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돌님의 "서울 이미지"(http://www.aladin.co.kr/blog/mypaper/744125)를 보면서 예전에 쓴 일기가 생각이 나서 꺼내 읽었다. 그 노트 앞에는 서울일기라는 이름도 붙어 있다. 거기에 있는 글을 보고 웃는다. 지금 읽어보면 좀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고치지 않는다. 몇 개 중에 97년 3월 22일 토요일에 쓴 것을 옮겨본다. 재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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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알 듯

 

사람들, 사람들, 이 밤에도 마로니에 공원엔

아, 사람들. 들. 들, 사람의 들.

소주 반병을 만두 라면과 함께 마시고

혜화역에서 4호선을 타고

사당역에서 호흡을 삼킬 듯한 뜀박질로

마지막 2호선 전철, 밤 11시 45분 차

사람들 틈에서 탔지.

아, 그 틈. 틈, 들의 틈에서.

봉천(奉天)6동, 말끔히 씻고 방에 앉으니

죽은 내 아버지가 전화기를 쳐다 본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늦은 시간에도 전화를 하곤 했지

고향으로, 친구에게로

나 살아있다, 나 살아있다, 전하려는 듯

이제는 조금은 알 듯

알 듯

내 아버지의 늦은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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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을 든 여자

 

목련꽃을 든 여자가 남자와 함께 낙성대역쪽으로 걸어간다

여자는 목련꽃의 향을 맡으려는 듯 코를 갖다 대고 있다

지금은 전철이 다 끊어진 시간

저들도 그것을 아는지 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비켜간다

저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꺾어진 목련은 어디에 향을 남길까

저 꽃잎은 내일도 저리 하얄까

저 여자는 내일도 꽃을 들고 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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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27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누아님! 정녕 이 시가! 이 아름다운 시가, 오롯이 이누아님의 시란 말입니꽈? 오..'이제는 알 듯'이란 시, 넘 좋아요.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또 한편으론 현실적이고 때론 몽환적인..우오우오우오, 쫙쫙쫙!!

이누아 2005-09-27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래 전에 쓴 거죠? 시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냥 일기죠. 3월 22일 일기를 택한 이유는 그날 한 네 가지 이야기를 한꺼번에 썼는데 그때 써놓고 오빠에게 읽어줬더니 전 "이제는 알 듯"이 좋은데 오빠는 "목련꽃을 든 여자"가 좋다고 했던 기억이 나서 이 두 개를 골랐어요. 꿈보다 해몽이라고...님의 박수, 고맙습니다.

big_tree73 2005-09-27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일기장에다 베껴 놔야지~~~~ 히히~ 안녕~ 이누아~

이누아 2005-09-27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나무야.

니르바나 2005-09-28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로 꺼내 읽은 이누아님 일기의 내용에 감동의 울림이 온몸으로 잔잔히 퍼져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왈로 2005-09-28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목련꽃에 한 표!
아직 내겐... 넘기 힘든 아버지라는 벽 때문에....
또... 아직도 난 불안한 젊음인것 같아서...

이누아 2005-09-29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올렸는데 올려놓고 보니 97년이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년도 안 된 때네요. 제가 뭘 하기 전에 늘 먼저 와 앉아 계신 듯했지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제 10년이 다 되어 가네요.

왈로야, 학교 때 사형제도에 대해 위의 글처럼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너는 그게 내가 쓴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었다. 기억 안 나지? 기억나게 짜잔하고 그 글을 보여 주고 싶다만 아쉽게도 대학 때 썼던 글들은 다 사라지고 없다. 어쨌든 그게 내가 쓴 글 중에 유일하게 뭘 주장하는 글이었는데...아마 그때 너는 의견이 분명한 걸 좋아했나봐. 오,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