를 설명한다. 흑인을 고통을 이해하고, 흑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며, 흑인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한 메리를 죽이고 잰을 곤궁에 빠뜨림으로서 얻어낸 허한 자유, 비거에게 그것은 살아있다는 자각이자, 자존감의 발로였다. 백인에게 흑인이 그랬듯 흑인 비거에게도 백인이 세상에 단 한 종류 뿐이었던 탓이다.
재판장님, 불의는 한가지 형태의 삶을 송두리째 없애버리지만, 그 자리에는 그 나름의 권리와 욕구와 열망을 지닌 다른 형태의 삶이 자라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 자행되는 것은 불의가 아니라 억압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삶을 질식시키고 짓밟으려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한가운데서 자라나 당혹감을 안겨주고, 돌 밑에서 자라난 잡초처럼 우리가 범죄라 부르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형태의 삶입니다. 이 문제를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비추어 파악하지 않는 한, 그러한 조건에서 살고 있는 한 인간이 우리가 범죄라 부르는 행위를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죄의식과 분노의 감정을 또다른 살인으로 달랠 뿐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묘미는 재판과정에서 흑인에게 우호적인 변호사, 형량을 줄이기 위해 오로지 흑인 입장에서 변호하는 백인 변호사를 향해 내뱉는 비거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에 있다. 죄는 나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제아무리 잘났어도 사회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해진 관습(불문법)과 제도(성문법)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제도는 여러 사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만 한 번 결정되면 쳇바퀴 돌듯 스스로 제자리를 찾는다는 점에서 가혹하기 짝이 없다. 흑인이 삼 세기동안 겪은 뼈를 깎는 고통 속의 불평등과 차별, 소외와 억압을 백인에게도 겪어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현상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입장을 바꿔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역할놀이 정도를 해볼 수는 있다. 리처드 라이트, 알렉스 헤일리, 제임스 웰든 존슨, 앨리스 워커, 토니 모리슨 같은 미국의 흑인작가들이 하는 일 또한 백인과 흑인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일 터, 이제는 서로를 향한 원망이나 복수 보다는 이해와 타협의 정신이 더욱 필요하다.
흑인과 백인의 목숨값과 죗값은 왜 다를 수밖에 없으며 또 달라야 하는지, 가진 것이 없는 자와 가진 것이 많은 자의 목숨값과 죗값은 왜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하는지, 아프리카에서 태어나는 갓난아이의 울음과 한국에서 태어나는 갓난아이의 울음의 가치가 어째서 다르게 여겨지는지, 우리는 알면서도 말할 수 없다. 아니, 말하지 않는다. 비거는 살기 위해 죽고, 죽기 위해 산다. 비거에게 있어 백인 여자를 죽인 대가로 사형당하는 일과 미국에서 흑인 소년으로 살아가는 일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스무살 청년이 사회가 쳐놓은 인종차별의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시련 속에 뒹굴었는지 생각해본다면 누구도 비거에게 종신형을 내릴 수 없다. 사회적 타살 앞에 우리 모두는 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다. 강약의 이분법적 사고 속에 세상의 구조는 더욱 굳건해지고, 핏빛 진실이 더욱 입을 앙다무는 침묵의 사회로 변한다. 바깥이 이토록 시끄러워서일까, 저마다의 마음 속에서 울리는 소리를 누구도 듣지 못하는 이 세상이 어쩌면 지옥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