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알들은 허공에 흩어진다

 

 

우리 집에는 토정비결이 있었어. 소설책 말고 진짜 토정비결. 신년에 얇은 빨간 책자만 사면 두고두고 운세를 볼 수 있는 책이지. 엄마는 값싸게 신년운수를 볼 수 있다고 그 비결’(秘訣)을 애용하셨어. 그 책을 본 이래로 엄마의 운수는 나빴던 해가 한 해도 없었고, 아버지의 운수가 좋았던 해가 한 해도 없었어. 그러니까 우리 집은 엄마의 운으로 겨우 살아갔던 걸까?

 

그러던 어느 해, 드디어 아버지의 운이 좋은 해가 왔어.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엄마는 내심 기대를 하셨대. 그해 아버지는 부옇게 살이 올랐어. 왜 그런지 자꾸 가래떡을 달고 사셨지. 속이 안 좋다는 아버지를 끌고 엄마가 병원에 가셨는데 이미 말기였어. 그때가 생각나. 엄마는 오진일 거라고 믿으셨지. 병명을 받고 한 달 반 만에 돌아가셨으니 토정비결에서 운이 좋다고 한 바로 그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어.

 

시어머니는 여든 한 살에 돌아가셨어. 평생을 고생하시다 살 만해지셨을 때지. 어머님은 5년만 더 살았으면 하셨어. 요즘은 장수하는 분들이 많으니 큰 욕심은 아니었는데 결국 바라는 대로 되지 못했어. 친정엄마가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셨어. 그러나 몇 년 후 사돈은 그때 참 잘 돌아가셨어!”라고 했지.

 

어머님이 그렇게 더 살고 싶어 했던 5년이 지나기 전에 둘째 아주버님이 돌아가셨거든. 자식을 잃어본 엄마는 자식이 죽는 걸 보느니 먼저 죽는 게 낫다고, 그깟 몇 년 더 살아도 지옥이라고. 엄마는 아직도 이 세상과 지옥을 오가고 계시는 걸까?

 

모르겠어. 기쁜 일이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이 슬픈 일인지. 매일 매일 모르는 것 앞에서 하루를 시작해. 몰라서 기도를 하나 싶기도 해. 간구했는데 간구한 대로 주어지면 감사하고, 간구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떤 깊은 뜻이 있겠구나 하고. 나는 모르지만 누구는 다 알아서 갈 길로 나를 제대로 인도해주고 있다고 믿으면 얼마나 평안할까?

 

몇 해 전 지진이 났을 때를 생각해. 사는 게 그런 것 같아서. 멀쩡하던 땅도 흔들리는데 무슨 일이 못 일어나겠냐 싶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가 있어. 그래, 어떻게 다 모르겠어. 아는 게 있다고 믿으니 사는 거지. 모르는 게 너무 커서 아는 것이 좁쌀 같아. 좁쌀을 먹고 나는 새처럼 아주 조금 아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어. 광대한 모름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원경(遠境)

_권혁진

 

 

땅 위에 내려

조알을 세고 있는 새

손바닥만한 땅 위

조알을 하나씩

부리로 세고 있다

몇 개 조알의 힘으로

새는 하늘로 떠오르고

새를 따라 조알들은

허공에 흩어진다

 

-권혁진, 프리지아꽃을 들고(문학과지성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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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窓)

 

 

대학교 2학년 때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났어. 많이 친한 사이가 아니어서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기억이 안 나. 기억나는 건 사진이야. 그 친구가 거의 2년 만에 만나면서 사진을 들고 나왔어. 어수선한 교실에 창을 보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찍은 거였어. 그 아이가 나라고 했어. 사진 속 뒷모습이 나라는 것보다 휴대폰도 없던 때, 사진기를 학교에 들고왔다는 게, 하필 뒷모습을 찍었다는 게, 2년 동안 가지고 있었다는 게 더 신기했어. 근데 그 사진을 나한테 줬던가?

 

어쨌든 창을 내다보고 있는 건 나였어.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 늘 창문 가까이 있었어. 사진은 교실 창문이었지만 복도 창문에 더 자주 나가 있었어. 중학교 때 한 친구는 내가 도대체 왜 쉬는 시간마다 복도에 나와 바깥을 보는지 궁금해서 자기도 쳐다봤다고 했어. 그래서 뭘 보고 있었더라?

