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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가귀감
서산휴정 지음, 박현 옮김 / 바나리비네트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용화선원에서 나온 선가귀감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은 마치 딴 책 같다. 이 책에는 뒤편의 원문을 제외하곤 한자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딱 한 번 한자가 쓰여져 있다. "萬事可涉, 自由自在"이다. 선가귀감 원문에 있는 게 아니라 옮긴 이가 약간의 해설을 단 노둣돌이라는 해제에 적힌 말이다. 한글만 있는데 굵은 글씨로 적혀 있어 인상적이다. 되뇌어본다.
그냥 한편 한편 시 같다. 팔만대장경의 말씀의 요체를 뽑아 둔 어려운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다. 옮긴 이가 문장을 나눠 둔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자연스런 도움말 때문일까? 한글 때문일까? 마음에 걸리지 않고 술술 읽혀진다. 이런 책이 술술 읽혀져서야 되겠냐마는 책은 책이라 술술 읽혀지니 시원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니/ 덧없는 불꽃이 온 세상을 사르노라/ 또 말씀하시니/ 중생들이 피운 고뇌의 불이 사방에서 동시에 타고 있노라/ 그리고 말씀하시니/ 모든 번뇌 도적 되어 사람을 죽이려 엿보고 있노라/ 수도하는 사람아/ 머리에 불이 붙은 양/ 마땅히 스스로 경계하고 깨쳐야 하니라(p.169)". 수행자에게는 물론이고 우리의 삶에서도 유용한 말씀. 나를 봐도, 세상을 봐도 불타는 집 같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번뇌도, 헐떡이는 지구의 숨결도, 울부짖는 이웃들도 모두 내 머리에 붙은 불 마냥 바짝 깨어 바라볼 수 있다면....
"가난한 자가 구걸하러 오거든/ 제 능력에 맞게 베풀라/ 한 몸인 양 불쌍하게 여기는 일/ 그게 바로 진정한 보시이니라(p.136)"하는 서산대사 말씀에 옮겨 푼 이가 하는 말,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거든 먼저 나를 아끼고 사랑하라. 스스로를 사랑하려면, 남을 사랑하라. 남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나니, 이것은 곧 우주와의 약속이요 삶의 바탕이다(p.138)" 한 몸인 양 여긴다면 옮긴 이의 말처럼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속이 아픈데 손과 입이 약을 가져다 먹여주지 않으면 그 손과 입도 속이 죽을 때 함께 죽을 것이다.
이 인용이 책의 핵심이라는 건 아니다. 그저 눈에 띄는 대로 중얼거린 거다. 그럼 이 책은? 전체적으로 수행자의 마음과 생활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다. 너무 쉽게도, 너무 어렵게도 여기지 말고 곁에 두고 가만가만 볼 요량이다. 그래, 萬事可涉, 自由自在!! 만 가지 일 하나하나에 매달릴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자유자재한 마음 한 가닥이면 만 가지 일이 저절로 건너질 것인데...만 가지 일에 뺏긴 마음에게 자유자재로 오라고 손짓하는 맑은 바람 같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