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센스 - Perfect Sens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그날 새벽부터 일어나 집을 나선 동네 기운은 상쾌하고도 청명했다. 게스트 하우스 앞에 플라타너스(였으면 좋겠지만)로 느껴지는 나무들이 줄지어 새파랗긴 했으나 한겨울이었다. 호수가 있었고, 벤치가 있었다. 어렵게 눈을 비비며 나왔는데 여권을 놓고 온 친구가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올 때까지 새벽 공기를 맡으며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중앙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는데, 지도가 필수였다. 그곳은 암스테르담, 우리는 네덜란드어를 몰랐다. 네덜란드어란 게 존재하는 지에도 별반 관심이 없었을테니, 어떤 언어였대도 몰랐을 것이다. 역이름이 큼지막하게 씌어 있어도 한눈에 박혀 들어오지 않아, 아무도 없는 텅 빈 기차 안에서도 숨을 죽였다. 뿌연 창밖으로 암스테르담의 마트와 운하와 자전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글자가 아니라.

 

틀린그림찾기 능력은 탁월했다. 친구와 반대 방향으로 앉아 고독을 씹으며 혹은 깔깔 거리며 목적지 역을 눈에 심고 한눈을 팔지 않았다. 코스를 세었던가. 온 감각을 세워 긴장했더니 어렵지 않게 목적지에 내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 탔던 기차의 최종역이 어디인지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서울을 떠난 기차의 끝이 빤하듯, 암스테르담 지리에 훤한 누군가에 의해 금새 찾을 수 있는 정답이지만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찾아봐야 내겐 낯선 곳, 낯선 세상, 알 수 없는 영역일 뿐일테니, 다 부질없는 일일 터였다. 그곳을 기억하게 하는 건 진하디 진한, 한국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코코아 향이었다. 초코향일 수도, 코코아향일 수도, 둘 모두일 수도 있다. 달콤함이 진하면 써지는 거라고 그때 생각했었다. 이정표도 표지판도 우리의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을 만큼 관광객들이 왕왕 찾아오는 유명지여서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려 걷는 길에는 화려하진 않지만 소소한 들풀들과 까르르 웃으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인근 학교 학생들, 마침 개폐중인 다리, 동화 같은 풍경, 돌아가는 풍차를 볼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로 우리는 들어가는 중이었다. 잔세스칸스. 그곳은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풍차마을이었다.

 

풍차마을하면 어린 시절 본 [플란다스의 개] 밖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치즈도 우유도 풍차마을 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네덜란드 풍경에 들어있긴 했지만 풍차마을이 꽤 여러 개 있음에도, 잔세스칸스였던 이유는 하필이면 그곳이 여행책자 안에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었다. [플란다스의 개] 속 파트라슈와 할아버지 그리고 네로가 살던 풍차마을은 벨기에라는 걸. 그래도 많은 여행객들이 이 만화를 떠올리며 잔세스칸스에 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도 있었다. 벨기에의 플란다스 지방에 있는 풍차마을이라 플란다스의 개라는 제목을 가진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차마을 잔세스칸스는 반 고흐 뮤지엄 때문에 암스테르담에 기어코 들러야 한다고 우겼던 나의 또다른 소망이었다. 친구는 두말않고 따라나서 주었고.

 

잔세스칸스의 코코아향. 잔세스칸스로 가는 길의 코코아향이 당시의 풍경과 함께 먼저 떠오르면, 그때 이곳저곳에 눈길을 멈추며 길을 걷던 나와 친구를 잊을 수 없다.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어떻게 헤매었는지, 무슨 꿈을 이야기했는지까지 생생하고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 후각이란 기억을 동반하는 것, 이라고 이 영화가 얘기하기 전에도 나는 알 것 같았다. 후각을 잃으면 추억과 기억을 모두 잃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후각을 잃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두려웠다, 마구 돌이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이클과 수잔도 피해자지만 영화 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극히 미미하다.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대표자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 마이클은 레스토랑의 생선요리 전문 쉐프, 수잔은 전염병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레스토랑 맞은 편에 수잔이 살고 그들은 자주 부딪치며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처음에는 후각, 다음에는 미각, 다음에는 청각, 다음에는 시각. 인간의 감각이 오감이라면 단 하나 빼고는 모두 잃은 셈. 원인 모를 감각 상실 앞에 인류는 속수무책, 발을 동동 구를 뿐이다. 잠복기는 점점 짧아지고 사람들은 감각 하나를 잃을 때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적응하려 애쓴다. 결과는 있지만 원인이 없기에 슬픔조차 사치일 지도 모른다. 이유가 없어 되돌려놓지 못한다. 적응할 만 하면 다음 감각을 잃는다. 짐승의 생살을 뜯고, 간장을 마시고, 남은 음식들은 모두 뒹군다. 거리는 고함과 혼란으로 마비되었다. 아직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이들은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고, 어김없이 그들도 전염된다. 모든 거리, 모든 나라, 모든 세상, 모든 인류가 냄새를 못 맡고, 음식 맛을 알지 못하고, 소리를 못 듣고, 앞을 볼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극은 사랑하는 사람의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서로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없는 것. 여자가 남자를 불러도 남자는 듣지 못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한다 말해도 여자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낄 수 없고, 따라서 모든 냄새를 잃어가는 동안 추억도 잊혀진다. 다른 감각. 후각, 미각, 청각, 시각을 잃은 이들에게 마지막 남은 하나의 감각으로, 혹은 네 감각이 사라진 자리를 메우는 또 다른 감각으로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인지하고 느끼고 사랑한다.

