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아이가 울면서 학교에 갔어. 둘이 아침 먹다 다퉈서 아빠한테 혼났어. 작은애는 눈치껏 나갔는데 큰애는 뭐가 억울한지 분해서 우는 거야. 집 나가고 싶다네. 내가 보기엔 우리 집처럼 편안한 집이 있을까, 싶은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나 봐. 심통이 나서 내뱉은 말이긴 하지만 우리 집이 제일 나빠, 라는 말을 얼마 전에도 들었거든.

 

나도 그럴 때가 있었어. 마을에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집은 양옥집에, 형제 수만큼 책상도 있고, 세탁기도 있고, 하교하면 언제나 집에 엄마가 계셨어. 부모님은 교양 있어 보이고, 그 집 아빠는 친구와도 친해 보였어. 우리 집은 그렇지 않았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난 그 애보다 좀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집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주로 그 집에서 놀았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나 학교 운동장에 갔어. 해가 뉘엿뉘엿 지는데 그 친구가 자기 집 이야기를 했어. 아빠가 오랫동안 두 집 살림을 하고, 엄마와는 매일 다투셨다고. 결국 이혼하셨다는 거야. 정말 놀랐어. 완벽해 보이던 가정에 그런 상처가 있었다는 것도, 내가 그 친구의 아픔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도, 그 상처를 내게 담담하게 이야기 한다는 것도 모두 놀라웠어. 내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지만 내가 불행이라 여겼던 건 친구의 이야기에 비해 너무 사소해서 말할 수 없었어. 나는 아이 같고, 친구는 어른처럼 느껴졌어.

 

언젠가 드라마를 보면서, “저 집은 정말 깨끗하다.”고 했더니 언니가 저 집엔 사람이 안 살잖아. 세트니까.” 하더라. 완벽한 집은 없어.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그 사정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양육태도 심리검산가? 검사 제목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 검사 결과 나는 일관성이 높은 반면 칭찬에 인색하다네. 상담 선생님 말로는 한마디로 리액션이 약하대. 그래서 목소리 톤을 높여서 아이들에게 반응해 주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사람마다 기질이 있어서 노력은 할 수 있어도 억지로 하면 지친다면서 일관성 있으면서 리액션이 큰 경우는 드물다는 거야. 반대의 경우도 그렇고. 그게 어머니의 특성이죠, 하는 거야.

 

좋은 양육태도를 다 갖고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겠지만 나는 나라서 다른 사람처럼 되기가 쉽지 않아. 상담 선생님이 그 부분을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진행하니까 한결 마음이 편했어. 나도 그 상담 선생님처럼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어. 아이들도 자라서 사람들의 속내를 듣고, 많은 경험을 하면 아침에 꾸중 듣는 일이 온 마을의 집들과 우리 집을 비교할 만한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되겠지. 우리 집은 우리 집만의 특성이 있다는 것도. 햇살이 거실 가운데까지 들어왔어. 이 햇살이 지금은 아이들 눈에 보이지 않겠지만 나중에라도 자기들이 햇살의 집에 살았다는 걸 알면 좋겠어.

 

 

식사를 끝낸 뒤 어머니와 난 생선이다’ ‘아니다, 오리고기다서로 우기며 사소한 언쟁을 벌였다. 그처럼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대체 무슨 짓이었던지. -최영미, 시대의 우울(창작과 비평사, 1997),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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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5 1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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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1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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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5 1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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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18: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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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7 0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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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8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는 한 달에 한 번 하는 독서모임이 있었어.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책을 선정하고, 그 책에 대해 발제를 해 와. 책은 빨간 머리 앤이었는데 발문 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에 대한 질문이 있었어.

 

처음엔 고등학교 때 저녁 먹고 갔던 낮은 산을 생각했어. 그곳에 앉아 있으면 초록의 잎들이 나를 쓰다듬는 느낌이 들어. 그리고 해 지는 걸 볼 수 있어. 지금은 그런 놀을 보기 힘든데 그때는 매일 볼 수 있었어. 서쪽 하늘을 물들이다 못해 남쪽 하늘까지 퍼지는 붉은 빛을 보며 지는 것의 아름다움을 알았어. 놀과 단풍처럼 아름다울 이유가 없는데 아름다운 것들. 그 빛깔에 어떤 까닭이 있는데 내가 모른다 해도 모르는 채로 좋았어.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내 입에서 나온 장소는 성당 지하실이었어. ‘텅 빈 공간이 떠올랐어. 텅 빈 강의실, 텅 빈 지하실, 텅 빈 강당, 텅 빈 복도......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은 서늘해.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곳. 내가 그곳에 있으면서 그곳이 내 안에 있는 곳. 텅 빈 장소는 내게 그런 곳이야.