 

기억이 안 나. 내가 본 게 뭔지. 운동장이나 학교 옆 저수지나 뒷산에서 본 건 기억이 나는데 창문으로 본 건 모르겠어. 어쩌면 그저 교실에 있기 싫어서, 여기가 아닌 곳을 보고 싶어서 창을 내다봤는지도 몰라. 자주 가슴이 답답했거든.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강렬하지 않지만 창문을 보면 여기가 아닌 곳이 가까이 있어 언제든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 시절 내게 창문은 여기에 있으면서 여기를 벗어나게 해주는 책 같은 것이었을까?

 

쓰다 보니 내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멀어. 그래도 겹치는 장면이 있지. 나는 지금도 창을 내다봐. 독서실과 교회와 가로수와 하늘과 바람이 있어. 창 안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어. 시원한 바람이네.

 

 

 

_김현승

 

 

창을 사랑하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12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김현승, 김현승시선집(민음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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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2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2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2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5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과 기억

 

 

기슭아, 오랜만에 이름을 불러보네. 아이들 방학인데 마치 내 영혼이 방학이라도 한 것처럼 멍하게 하루가 지나가 버려. 어제는 네 꿈을 꿨어. 이렇게 편지를 써서 그런지 꿈속에서 좀 친해진 느낌이었어. 그전에 꿈에선 서먹서먹했거든. 좀 긴 꿈이었는데 저녁이 되니 기억이 잘 안 나.

 

기억이 그런 거지. 기억이 잘 나기도 하고, 안 나기도 하고. 완전히 잊어버리기도 하고. 아마 우리 둘이 만나서 대학교 때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몰라. 기억하는 것과 잊어버린 것이 서로 달라서. 혹은 꿈처럼 아득해서 조각조각 기억을 이어가지 못할 지도.

 

우리 집 앞 교회는 다 지어졌어. 새로 만든 십자가에 불빛이 없어 좋아. 십자가 바로 옆에 해가 걸려 있어. 눈부셔. 흐린 날 어둑할 때 십자가를 보면 전에 보던 하늘과 다른 엄숙한 느낌이 있어. 과거는 이런 풍경 같아. 같은 장소도 새벽과 한낮과 밤의 풍경이 다 달라 보여. 서른 살에 내가 바라보던 과거와 마흔 넘은 내가 바라보는 과거는 빛깔이 좀 달라. 어떨 땐 같은 사건인데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과거는 기억이 나고, 어떤 과거는 기억에 남지 않지 않는 걸까? 남아 있는 과거는 어떤 해결을 바라는 걸까? 다른 해석을 기다리는 걸까? 어떻게든 성장하고 싶은 걸까? 기억을 오래 할 수 있는 건 감정이 섞여 있을 때라고 해. 기쁘거나 슬프거나 놀라거나 두렵거나.

 

어쩌면 꿈도 그렇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죽은 이를 만나거나 하는 기억은 비교적 선명하지. 꿈과 기억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둘 다 여기에 없는 이야기인데, 하나는 있었다고 믿고 하나는 없었다고 믿고. 그렇지만 감정 때문에 기억이 많이 왜곡된다고도 해. 그러면 꿈과 뭐가 다른 걸까?

 

과거는 풍경이고 그림인데, 내가 그 안에 있다고 믿는 풍경이지. 사실은 내가 들고 있는 스케치북 안에 있는 그림일지도 몰라. 나는 내가 과거의 목줄을 잡고 있으면서 과거가 내 목줄을 잡고 있다고 착각하는 강아지일까?

 

기슭아, 이제 선풍기가 없어도 앉아 있기 힘들지 않아. 나는 가만히 있는데 시간이 막 흘러가는 느낌이야. 흐르는 계곡에서 같이 흐르지는 못하고 달그락달그락 바위와 바위 사이 낀 돌멩이 같아. 내 기억 속 과거들도 물 속 어디 여기저기 흩어져 흐르는 물에 움찔거리고 있는 걸까?

 

그나저나 저녁이다. 배고프다. 아무리 먹어도 결국은 허기진 시간이 오는구나.

 

 

 

사람의 일생

_R. 프로스트

 

늙은 개가 앉은 채

뒤를 돌아보고 짖는다.

그놈이 강아지였을 때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R. 프로스트·정현종 옮김, 불과 얼음(민음사,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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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 노트

 

 

사는 데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오래전 달라이라마를 만났을 때 사람들이 티베트에 대해 물었어. 그때 달라이라마가 모두 다 괴로움이 있는데 당신 괴로움을 얹어 주고 싶지 않다면서 아주 짧게 티베트 이야기를 했던 생각이 나. 그렇지만 나는 괴로운데 괴롭다고 말하지 못하면 그 괴로움이 더 커지는 것 같아.

