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여행>은 잘못 고른 책이다. 책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목적에 맞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히려 캐주얼하고 약간은 뻔한, 샌프란시스코 해변과 LA 디즈니랜드, 할리우드, 서부개척 같은 얘기를 할 줄 알았던, 제목만 보고 골랐던 이 책이 서부 그것도 캠핑 여행자에게 적합한 실용서였다니, 충격이 컸다. 간접여행도 말이 간접여행이지, 여행에세이 말고는 실용여행서를 본 적이 없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랬든 저랬든 어차피 미국여행 갈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아주 유용하다. 알게된 게 많다. 신이 내려준 황홀한 자연풍경을 직접 마시고 느끼기 위해 온 세계 여행자들이 한 번쯤 꿈꾼다는 미국 국립공원 여행을 전혀 몰랐었다. 미국 서부 캠핑여행을 한 번 꿈꿔볼 정도로, 이 순간 이보다 자세한 책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책으로 여행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 어느 곳도 책보다 더 흥미롭지는 않을 것이다. 표지에서 느껴지듯, 깎아지른 황토색 폐허의 산이 다소 허망하게 보여도 목적이 분명하고, 그에 맞게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가 닿도록 쓴 세심한 서술이 돋보인다. 미국, 서부, 국립공원, 오토캠핑. 저자가 얼마나 많은 밤들을 캠핑에 최적화 되어있는, 이보다 더 자연다울 수 없다 자랑하는, 미국 서부 국립공원 캠핑장에서 보냈는지 충분히 짐작될 정도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읽다가 충동적으로이긴 해도 동부 보다는 서부, 뉴욕 주 보다는 캘리포니아 주, 도심보다는 자연, 호텔보다는 캠핑, 자동차(자가용) 보다는 버스나 기차가 취향이던 로망이 떠올랐다. 떠나기엔 아는 게 너무 많고, 고생길도 훤하고, 그만큼 또 아는 게 없고, 그래서 두렵고 무섭고 엄두가 나지 않긴 하지만, 왜 하필 미국, 그것도 황량한 서부, 국립공원이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잭 케루악은 초반 동부에서 서부로 건너가기 위해 온갖 날들을 히치하이킹에 쏟는다. 다소 지겨울 정도였지만(그가 이 차를 타든 저 차를 타든 독자인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다) 마침내 그렇게 힘들여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나마저 희열을 느낄 정도였다. 비행기 티켓만 끊어 떠나는 자유관광 혹은 배낭여행은 젊.으.니.까. 가능하다던 어른들의 말은 맞았다. 읽기만 하는 데도 숨이 찰 정도였다. 냉정히 말해 아직 그럴 정도는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책을 펼쳐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영국 BBC 방송이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50곳' 중에서 1위를 차지한 애리조나 주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이다. 시작은 미국의 국립공원 '퍼주기'의 탄생이다. '멋진 자연을 모두를 위해 남겨놓는다'는 취지에서 기획된 국립공원 지정노력은 자연주의자 존 뮤어, 국립공원 관리공단 초대 이사장 스티븐 매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등의 끈질긴 개척과 노력 끝에 탄생된 고귀한 정신이었다. '사적 소유'가 건국이념인 미국에서 누군가 '개척'하고 '소유'한 땅을 국립기념지로 지정하는 것은 재산권 침해에 해당하기 때문에, 초기(미국 최초 동시에 세계 최초) 국립공원인 주인 없는 옐로스톤(직접 개척)을 제외하고는 죄다 힘들었다. 하지만 뜻에 반하던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었던 건, 국립공원이 가진 생태적 가치와 공원 관리체계에 감동한 이들이 스스로 후손을 위해 이 땅의 일부를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원 입구의 지도, 방문객 센터에서 보여주는 정보, 캠핑장과 캠프파이어 등 체계가 분명한 관리에 안정감을 느끼며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장점 덕에 이젠 국립공원 캠핑이 하나의 휴양을 넘어 소중한 한때의 축복처럼 여겨질 정도라고 한다. 캠핑장과 캠핑카가 마련된 국립공원 안은 철저히 보존된 동시에 철저히 관리되고 있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에 자연이 주는 치유의 힘을 받는다는 숭고함이 더해져 어느 여행보다 환영받는다.

