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일 년이 지나지 않은 한 장면을 기억한다. 그리고 네살, 다섯 살..기억! 넘쳐났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던 기억들...그런데 이제 기억이 안 난다. 갑자기 느껴진다. 기억. 기억만 하면 영화필름처럼 쫘르르 쏟아지던 것들이 사진 한 쪼가리처럼 겨우 기억이 나. 그것도 어릴 적 기억이 아니라 중고등학교나 대학 때 기억...아니 직장 때 기억도 그러네. 왜 이러지? 몇몇 친구들은 내 말을 믿지 못할 것이다. 내 기억...무섭다고 했다. 내 기억...

내가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다. 내 뒤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다가, 울다가, 웃던 아이...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이해해야 했던, 잊지 못해 맺혔던 어떤 아픔들을 안고 있던 아이,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말과 행위를 했던 어리던 그 아이가 사라져 가는 느낌이다. 어디로 갔을까? 그 아이. 언뜻 일어나는 기억은 꿈인지 기억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이미지만 조금씩 남아 있다.

이미지...먼 옛날도 아니고 그저 10여 년 전, 그 아인 늪에 빠져 있었다. 늪에서 나오려고 울고 불고 마시고 또 마셨다. 겨우 조금 몸을 일으키면 몸에 묻은 진흙들...묻을까 싶어 손내밀어 당겨 달라고 하지 못했다. 아니 당겨 달라고 했지만 그 아인 너무 무거웠다. 지금 그 진흙들...그 진흙들 떨쳐내라고 하늘이 나를 몇 년을 앓게 하셨을까? 이제 그 진흙...바짝 말라 털어 내기만 하면 햇살 아래 먼지 되어 날린다. 그 먼지들과 함께 기억들이 날아간다. 저기 그 아이 날아가 버린다. 안녕.

10년만에 길에서 친구를 만난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든다. 그 친구, 가만히 서 있다. 무안해진 손, 내려진다. 10년 전에 나는 무슨 짓을 했을까? 무슨 짓을 했길래 10년이나 지났는데 내 인사를 받지 못하나, 저 친구. 아니,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가던 길을 가세요. 죄송합니다. 나는 기억이 잘 나지가 않아요. 이미지만 남아 있어서...내가 알던 친구가  나무 아래 당신처럼 서 있었거든요. 낯선 사람이라도 손 한번 흔들면 안 되나요? 당신을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안녕히 가세요. 아프지 마세요. 이 비가 그치면 겨울이 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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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10-21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쓸해요

호랑녀 2005-10-21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무섭고 쓸쓸해요...ㅜㅜ

그래두 기념으로

103300


왈로 2005-10-21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간다. 친구가 모른 척 하던? 10년 전에 무슨 짓을 해서가 아니라 10년 동안 아무 짓도 안해서 모른 척 한거 아냐?

이누아 2005-10-21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쓸쓸하기도 하지만 좀 홀가분하기도 해요.
호랑녀님/님이 기념사진을 찍어두시지 않았다면 제 서재에 3300번째 들어오셨다는 걸 금방 잊어버렸겠죠?
왈로야/ 그런 거라면 좀 억울한걸...

비로그인 2005-10-2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우물에 빠졌어요. 어른들이 꺼내 들춰업고 뛰는 걸 봤는데 죽어가고 있었어요.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 그 아이가 입고 있었던 빨간 털실로 짠 스웨터가 너무 강렬해서..제가 태어난 지 다섯 해, 여섯 해.. 갑자기 어린 시절 그 풍경과 이누아님의 아이와 진흙과 늪이 오버랩되는군요. 비가 오네요..저두 어제 겨울을 생각했어요. 이번 겨울은 메주 뜨는 방처럼 어둑어둑하고 쿰쿰한 분위기가 될 것만 같은 느낌..

서재질 할 시간이 충분치 않네요..

이누아 2005-10-2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의 댓글을 보니 제 글이 무섭고 쓸쓸한 게 맞는 모양이군요. 별 생각 없이 혼잣말을 한건데...이번 겨울엔 환한 눈이 쏟아져 님의 집을 비췄으면 좋겠어요. 창문을 열면 찬 바람과 눈이 조금 들어오고, 그것들이 어둑하고 쿰쿰한 방 안 공기를 가져가 버리겠죠?

비로그인 2005-10-24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우아..그 느낌을 아시는군요. 글쵸. 겨울 시골집 방안에선 별 걸 다 쟁이고 키웠거든요. 커다란 종이상자 안에 노랑 병아리도 있었구요, 작대기에 메주도 주렁주렁 매달아놓구요. 게다 밤늦게까지 민화투도 치구요, 그러다 오줌 마려 마루로 나갔을 때 토방 아래로 가시바늘같은 서린 푸른 눈발이 눈썹까지 휙 들이치면 순간, 쨍~ 얼얼하당게요. 뜨끈한 군불이 지져진 방 안으로 다시 들어설 때 겨울바람이 몰려가면 그땐 정말 방안이 쎤~해지는 분위기..흐..이누아님, 아시네..역시 우리 세대, 우리 정서네..

이누아 2005-10-24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갓집에 가면 따로 된 작은 방이 있는데 저와 동갑인 외사촌이 있어서 걔랑 나랑 그 방에서 잤어요. 군불 때는 방이라 감자도 구워 먹고...그 방에 메주가 늘 달려 있었거든요. 화장실 가는 건 거의 전쟁수준이에요. 비 오는 날, 귀신 얘기하다가 화장실 가려면 후레쉬 들고, 후레쉬 불빛에 놀라잖아요. 그 캄캄한 밤을 만나고 싶어요.

비로그인 2005-10-24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와 시골은 엄연히 어둠의 농도가, 아니 질감이 달라요.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건지, 믿겨지지 않을만큼 까매요. 아니, 쌔카매요. 별두 아주 조롱조롱하게 웃고 말에요. (희부염한 입김 새로 바라보는 겨울하늘 오리온이나 북두칠성은 정말 우아하고 고혹적이에요..그죠?)암튼 시골의 어둠은 손으로 휘저으면 무쉰 진흙처럼 물컹하게 만져질 거 같당게요. 으흐..이누아님, 귀신 이야기..거즘 심장마비 수준이죠. 전 한 켠에 재가 쌓여 있는 시골변소가 넘 무서워요. 그 재에서 까만 머리가 천천히 올라올 거 같은..크흣. 아주 공포의 대상이랑께요..

나 오늘 오늘밤은 어둠이 무서워요~무셔버~

이누아 2005-10-25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산에서 지난 시간이 좀 돼요. 예전에 영천 사찰에 잠시 있을 때 달빛이 그렇게 환한지 처음 알았어요. 달빛 없는 그믐이면 정말 온세상이 캄캄해요. 그 그믐날 가만히 앉아 어둠에 익숙해지는 기분도 괜찮아요. 캄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때...편안해요.

2005-10-25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5-10-25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42속삭이신 님>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

2005-10-25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5-10-25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43속삭이신 님>매일 귀청소하면서 엄청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은 아마 신랑책이었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제 눈에 최근에 띄여서 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책이 좀 낡았습니다.^^;;

2005-10-26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5-10-27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11속삭이신 님> 안 아까버요. 막 드시랑께요. 봄에 또 보낸당께.
말씀대로 어려워 보이는 이 책은 좀 천-천-히 볼께요. 책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무거워지려고 해서...제목은 근사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