 

성당 지하실에 가 봤어? 그곳에 가면 나도 모르게 , 하고 소리를 내. 소리는 조금 울려서 내 목소리가 귀에 들려. 그 소리를 들으며 이름을 불러. 엄마, 라고 부르면 엄마에게, 친구를 부르면 친구에게, 내 이름을 부르면 나에게 이야기를 해. 마치 할 이야기가 있었다는 듯이 소리 내어 말하고 싶어져. 내 안을 떠돌던 소리들이 드디어 나갈 장소를 찾았다는 듯 천천히 그 텅 빈 공간을 걷기 시작해. 내게서 나는 소리인지, 내 밖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를 서늘한 울림이 있어.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해, 라고 말하는 거야. 그러면 목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몸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숱한 사랑해, 라는 말이 숨구멍 사이로 흘러나오고, 그 공간은 사랑해, 라는 말로 가득 차올라.

 

요즘은 그런 공간에 가본 적이 없어. 일부러 찾지도 않았어. 아무도 없는 곳이 아니라도 이제 내 안의 소리는 언제라도 나와 성큼 걸을 수 있게 된 걸까? 사랑해, 라고 말하면 나도 사랑해, 라고 대답하는 가족과 친구가 있어서일까? 그래도 여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 내가 선택한 홀로 있는 시간은 충만한 느낌을 줘. 어쩔 수 없이 혼자인 것과는 달라.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일까?

 

성당 지하실처럼 텅 빈 공간에 가면 지금의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문득 궁금해. 아직도 내 안에 혼자라야 우러나오는 소리가 있을까? 그곳에 서서 기슭아, 하고 너를 부르면 내 안의 소리는 네게 뭐라고 말할까? 고요하고 서늘한 그곳을 생각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행복이 차올랐던 것은, 내가 행복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행복은 그 오랜 세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나탈리 골드버그, 구원으로서의 글쓰기(민음사, 2016),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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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

 

 

기슭아, 뭐가 즐거운지 웃어대는 아이들을 윽박질러 겨우 재워놓고 혼자 맥주를 마셔. 맥주는 술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남편이 냉장고에 넣어둬. 나름의 애교야. 딱 한 캔이 남아 있네. 남편은 제사에 갔어. 증조부 제사.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아 이 제사는 남편만 참석해. 큰집이 경기도라 어머님, 아버님 제사만 가족 모두 가. 보통 때도 남편은 술을 전혀 못해서 집에서는 간혹 혼자 마셔. 아주 조금.

 

우리 처음 술 마신 날 기억해?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고? 그러게. 네가 나한테 밥 사달라고 했는데 내가 술을 사겠다고 했어. 그래서 마셨지. 술집 이름을 잊어버렸네. 맥주를 파는 아주 좁은 지하 술집이었는데. 부부가 함께하는. 사장이 26살이었나? 별 게 다 기억나네.

 

너는 아빠가 장로님이라고 했어. 처음 같이 술을 마시는데 그 말을 했던 것 같아. 장로님 자녀들은 교회에 나가야 한다고. 그때 넌 대구에서는 안 나갔던 것 같아. 네 고향에 가면 교회를 나가고. 지금은 교회 나가?

 

나도 교회에 다닌 적 있어. 5학년 때였는데 어떤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와서 아이들에게 교회에 나가자는 거야. 우리 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었어. 난 안 간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승합차를 가져와서 친구들을 데리고 가버렸어. 놀 사람이 없어서 결국 나도 따라 갔어.