 

큰 제목은 빙하와 화산이 공존하는 로키 산맥, 트레일과 만년설을 만날 수 있는 시에라네바다 산맥, 화려한 색의 암석과 기묘한 지형의 전시장인 그랜드 서클, 리오그란데 강의 정취와 멕시코 인들의 설움이 느껴지는 뉴멕시코와 텍사스 등 지역별 산줄기를 통해 나눴고, 각각 옐로스톤, 그랜드티턴, 글레이셔/ 오세미티, 세쿼이아&킹스캐니언, 레드우드/ 그랜드캐니언, 브라이스캐니언, 자이언, 아치스, 데스밸리, 그랜드서클/ 화이트샌즈, 칼즈배드 동굴, 빅벤드 등 각 지역에 자리한 국립공원 단락으로 이뤄진다. 첫 장마다 지도를, 뒷장은 국립공원만의 특성과 매력, 역사, 구경할 곳 등을 사진과 배열해 보기좋게 살려놓았다. 산, 폭포, 후두(침식 작용으로 인해 생긴 기괴한 모양의 바위기둥을 일컬음), 나무, 절벽이 진짜 자연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사진만으로도 아찔할 지경.

 

네 가지 테마 속 국립공원 15곳이 이 책의 정보, 더불어 효율적 여행동선과 알찬 캠핑정보가 덤이다. 군데군데 사색이 엿보이는 건 선물이다.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는 적막하고 어두운 곳에서의 하룻밤을 상상해본다면 오토캠핑의 매력을 알 듯도 하다. 미국 서부 국립공원에서의 오토캠핑은 자율적이긴 하나, 체계적으로 국가에서 잘 관리하는 안전한 자연체험이다. 별밤 텐트 사이로 머리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만나는 별빛도 적막함을 채워줄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유일한 방법이다. 혼자가 아니지만 혼자만 존재할 수 있는 단연코 가장 아름다운 여행법이며, 먹고 입고 자는 것과 자연이 인간과 공존한다는 사실이 경이로워지는 순간이다. 이곳에 있으면 가장 익숙한 것이 가장 새삼스러운 일이 되고, 일상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예를 들어, 불을 구한다던가 물을 마신다던가 하는 일들)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새로운 체험일 수밖에 없다. 일부러라도 겪고 싶은 아름다운 고생일 수밖에 없다. 자국의 땅에서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황혼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이 나라의 기쁨이라고 하니, 여행이 젊음의 것이라던 수없이 많은 오만한 이들의 언어는 수정되어야 한다. 참, 국립공원 여행(캠핑)은 반드시 차가 있어야만 유용하게 할 수 있단다. 버스나 기차로 주변 지역까지 가더라도 국립공원을 한 바퀴 도는 일은 직접 모는 차가 있어야만 가능하단다. 넓은 국립공원을 걸음으로 정복하기엔 무리가 따른다고. 자동차를 권유하는 여행은 처음이라 신기하다. 대부분의 여행은 길 위에서 이뤄진다고 잭 케루악이 말했기 때문이다. 홀로 자가용으로 달리는 길은 고독의 사유 외에는 배울 게 없다고 여겼으리라. 국립공원 캠핑의 자동차는 어떤 의미에서 길 위에서 청춘을 뽐내며 젊음을 마시라던 잭 케루악의 그것과 같다.

 

 

