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너무 멀리 가버린
죽는 것과 멀리 있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못 만나는 건 똑같지 않느냐고, 그러니 죽은 사람이 그저 멀리 있다고 여기면 무슨 슬퍼할 일이 있느냐고, 고등학교 후배가 그러대. 죽으면 만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멀리 있으면 언젠가는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대답했지만...
죽어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슬픔이 덜할까? 그래서 내세를 생각해낸 걸까? 다른 먼 곳에 가 있다고 말하는 거지. 죽으면 죽은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 만나 반갑게 하하호호 웃을 수 있다고 믿는 거지.
기슭아, 우리는 만난 지 20년도 더 되었고, 서로 연락도 끊겼는데 우리 중에 누가 죽었다 한들 알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어디선가 꾸역꾸역 살고 있으리라 여길 테지. 그러다 잘못 소식이 전해져 우리 중 하나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슬프겠지. 진짜 죽은 게 아니라도. 진짜 죽었어도 죽은 줄 모를 때와 죽지 않아도 죽었다고 여길 때를 생각해.
아버지와 작은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죽음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놀랐어. 죽음이란 단어는 내게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었는데, 그러니까 사람이 죽었다는 게 영혼이 어디로 가고 말고 하는 일이 아니라 움직이던 몸이 멈추고, 나를 보던 눈이 닫히고, 온기를 완전히 잃는 일이었어. 어떤 인간이 죽는다는 건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라 못 쓰게 된 육체를 남기는 일이야. 그 남겨진 육체를 감당하는 과정이 장례지.
그러면 영혼은 어쩌란 말이냐. 그러나 기슭아, 죽은 자들은 죽은 모습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의 모습으로 꿈에 나와. 껍데기는 생전의 모습이고 영혼은 꿈꾸는 자의 마음이 아닐까. 영혼을 믿지 않느냐고? 영혼인지 그냥 자기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대개 죽은 자들이 불멸이긴 해. 죽고 나면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깊은 밤, 횡설수설이다. 나는 오늘 친정 식구들과 거창에 가. 성묘하러. 죽은 자들은 어디 저승 같은, 여기 아닌 다른 데 있는 걸까? 아니면 차마 못 다한 말들을 품고 꼬물꼬물 땅속 벌레들에게 침묵의 밥이 되고 있을까? 오래된 뼛가루는 먼지가 되어 어느 집 낡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까?
의자
_박서영
헝겊 인형을 주워왔다
의자에 앉힌다
나는 1인분의 식사를 준비한다
인형이 사라지면, 사라지면
사라진다는 것은 그다지 멀리 가는 게 아니다
인형이 의자에서 떨어져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건 사라진 것이다
인형은 절벽을 경험하겠지
나는 꽃병에 꽂을 부추꽃과 코스모스를 꺾으러 나간다
인형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사라진 것이다
인형은 이별의 절벽을 경험하겠지
사라진다는 것은 문을 열고 나가
문 뒤에 영원히 기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다지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너무 멀리 가버린 것들의 차가운 심장
내가 꽃을 들고 올 때까지 인형은 의자에 앉아 있다
자신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적이 있다는 것을
그 바로 옆이 꽃밭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헝겊 인형이
의자에 앉아 미소 짓고 있다
-박서영,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문학동네, 2019), p.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