 

그 교회는 개척 교회였고, 교회 선생님은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언니들이었어. 한 언니는 영적인 사람 같이 보였어. 나도 저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 누가 봐도 기도하는 사람처럼 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성경 암송도 하고, 동전을 모아 헌금도 했어. 타고 갔던 승합차를 다시 타고 집에 와야 해서 하루 종일 교회에 있었어. 산기도도 따라 간 적 있었는데 참 이상했어. 왜 막 소리치면서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 나는 바위 위에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거리면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걸 구경했어.

 

크리스마스가 왔어. 고등학생 선생님들이 초등학생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합창을 할 거래. 친구들과 다함께 노래를 부르는데 내 음이 다른 아이들보다 낮대. 저절로 화음을 넣는 것처럼 됐으니 그냥 부르면 되겠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난 그게 몹시 창피하게 느껴져서 교회를 안 나갔어. 신앙심과 아무 상관없이. 정말 하찮은 이유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 때가 있어. 교회를 안 나가는 이유는 오래도록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었어.

 

이따금 그 고등학생 언니가 생각나. 지금도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느꼈던 영적인 얼굴을 하고 있을까? 영적인 얼굴이 어떤 얼굴이냐고? 모르겠어. 느낌이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얼굴보다 음성이었을까?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어. 그렇게 닮고 싶은 사람을 두고 찬송가 음정을 못 맞춰서 교회를 나온 내가 문득 안쓰럽네.

 

벌써 11시가 넘었어. 맥주는 겨우 한 캔이라 벌써 다 마셨어. 술과 교회 이야기가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우리 첫 술자리에서 교회 이야기를 했구나. 아마도 교회가 네 삶의 큰 부분이어서 너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인가 싶어. 시계소리가 커지네. 오늘은 혼자 마신 게 아니라 너와 함께 마신 것 같아. 진짜로 그런 건 아니지만. 양치하고 자야겠어. 기슭아, 잘 자.

 

 

 

낮은 목소리

_황인찬

 

 

성가대에 들어간 것은 중학교 때였다

일요일 오후엔 찬양 연습했다

끌어내리듯 부르는 것이 나의 문제라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무로 된 긴 의자와 거기 울리는 소리가 좋았다

 

말씀을 처음 배운 것은 말을 익히기 전의 일이었다

그것을 배우며

하나님의 목소리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공간이 울고 있었다

 

낮은 곳에 임하시는 소리가 있어

계속

눈앞에서 타오르는 푸른 나무만 바라보았다

 

끌어내리듯 부르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마음이 어려서 신을 믿지 못했다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민음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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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24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두 주님을 열심으로 섬깁니다.

주님은 사랑입니다.

이누아 2019-01-24 14:57   좋아요 0 | URL
두 주님^^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한강, 소년이 온다(창비, 2014), p.85

 

 

허기를 느끼는 것에 치욕을 느껴본 적이 있니? 가족을 잃었을 때 배고프지 않았어. 먹는 게 구차하게 느껴졌어. 그러나 장례가 끝나고, 49재가 끝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까 결국 허기를 느꼈어. 이상했어. 몸은 살고 싶다는 의지 따위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뭘 먹으려고 해. 그게 살아있는 것의 속성일까.

 

소년이 온다에서 80년 광주를 겪은 은숙은 허기에 치욕을 느껴. 그녀는 5년이 지나도 아직 그때 죽은 이들의 장례를 끝내지 못했나 봐. 아픔을 말할 입이 봉해져 진정으로 통곡하지 못한 채 그 시간에 그대로 멈춰 있었던 걸까.

 

록산 게이는 헝거(사이행성, 2018)에서 또 다른 허기에 대해 말해. 그녀의 몸은 200킬로그램에 가까워. 그녀는 어릴 때 강간을 당했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마음이 공허해서였을까? 그녀는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껴. 배고프고, 먹고, 먹은 자신을 혐오했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과거를 지고 다니는 그녀도 허기 앞에서 치욕을 느껴. 허기를 못 참고 정신없이 먹고는 다 토해내기도 하면서. 은수는 그때 죽은 이들을, 록산 게이는 그날의 어린 자신을 매일 마주하고 있는 걸까.

 

지금도 과거가 몸에 새겨져 있는 사람들이 있어. 과거를 데리고 다니며 자신이 짓지 않은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죄책감을 벗으려면 은수도 그때 죽었어야 했을까, 록산 게이도 그날 사라졌어야 했을까. 아니지! 죄책감은 그들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들이 느껴야 하는 거 아닌가.

