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기억
기슭아, 오랜만에 이름을 불러보네. 아이들 방학인데 마치 내 영혼이 방학이라도 한 것처럼 멍하게 하루가 지나가 버려. 어제는 네 꿈을 꿨어. 이렇게 편지를 써서 그런지 꿈속에서 좀 친해진 느낌이었어. 그전에 꿈에선 서먹서먹했거든. 좀 긴 꿈이었는데 저녁이 되니 기억이 잘 안 나.
기억이 그런 거지. 기억이 잘 나기도 하고, 안 나기도 하고. 완전히 잊어버리기도 하고. 아마 우리 둘이 만나서 대학교 때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몰라. 기억하는 것과 잊어버린 것이 서로 달라서. 혹은 꿈처럼 아득해서 조각조각 기억을 이어가지 못할 지도.
우리 집 앞 교회는 다 지어졌어. 새로 만든 십자가에 불빛이 없어 좋아. 십자가 바로 옆에 해가 걸려 있어. 눈부셔. 흐린 날 어둑할 때 십자가를 보면 전에 보던 하늘과 다른 엄숙한 느낌이 있어. 과거는 이런 풍경 같아. 같은 장소도 새벽과 한낮과 밤의 풍경이 다 달라 보여. 서른 살에 내가 바라보던 과거와 마흔 넘은 내가 바라보는 과거는 빛깔이 좀 달라. 어떨 땐 같은 사건인데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과거는 기억이 나고, 어떤 과거는 기억에 남지 않지 않는 걸까? 남아 있는 과거는 어떤 해결을 바라는 걸까? 다른 해석을 기다리는 걸까? 어떻게든 성장하고 싶은 걸까? 기억을 오래 할 수 있는 건 감정이 섞여 있을 때라고 해. 기쁘거나 슬프거나 놀라거나 두렵거나.
어쩌면 꿈도 그렇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죽은 이를 만나거나 하는 기억은 비교적 선명하지. 꿈과 기억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둘 다 여기에 없는 이야기인데, 하나는 있었다고 믿고 하나는 없었다고 믿고. 그렇지만 감정 때문에 기억이 많이 왜곡된다고도 해. 그러면 꿈과 뭐가 다른 걸까?
과거는 풍경이고 그림인데, 내가 그 안에 있다고 믿는 풍경이지. 사실은 내가 들고 있는 스케치북 안에 있는 그림일지도 몰라. 나는 내가 과거의 목줄을 잡고 있으면서 과거가 내 목줄을 잡고 있다고 착각하는 강아지일까?
기슭아, 이제 선풍기가 없어도 앉아 있기 힘들지 않아. 나는 가만히 있는데 시간이 막 흘러가는 느낌이야. 흐르는 계곡에서 같이 흐르지는 못하고 달그락달그락 바위와 바위 사이 낀 돌멩이 같아. 내 기억 속 과거들도 물 속 어디 여기저기 흩어져 흐르는 물에 움찔거리고 있는 걸까?
그나저나 저녁이다. 배고프다. 아무리 먹어도 결국은 허기진 시간이 오는구나.
사람의 일생
_R. 프로스트
늙은 개가 앉은 채
뒤를 돌아보고 짖는다.
그놈이 강아지였을 때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R. 프로스트·정현종 옮김, 『불과 얼음』(민음사,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