어릴 때 주로 계곡에서 완전 자유캠핑을 자주 했었다. 아빠가 좋아하셔서. 그리고 우리가 좋아해서. 여름 중 절반은 늘 그럴 정도였으니 어른은 아니었지만 나도 캠핑키드였다. 텐트치고 버너에 밥 해먹으며 물놀이 하고 파라솔에 앉아 라면 끓여먹거나 수박을 쪼개먹고 텐트에 들어앉아 라디오 듣고 일기 쓰고 하루를 마감하는 완벽한 캠핑은 이곳저곳 주말마다 가족들과 나들이가기를 꺼리지 않는 부지런한 아빠가 계셔서 가능했다. 열여덟, 고3이 되기 전 여름방학, 그때가 자유캠핑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커서 그런 추억은 아무에게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게는 대부분이었던 그 추억이 새삼 고마워 눈물을 글썽였다. 캠핑할 때는 장소가 어디냐 보다는 아빠가 언제 튜브와 보트에 바람을 넣어줄 지, 그걸 밤에 누가 몰래 훔쳐가면 어떡할 지, 무얼 해먹을 지, 무얼 들을 지, 무슨 이야기를 나눌 지, 오늘은 밤하늘의 별이 얼만큼 보일 지, 밤에 켜둔 등에 벌레가 얼마나 모일 지, 반딧불이는 또 어딨을 지, 벌에 쏘일까봐 겁먹고, 밤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면 어떡하고, 화장실이 푸세식일 수밖에 없는 야외 특성상, 배탈이 날까봐 두렵고, 어떻게 편한 잠을 잘 지, 젖은 옷과 속옷은 어떻게 갈아입을 지 같은 것들이 더 문제다. 자연은 그저, 해가 뜨고 볕이 뜨겁고, 달과 별이 뜨고, 비가 내리는 것 같은 것들이 중요했지, 다른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롯이 자연에게만 모든 정신이 집중되는 날들. 그것이 캠핑의 삶이었다.

 

요즘은 그때와는 다르다. 우리나라에도 곳곳에 캠핑장이 마련되어 계절 가리지 않고 캠핑이 가능하며, 캠핑장이 마련된 곳은 잘 닦인 평지라 늘 냇가를 점령한 자갈과 돌멩이를 골라내고 종이박스를 깔아야만 남보다 평평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그때와는 달라졌다. 아, 한낮에 그늘지는 나무 아래 위치하는 자리는 신이 내려준 장소다. 앞서 지나간 사람이 편하게 골라둔 자리라면 더 ok. 하지만 주위에 돌멩이에 묻힌 배설물은 각오해야 한다. 어릴 때 캠핑은 더운 여름에나 하는 물놀이의 연장선이었지만, 이제 캠핑은 자연에서 해보고 달보고 별보며 밥 해먹고 돈독한 정을 나누는 여행의 또다른 이름으로 변모했다. 물론 예전의 그 캠핑이 나는 더 좋고, 그 캠핑 스타일이 사라진 것도 아니지만, 이름모를 산이나 계곡에 들어설 때마다 인간들이 남긴 쓰레기와 오염은 다소 우려스럽다. 자연은 지키는 만큼 더 큰 것을 해줄 것이다.

 

밤하늘의 달빛 속에 별을 보며 잠드는 이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유일함, 자연에 대한 예찬의 다른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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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9-03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여행을 하게 된다면 가고 싶은 곳이 많지만 저는 먼저 그랜드캐넌에 한 번 가고 싶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사람이 북적북적 거리는 도시 같은 곳보다는 사람 발길이 드문, 자연 경관이 좋은 곳에 여행 가고 싶어요. ^^
여름 방학 때 캠핑하지 못한 게 아쉬워요. 오늘 2학기 개강했어요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9-04 02:21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은 일단, 그랜드캐넌 갈 때 저를 데리고.....캐리어에 넣어서 질질 끌고가도 좋아요!
그럼요, 하지만 저는 언제나 뉴욕 보다는 파리, 파리 보다는 밀라노..................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대한 로망이 도심의 화려함에 대한 욕망보다 언제나 더 커요.
루 살로메 스타일...............(여기서 이게 왜 나옴?)

물놀이 갔었잖아요, 계곡 좋던데, 하룻밤 자고 오죠 왜..
개강 축하해요, 내가 그걸 안 했었구나...................( '')

댈러웨이 2012-09-04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렸을 때 캠핑 많이 갔어요. 요즘 사람들 가는 그런 캠핑은 아니였지만, 그러고보면 그런 기억을 남겨준 부모님한테 새삼 감사하네요.
참, 첫문장부터 저렇게 써놓으면 누가 읽어요? ㅎㅎ 네거티브? 막 이러면서 고개 갸우뚱했어요 첨엔.