 

텔레비전을 틀면 뉴스에서 아직도 얼굴만 다른 은수가, 록산 게이가 나와. 이런 일은 늘 있어 왔다는 듯이. 언제쯤 그들이 무거운 과거의 짐을 내려놓고, 맛있게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을까. 죄 지은 자들이 죄책감을 느끼는  세상이 될 때까지는 우리에게도 허기는 치욕이 아닐까.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싶다. 나 자신을 보호하고 싶다. 내 과거는 내 소유이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 과거를 깊은 곳에 묻어두고 그 과거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살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30년이나 흘렀는데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헝거,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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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의 주둥이 부분이 조금 깨어졌어. 엄마는 깨진 그릇은 재수가 없다고 하셔. 오래 전에 남경에서 지냈는데 거긴 흠 있는 그릇이 많았어. 심지어 살짝 깨진 그릇이 재수 있다는 말도 들었어. 똑같이 깨져도 여기서는 재수 없는 일이 중국에 가면 재수가 있는 걸까. 같은 손이지만 인도에서는 왼손으로 악수도, 식사도 안 하잖아. 왼손은 뒤를 씻는 손이니까 위생 때문이었겠지만 나중엔 오른쪽은 신성해지고 왼쪽은 무례해졌지. 어떤 필요 때문에 생겨난 행동이 관습이나 관념이 되기까지 얼마만한 시간이 필요할까?

 

난 결혼하고 일곱 번쯤 이사했어. 한 번은 어머님이 그해 우리 집 이사가 불길하다는 도사의 말 때문에 전전긍긍하다 부적을 주셨어. 부적을 싱크대 아래 붙여 두고 이사를 했어. 별 일 없었어.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다시 이사하는 날, 달력을 봤어. 어머님은 손 없는 날을 고집하셨을 테지만 난 그날을 피했어. 손 없는 날은 이삿짐센터 예약도 어렵고, 가격도 비싸거든. 그렇게 이사를 해도 역시 별 일 없었어.

 

어쩌다 손 없는 날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그것도 인도의 왼손처럼 어떤 이유로 생겨났다 관습처럼 돼 버린 게 아닐까? 행운과 불길을 세기 시작하면 마음은 불안해져. 징크스가 그런 것 같아. 번거로운 동작을 수십 번 반복하는 야구선수를 보면 불안이 그의 몸 안에서 출렁거리는 것처럼 보여.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부모님이 죽는다는 속설 알지? 나는 그 말을 믿고 어렸을 때 빨간색으로 이름을 안 썼어. 어쩌다 빨간색으로 쓰면 놀라서 검정으로 덮어버렸지. 근데 이 이야기의 시작은 진시황 때 황제만이 붉은색으로 이름을 적을 수 있고, 평민이 사용하면 큰 벌을 준 거라네. 2천 년도 더 지나서 이국에서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안 된다고 조심했던 거지.

 

빨간색 하니 빨간 머리 앤이 생각나. 앤이 숲의 도깨비를 상상하고서 자신의 상상 때문에 무서워서 밤에 그 숲을 지나지 못한 거 기억나? 우리가 지어낸 허상이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안에서 두려움에 떠는 건 아닐까?  

 

빨간색으로 이름을 써도 괜찮다는 걸 아는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속설과 편견에 휘둘려. 마음속에선 불안과 두려움이 까만 눈을 반짝이고 있고. 나보다 늘 담담해보였던 너도 그럴 때가 있겠지. 나보다 덜 자주, 옅게 지나가겠지만. 근데 깨진 그릇은 불운일까 행운일까? 깨진 그릇일 뿐이지! 그 외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매순간 알아차리고 싶어.

 

 

 

지나친 상상을 한 것을 후회했다. 자신의 상상이 낳은 요사스러운 괴물들이 여기저기 어두운 그늘에 숨어 싸늘한 뼈뿐인 손을 뻗어 자기들을 만들어낸 여자 아이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루시 모드 몽고메리,ANNE1 만남(동서문화사, 2004),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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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14: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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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16: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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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16: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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