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 노트
사는 데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오래전 달라이라마를 만났을 때 사람들이 티베트에 대해 물었어. 그때 달라이라마가 모두 다 괴로움이 있는데 당신 괴로움을 얹어 주고 싶지 않다면서 아주 짧게 티베트 이야기를 했던 생각이 나. 그렇지만 나는 괴로운데 괴롭다고 말하지 못하면 그 괴로움이 더 커지는 것 같아.
딱히 분명한 이유가 없는데도 괴로울 때가 있어. 그러면 이것저것 이유를 찾아서 불평하게 돼. 무슨 괴로움이냐고? 글쎄, 한 번씩 그냥 답답하고, 공허하고, 늘 하던 일이 갑자기 힘겹게 느껴지고... 물론 꼼꼼히 따져보면 뭔가 이유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괴로운 이야기는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괴로워. 자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마음이 들 때 괴로운 마음 그대로 적어. 괴로운 게 어때서? 공허한 게 어때서? 그러니까 나는 괴롭고, 공허하고, 가슴이 눌리고, 평소에 괜찮던 일에 화가 나고... 상태를 한 번 적어보는 거지.
그러면 마음이 좀 가라앉아. 아예 노트를 만들어서 괴로울 때마다 괴롭다고 맘껏 얘기해보면 어떨까. 이유를 찾았든 못 찾았든 괴로우면 괴로운 거지. 슬프면 슬픈 거지. 아프면 아픈 거지. 말한다고 안 괴롭고, 안 슬프고, 안 아프나? 그래도 표현을 안 하면 더 심각하게 느껴져. 별로 심각한 것도 아닌데.
괴롭거나 불평이 생길 때 쏟아내고, 쏟아낸 걸 읽으면 남 이야기 같을 때도 있어. 괴로울 때마다 괴로움 노트를 적으면 괴로움의 실체가 보이지 않을까? 괴물처럼 보이는 괴로움이 커다란 그림자일 뿐 실상은 조그만 강아지일지도 모르잖아.
괴로운 자
_김언
우리는 사랑 때문에 괴롭다. 사랑이 없는 사람도 사랑 때문에 괴롭다. 그래서 사랑 자리에 다른 말을 집어넣어도 괴롭다. 우리는 사람 때문에 괴롭다. 우리는 사탕 때문에도 괴롭다. 한낱 사탕 때문에도 괴로울 때가 있다. 우리는 무엇이든 괴롭다. 사탕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도 우리는 괴롭다. 사람도 사랑도 모조리 괴롭다고 말할 때 우리는 말 때문에 다시 괴롭다. 우리는 말하면서 괴롭다. 말한 뒤에도 괴롭고 말하지 못해서도 괴롭다. 말하기 전부터 괴롭다. 말하려고 괴롭고 괴로우려고 다시 말한다. 우리는 말 때문에 괴롭다. 괴롭기 때문에 말한다. 괴롭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고 우리에게 말한다. 누구에게 더 말할까? 괴로운 자여, 그대는 그대 때문에 괴롭다. 그대 말고 괴로운 사람이 있어도 괴롭다. 그대 말고 괴로운 사람 하나 없더라도 그대는 괴롭다. 괴롭다 못해 외로운 자여, 그대는 내가 아니다. 나는 나 때문에 외롭다. 나는 나 때문에 괴롭고 괴롭다 못해 다시 말한다. 나는 나 때문에 말한다. 나는 나 때문에 말하는 나를 말한다. 나는 나 때문에 내가 아니다. 나는 나 때문에 늘 떠나왔다. 나는 나 때문에 그곳이 괴롭다. 내가 있었던 장소. 네가 머물렀던 장소. 사람이든 사랑이든 할 것 없이 사탕처럼 녹아내리던 장소. 그 장소가 괴롭다. 그 장소가 떠나지를 않는다. 그 장소를 버리고 그 장소에서 운다. 청소하듯이 운다. 말끔하게 울고 말끔하게 잊어버리고 다시 운다. 그 장소에서 그 장소로 옮겨왔던 수많은 말을 나 때문에 버리고 나 때문에 주워 담고 나 때문에 어디 있는지 모르는 그 장소를 나 때문에 다시 옮겨간다. 거기가 어딜까? 나는 모른다. 너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는 그 장소를 괴롭다고만 말한다. 괴롭지 않으면 장소가 아니니까. 장소라서 괴롭고 장소가 아니라서 더 괴로운 곳에 내가 있다. 누가 더 있을까? 괴로운 자가 있다.
-문학동네시인선100기념티저시집『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문학동네, 2017), p.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