 

딱히 분명한 이유가 없는데도 괴로울 때가 있어. 그러면 이것저것 이유를 찾아서 불평하게 돼. 무슨 괴로움이냐고? 글쎄, 한 번씩 그냥 답답하고, 공허하고, 늘 하던 일이 갑자기 힘겹게 느껴지고... 물론 꼼꼼히 따져보면 뭔가 이유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괴로운 이야기는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괴로워. 자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마음이 들 때 괴로운 마음 그대로 적어. 괴로운 게 어때서? 공허한 게 어때서? 그러니까 나는 괴롭고, 공허하고, 가슴이 눌리고, 평소에 괜찮던 일에 화가 나고... 상태를 한 번 적어보는 거지.

 

그러면 마음이 좀 가라앉아. 아예 노트를 만들어서 괴로울 때마다 괴롭다고 맘껏 얘기해보면 어떨까. 이유를 찾았든 못 찾았든 괴로우면 괴로운 거지. 슬프면 슬픈 거지. 아프면 아픈 거지. 말한다고 안 괴롭고, 안 슬프고, 안 아프나? 그래도 표현을 안 하면 더 심각하게 느껴져. 별로 심각한 것도 아닌데.

 

괴롭거나 불평이 생길 때 쏟아내고, 쏟아낸 걸 읽으면 남 이야기 같을 때도 있어. 괴로울 때마다 괴로움 노트를 적으면 괴로움의 실체가 보이지 않을까? 괴물처럼 보이는 괴로움이 커다란 그림자일 뿐 실상은 조그만 강아지일지도 모르잖아.

   

 

 

  괴로운 자

  _김언       

    

 

  우리는 사랑 때문에 괴롭다. 사랑이 없는 사람도 사랑 때문에 괴롭다. 그래서 사랑 자리에 다른 말을 집어넣어도 괴롭다우리는 사람 때문에 괴롭다. 우리는 사탕 때문에도 괴롭다한낱 사탕 때문에도 괴로울 때가 있다. 우리는 무엇이든 괴롭다. 사탕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도 우리는 괴롭다. 사람도 사랑도 모조리 괴롭다고 말할 때 우리는 말 때문에 다시 괴롭다. 우리는 말하면서 괴롭다. 말한 뒤에도 괴롭고 말하지 못해서도 괴롭다. 말하기 전부터 괴롭다. 말하려고 괴롭고 괴로우려고 다시 말한다. 우리는 말 때문에 괴롭다. 괴롭기 때문에 말한다. 괴롭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고 우리에게 말한다. 누구에게 더 말할까? 괴로운 자여, 그대는 그대 때문에 괴롭다. 그대 말고 괴로운 사람이 있어도 괴롭다. 그대 말고 괴로운 사람 하나 없더라도 그대는 괴롭다. 괴롭다 못해 외로운 자여, 그대는 내가 아니다. 나는 나 때문에 외롭다. 나는 나 때문에 괴롭고 괴롭다 못해 다시 말한다. 나는 나 때문에 말한다. 나는 나 때문에 말하는 나를 말한다. 나는 나 때문에 내가 아니다. 나는 나 때문에 늘 떠나왔다. 나는 나 때문에 그곳이 괴롭다. 내가 있었던 장소. 네가 머물렀던 장소. 사람이든 사랑이든 할 것 없이 사탕처럼 녹아내리던 장소. 그 장소가 괴롭다. 그 장소가 떠나지를 않는다. 그 장소를 버리고 그 장소에서 운다. 청소하듯이 운다. 말끔하게 울고 말끔하게 잊어버리고 다시 운다. 그 장소에서 그 장소로 옮겨왔던 수많은 말을 나 때문에 버리고 나 때문에 주워 담고 나 때문에 어디 있는지 모르는 그 장소를 나 때문에 다시 옮겨간다. 거기가 어딜까? 나는 모른다. 너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는 그 장소를 괴롭다고만 말한다괴롭지 않으면 장소가 아니니까. 장소라서 괴롭고 장소가 아니라서 더 괴로운 곳에 내가 있다. 누가 더 있을까? 괴로운 자가 있다.

 

-문학동네시인선100기념티저시집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문학동네, 2017),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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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왜? 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왜 이렇게 하고 있지? 이건 선택의 문제. 해야만 하는 일이란 게 있을까? 살아 있는 것조차 어쩌면 하나의 선택. 그러니 모든 게 선택. 너무 익숙해서 매순간 내가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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