그리고, <길 위에서> 좋았어요? 저 그 책 좋았어요. 그래서 오늘 아이님한테 러브레터 보냈어요.
안녕요, 저 자러 갈 거에요. 우리 진짜로 내일 봐요. ^^

아이리시스 2012-09-04 02:35   좋아요 0 | URL
그쵸....... 좋은 책인데........ 앞문장을 바꿔야겠어요. 좋은책!!!

네, 저 책은 완전 좋은 책입니다!!!!!!사진은 얼마나 멋진데요!!!!!!!! 미국캠핑 갑시다!!!!!!!!!
(책 호객행위 중)

요즘 밤에 잠이 안와서 죽어요. 그래서 혼자 창문 열고 별세다가(응?) 어제는 이병률 시인의 산문집을 읽었더니 밤에 멜랑꼴리해져가지고 밤엔 이런 짓을 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길 위에서>는 출간됐을 때 받은 책인데 그때는 좀 아닌 것 같았는데 좋아요, 이번엔. 곱씹으면서 따라가게 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여행이 진짜 여행인 것 같아요. 비트 세대도 모르고 재즈도 모르지만, 젊음은 제가 좀 아니까(!) 전에 부부가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한 책을 읽었는데 그것만큼이나 따라하고 싶은 여행이었어요. 증거가 떡하니 있잖아요, <미국 서부 여행>......그것도 캠핑ㅋㅋ

저 러브레터는 실제로 날아오는 겁니까? 사랑엔 실체가 있어야 해요♡
굿나잇, 댈러웨이님.

transient-guest 2012-09-04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캠핑은 정말 로망이에요. 꼭꼭 save만 해놓고 있는. 시간도 그렇고해서 캠핑만큼은 아니지만, 하이킹이나 그냥 주립공원 숲에서 BBQ하는건 조금씩 다니고 있습니다. 하루만 다녀와도 스트레스가 확 풀리더라구요.

아이리시스 2012-09-04 17:31   좋아요 0 | URL
아니, 닉넴 왜 이러십니까!(초면에 이런..) 오래오래 계셔야지 단기체류 손님이라니, 오래오래 좋은 글 많이많이 보여주셔야 됩니다^^

미국 계시잖아요, 어느 쪽에 계세요? 거긴 덥지 않나요? 국립공원이 그렇게 좋아요?

미국생활 얘기 들려주세요, 특히 하이킹 일기 쪽으로...재밌을 것 같아요^^(멋대로 주제도 정해드림)
ㅋㅋㅋ, 책 보니까 여자에게는 추천할 수 없겠지만 남자와 함께라면, 가능하고 또 즐거울 것 같아요.

자연치유여행이란 말 믿지 않았는데 충분히 그럴 만 해요, 저는 그저 t-g님 부러울 따름. 하이킹이라니요ㅠ.ㅠ

맥거핀 2012-09-05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차를 타고 장시간 가는 것을 상당히 못견뎌 하기 때문에 미국 같은 데를 차로 여행하고 싶다거나, 버스여행을 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별로 없어요. 영화에 나오는 그런 느낌이 좀 궁금하기는 하지만. 허허벌판에 가방 하나 가지고 내리고 버스는 등 뒤에 붕하고 떠나고 그런 거 말이죠. 저는 스케일이 작은 사람이라 아기자기한 동네가 좋습니다. 읽다보니 어렸을 때 보이스카웃에서 캠핑하던 추억이 생각이 나네요.

아이리시스 2012-09-06 00:22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저는 자라면서, 학교 때도, 여행을 갈구하는 사람들만 두고 살아서, 잘 몰랐어요. 아무래도 성향들이 다들 몽상가적 기질이 함유된, 예술가 타입만 두고 살아서 그런가 봐요. 근데 저 대부분 공대나온 친구들인데, 웬 헛소리............( '') 기차타고 정동진 가려고 생각 중인데, 남쪽에서 올라가는 기차가 예전에는 새벽에 한 대 있었는데 요즘도 그런 지 모르겠어요. 그럼 맥거핀님은 애인하고 손잡고 기차여행 그런 것도 별로예요?

버스에서 내리고 제 뒤로 붕하고 떠나는 그런 거 저는 좋아요. 바그다드 카페 오프닝이요!

언젠 한 번 캠핑장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