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극의 추구가 다시 자극이 되는 역설
자극을 덜어내려는 시도 자체가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안 하는 능력을 겨루는 ‘멍 때리기 대회‘가 그렇다. 참가자들은 가만히 앉아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결국엔 ‘대회‘일 뿐이다. 뇌파나 심박수를 측정하고 순위를 매기며 가장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 사람이 우승을 하는 방식이다. 권태를 걷어내려던 시도가, 결국 또 하나의 완주해야 할 목표가 돼버린다. 자극을 덜어내는 일조차 성과로 증명해야 한다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하지 않는 법을 선택한 게 아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상황마저 틈새에 끼워 넣거나 전에 없던 무위로 교체하고 있을 뿐이다.
- P157

응집되지 않는 정보
정보와 지식이 많아졌다. 특히 AI가 등장하고 난 이후로는 궁금하면 즉각 답을 찾을 수 있게 됐다. 문제는 많이 보고 듣고 알게 됐는데, 그것이 하나의 의미로 뭉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권태를 촉진하는 시스템의 문제다.
(...)
숏폼을 한 시간 내리 보고 난 후 밀려드는 허탈함은, 개별 콘텐츠들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에 할애한 시간 전체의 의미가 뭉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P158

내 손으로 만들어낸 물건에 더 큰 애착을 느끼는 심리를 이케아효과 IKEA effect라고 한다. 다만 이 효과는 노동을 들였다는 사실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직접 조립한 결과물을 완성 직후 도로 해체하게 하면 애착은 사라진다. 노동이 완성으로 매듭지어져야 비로소 애착이 생기는 것이다. 문제는 현대사회에서는 이 효과가 AI 때문에 쉽게 무화된다는 점이다.
- P161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노동사간이 줄어드는 사회일수록 여가를 현명하게 쓰는 능력을 가르쳐야하며, 그 능력을 기르는 데는 역설적으로 게으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주장은 현 시점에도 유효하다. 소설가 김애란은 AI와 인간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망설임‘을 꼽았다. ‘누군가의 고민을 들을 때 말을 삼키고 주저하는 그 찰나의 망설임 말이다. 정답을 바로 내놓는 매끄러움이 아니라, 머뭇거리느라 생기는 빈틈이 중요하다. AI는 빠르게 해결하지만, 인간은 망설인다. 그 망설임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배우지 못한 ‘여백을 다루는 방식‘이다. 자극이 넘칠수록 우리는 이 가장 인간적인, 여백을 다루는 방식을 익혀야 한다.
- P1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