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정견을 얻으면, 마음을 윤회로 이끄는 온갖 미혹이 떠오를지라도 당신은 하늘처럼 요지부동할 것이다.
하늘은 무지개가 나타난다고 특별히 우쭐거리지도 않으며, 구름이 나타난다고 특별히 실망하지도 않는다.
깊은 충족감으로 가득할 뿐이다.
윤회와 열반의 허울을 보게 될지라도 당신은 그저 속으로 빙그레 웃을 뿐이다.
정견이 정립되면 당신은 항상 흥겹고 내면의 작은 미소가 끊이지 않게 된다.
[티베트의 지혜], p.278
==============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정말 정견이라는 걸 얻으면 미소가 끊이지 않을까? 외부의 고통과 고통받는 이에 대한 연민 속에서도 충족감으로 가득할 수 있을까? 아마 양립할 수 있는 어떤 단계가 있긴 있겠지?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오늘은 가르침과 좀 멀어져 있나 보다.
언젠가 서당 선생님께서 한의사들과 이야기를 하셨다고. 그때 그 한의사 제자들이 모두들 몇 억 짜리 빌딩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선생님께선 실현가능성도 없는 그런 얘기를 왜 하고 있냐고 이상하게 생각하셨다고.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선생님, 아니에요. 선생님이 매일 도,도, 도통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 아마 그분들이 선생님처럼 생각했을 거예요. 선생님은 실현 가능성도 없는 얘기를 하신다고. 그 사람들은 몇 억 짜리 빌딩이 당장은 아니라도 실현 가능성이 있어서 하는 말이에요. 선생님은 상상이 안 되시죠? 몇 억짜리 빌딩 말이에요. 그분들도 상상이 안 되는 거예요. 도나 깨달음 같은 상태가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정말이가? 하셨다.
나는 특별히 우쭐거리는 건 모르겠지만 특별히 실망을 한다. 안 하려고 하는데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집착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왜 그런 걸까? 나의 견해가 집착에 흠집만 나지 않는다면 정견을 갖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고,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런데도 왜 이렇게 간단한 일이 내게는 쉽게, 당장 일어나지 않고 태풍이 오고, 나무가 쓰러지고, 심하면 지붕까지 날아가는가 말이다. 다시 소갈 린포체의 말을 떠올린다.
"명상의 고요한 즐거움과 드넓은 초연함을 어떻게 해야 일상 생활에 스며들게 할 수 있을까? 규칙적인 수행 이외에 어떤 대안도 없다."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 몇 억 짜리 빌딩에 목숨 거는 것보다 흥겹고 작은 미소에 목숨을 걸자, 내게는 그게 더 빠르고 실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거니까! 아자 아자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