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코로나19 때문에 종일 아이들과 있으니 시간을 내어 책 읽기가 쉽지 않아. 어제는 산책하다 앉아서 책을 좀 봤는데 집에서 보는 것보다 잘 읽혔어. 요즘은 자기 전에 유튜브 채널에서 책 읽어 주는 걸 들어. 서문과 1장만 주로 읽어주는데 듣다 보면 그 책을 마저 읽고 싶어져.
우리 애들이 어릴 때 나는 매일 책을 읽어줬어. 그렇지만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나에게 책을 읽어주진 않았어. 당시엔 그런 문화가 없었던 것 같아. 그런 문화가 있었다면 부모님이 아니라 언니들이 읽어줬을 거야. 작은언니가 자기 전에 소리 내어 시를 읽긴 했는데 나를 위해 읽어 줬다기보다 언니가 읽는 걸 내가 함께 듣는 정도였어.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책을 읽어준 건 큰언니가 처음이었어. 출산 예정일이 두 달 이상 남았는데 쌍둥이 형제가 내 자궁 문을 두드리고 있을 때였지. 출산일을 늦추려고 이완제를 맞으며 2주는 분만 대기실에서, 2주는 병실에서 지냈어. 일찍 출산하면 아이들의 폐와 심장에 문제가 생길 거라고 했어. 분만 대기실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물도 마실 수 없었고, 초기엔 화장실도 갈 수 없었어. 그냥 똑바로 누워 있어야 했어.
큰언니가 자주 병원에 왔어. 하루는 병원에서 빌렸다며 책을 읽어 줬어.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였어. 커튼으로 만든 비좁은 공간에서 언니가 책을 읽어주던 모습이 그림처럼 남아 있어. 차갑고 꽉 닫힌 침대에 햇살이 비치는 느낌이었어. 기슭아, 사람이 햇살이 될 수 있어. 따스한 책이 될 수 있어. 평화로운 그 장면처럼, 담담한 에세이처럼 별 탈 없이 아이들이 태어났어.
대신 내 심장에 문제가 생겼어. 이완제를 너무 많이 썼던 탓일까? 그래도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아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아이들이 건강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장면이 다르게 기억될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아이들이 아팠다 해도 그 상황에서 또 최선을 다했을 것 같아. 아마 언니가 책을 읽어주던 그 순간은 지금처럼 마음의 벽에 따스하게 걸려 있을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져. 이전과 이후가 어떻든지 순간은 그 순간으로만 존재해. 나도 언니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가만히 있는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 주고 싶어져. 순간과 순간으로 채워진 책을 말이야.
책
_김수영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김수영, 『오랜 밤 이야기』(창비,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