 

마침내 그가 그녀의 곁으로 가고, 그녀가 그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맨다. 서로를 알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내가 없는 세상에는 당신도 없고, 당신이 없는 세상에는 내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같이 있기 때문이다. 잃으면 채울 수 있고, 채우다 보면 잃어버리기도 한다. 완벽하고 완전한 것이란 세상에 없는 것처럼 살자. 질긴 삶,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말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은 게 생의 신비로움일 것 같다. 그가 그녀에게 니가 가진 건 눈과 입과 가슴과 성기 밖에, 니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티비 보는 것과 섹스 밖에 없지 않냐고, 저기 가서 업드려 다리를 벌리거나 꺼져버리라고 소리 지를 때, 세상의 침묵과 어둠을 보았다. 고독이 아름다운 것, 이라고 누가 말했었나. 고독은 아름답지 않다. 정적. 그것은 끔찍하고 지독하다. 가버려, 사랑해, 그것은 온전히 동일한 마음이었다, 적어도 영혼이 빠져나간 그에게는. 어쨌거나 나는, 온전하게 당신을 느낄 수 있다. 다행인 건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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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12-27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기해요. 사람마다 문체가 다르다는 것이.
아이님의 문체는 다른 사람의 글과 섞여 놓아도 이젠 알 것 같아요. 제가 그 문체에 적응이 된 듯...해요.ㅋㅋ
"후각이란 기억을 동반하는 것," - 전 왜 이 문장에 끌렸을까요?

아이리시스 2011-12-27 20:11   좋아요 0 | URL
문체 바꾸기가 엄청 어려운 거더라고요. 책 읽을 때마다 문체가 변해요. 제대로 적립하려면 필사를 해야 해요. 저는 오정희. 문체라기엔 거창하지만 마음에 드는 걸 막 따라하게 돼요. 드라마 대사 따라하듯이요.ㅋㅋㅋ 후각을 잃으면 추억을 다 잃는 거라고 영화가 얘기했어요. 엄마 냄새,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 어린시절 뛰어놀던 들판, 이런 것들이 지워진다고.

요즘 비문이 엄청 많죠? 이렇게 쓰면 안되는 걸 아는데, 말을 하다가 다른 말이 생각나면 어우러지게 고치지 않고 뒤에다 갖다 붙여요ㅋㅋㅋ 예를 들어, 첫문단 맨 마지막 문장이요.ㅋㅋㅋ

페크님, 저는 이제 하루에 한 번만 알라딘 들어오려구요! 이걸 줄여야 다른 걸 하더라고요. 그래도 서재이웃분들 새 글은 꼬박꼬박 보러올거예요! 그러니 새 글 많이 부탁드려요.^-^

맛난 저녁 드세요~^^

맥거핀 2011-12-28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각을 잃으면 인간이 인간일까,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걸까 궁금해지기는 합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 감각이라는 것이 과연 몇 퍼센트나 채우고 있을까, 그게 빠져 나가면 그 빈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조금 다른 얘기지만, 어떤 책에서 보니까, 인간의 감각에 대한 기억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이 후각이라고 하더라구요. 늙더라도 최후까지 기억하는 어린 시절 맡았던 장례식장의 향내음이나 어머니가 끓여주셨던 된장찌개의 냄새 같은 것. 그래서 후각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라고 영화가 말했나 봅니다. (그래서 예전 여친의 향수냄새를 아직도 기억..응?)

아이리시스 2011-12-28 17:08   좋아요 0 | URL
그게 맞아요. 어머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 냄새로 기억하는 시간, 장례식장 향내로 기억되는 날, 그걸 이 영화가 후각을 잃으면 추억을 잃고, 추억을 잃으면 다 잃는다고 한 것. 예전 여친의 향수냄새로 그녀를 기억하는 것도 빙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둘은 알아봅니다. 후각,미각,청각,시각을 잃었음에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어요. 헐리우드스럽지 않고, 독일영화니까요! 그런데 헐리우드 배우로 영어를 쓰면서 만든. 저는 이런 영화 좋아요!^^

마녀고양이 2011-12-29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각, 미각, 청각... 오감각의 이야기에서,
라면을 떠올리는 나는? 역시 술 먹은 다음날의................ 에휴휴.

그런데 아이리시스님의 페이퍼는 참 신기해요. 역시 댓글이랑 다르단 말이야.
얼굴을 봐야 알건데, 역시 신비로와... ㅋㅋ. 호기심 엄청 자극하는 나의 아이리시스님~

아이리시스 2011-12-29 15:00   좋아요 0 | URL
풀어가는 방식이 특이한 영화고, 저는 좋았어요. 오감이 예민한 편은 아니고 저는 비위가 약한 편인데 오감이 사라진 세상은 차라리 죽어버려도 좋을 만큼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마고님.

라면 드셨어요? 해장국을 드셔야 하는 거 아닌가??? 페이퍼랑 댓글이랑 다르다는 게, 댓글은 수다스럽다는 거죠, 페이퍼는 아닌데! 그게 아닌가ㅋㅋㅋ 전에도 그런 얘기를 Y님께 들었는데 그게 마고님이랑 같은 의미일까요?(갸우뚱) 히히히히히히히.

신비댓글 다 달고 저는 갑니다.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