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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드무비 > [퍼온글] '거짓말'의 작가 노희경과 표민수 PD의 대화

<표민수PD,노희경작가와의 대화 >


" 사랑은 있죠? " " 그럼요 , 사랑은 있어요 "

“세상 사람 모두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우리도 한번쯤은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그게 정말 바보 같은 사랑이라 해도….”(<바보 같은 사랑>中 상우의 마지막 내레이션)

분명히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허준>과 맞서기엔 그들은 너무나 바보같이 약했는지도 모르겠다. 젊은 아이들은 밀고당기는 사랑이야기도 아니고 공장구석에 피어난 질퍽한 30대의 불륜이야기가 뭐 그리 궁금할까? 잘나고 뻔쩍거리는 것 투성이 세상에 지지리도 못나 궁상맞은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듣기 좋았으랴. 지난 4월24일 첫 방송된 <바보 같은 사랑>은 6월27일 그 마지막 사랑의 인사를 고했다. 첫날 애국가보다 낮은 시청률을 보고 원망하며 돌아설 수도 있었을 텐데 꾸준히 그들만의 사랑을 만들어갔던 두 사람. 첫사랑이 아님에도 언제나 첫사랑처럼 서로에게 ‘빛’ 같고 ‘소금’ 같은 존재. 그들이 만들어온 사랑이야기. 짝사랑 혹은 안쓰런 연민.

“넌 누굴 사랑하는 게 겁나지, 사랑이 널 바보로 만들까봐. 아서라. 세상은 바보같애. 바보같이 사는 게 옳아. 재호야.”(<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中)






표민수/ 정말 이번처럼 결말을 오래 고심했던 적이 없었을 거예요, 그죠? 다른 작품 할 때는 시놉시스 단계에서 이미 결론을 내고 갔었는데, 이번엔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어요. 시작할 때 노희경 작가는 옥희(배종옥), 나는 영숙이(방은진)에게 손을 들어줬는데 중반 이후부터는 우리 둘 다 옥희에게 상우(이재룡)를 보내는 식으로 이야기가 되어 나갔어요. 누구도 상처받지 않기를, 모두 ‘무사하길’ 바랐는데 결국 상처를 주게 되네요.
노희경/ 사실 상우가 영숙이에게 갈 이유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영숙이가 임신을 한 상태에서 상우가 영숙일 택한다면 다른 만 가지 이유가 ‘임신’이라는 한 가지 사실에 묻혀 보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통속적 결말을 피하려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윤리·도덕적으로 그래야지 하는 것에 대한 반항도 아니였어요. 사실 우리 둘이 얼마나 ‘보수적’인 인간들인데요. (웃음) 그저 ‘사랑’에 손을 들어주고 싶었어요.


시작

표/ <아직은 사랑할 시간> <거짓말> <슬픈 유혹> 이번 <바보 같은 사랑>까지 4번이나 작품을 같이 했네요. <엄마는 치자꽃>에서 같이 일했던 나문희씨 소개로 처음 봤는데, 그게 언제지? 96년 6월쯤 일거예요. 우리 둘 다 술은 잘 못해서 처음 본 날 차만 마시면서 이야기 했는데 한 6시간 정도를 앉아서 줄곧 쉬지 않고 얘기만 했었죠?
노/ 처음 표 감독 볼 때 깔끔하고 왠지 반지르르한 게 별로 내 과는 아니다 싶었는데 저렇게 생긴 얼굴에 촌스런 경상도 사투리가 튀어나오니까 ‘푹’ 웃음이 나더라구요. 우린 생각하는 게 똑같지 않아요? 요모조모 따지는 말투도 똑같고 고집센 것도 같구요, 한번은 표 감독 부인이 ‘어쩜 둘이 그렇게 비슷하냐’라는 말을 하더라구요. 같이 사는 마누라가 그런 말을 한다면 그건 정말 닮은 걸 거예요. 서로 안주하지 않게 채찍이 되어주고… 표 감독이야 늘 감동이지, 뭐.
표/ 자라온 환경이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인간을 보는 눈이 비슷해요. <거짓말> 찍을 때쯤 이었나? KBS 건너편 공원에 앉아서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 작품 이야기 하다보니 어느새 동이 훤이 트더라구요. 이야기 하는 중에 다음 작품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와요. ‘주인공을 누구누구로 가자’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은 뭘까, 사랑은 뭘까’ 같은 식의 이야기다보니 끝이 있나요. 평생해도 모자랄 이야기지.


거짓말 vs 바보같은 사랑

노/ <거짓말>이 ‘수채화’ 같았다면 <바보 같은 사랑>은 ‘화투짝’ 같아요. 그래서 <바보 같은 사랑>이 더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수채화는 그대로 충분히 아름답지만 빨강 파랑 조잡한 ‘화투짝’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수채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그래도 ‘화투짝’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타당성을 부여해야 하니까.
표/ 잘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딘가 모자라고 덜렁대고 조금은 악랄한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게 만드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울까.
노/ 사실 <거짓말> 할 때는 사람들이 대사가 너무 어렵다는 그런 말을 하면 ‘알아 들을 사람만 알아 들으라 그래’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그게 안 되요. 가령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라는 말을 하면 이 사람들은 ‘뭐? 사랑이란 사람이 교통사고를 냈데?’ 하고 물을지도 모르거든요. 순간순간 사랑의 정의니 멋진 말들을 쓰려는 충동에 사로잡히곤 하지만 ‘밥 먹었니’ 같은 말에도 가슴이 아플 만큼, 어떻게 일상용어를 가지고도 짠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제일 걱정이었어요.
표/ 그래서 <바보 같은 사랑>에서는 ‘사랑한다’라는 말도 얼마나 아꼈게요. 참 이상하죠? 상황은 더 편안할 수 있는데 말 한번 꺼내는 건 더 성스러워지는 거.
노/ 대사를 최대한 아끼면서 배우와 감독을 믿었어요. 대사의 힘보다는 플롯에, 상황에 의해 이끌어 나가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표/ <거짓말>은 그래도 여유있는 사람들이었잖아요. 하지만 <바보 같은 사랑>의 배경은 철저히 대치되죠. ‘빡빡한’ 시장과 공장에 어떤 ‘여백’을 줄 수 있을까, 그게 제일 고민이었어요. 결국 옥희네 넓은 마당이나 상우집 앞의 긴 계단 또 음악 같은 것에서 그런 여백을 살렸죠. <거짓말>에서는 고급스런 첼로나 현악기를 주로 썼는데 이번엔 단순하지만 건반과 건반 사이의 여백이 느껴지는 피아노를 주로 썼어요.
노/ <거짓말>의 주인공들은 정말 모두 똑똑했던 것 같아, ‘너 이렇게 생각하지? 난 그걸 알아’ 식으로. 은수(유호정)가 스스로에게 ‘은수야, 너는 강해’라고 읊조리는 등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시켜야 할 만큼 우리는 너무나도 주관적이었죠. 극중 인물에 우리 스스로가 빠져 있었던 거죠. 표 감독에게서 준희(이성재)를 많이 따오기도 했고 나도 ‘내가 성우(배종옥)라면, 은수라면 어떡할까?’ 하며 끊임없이 자문하기도 했어요.
표/ 하지만 <바보 같은 사랑>은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했어요. 주변사람들조차 그들의 사랑에 개입하거나 편을 들지 않거든요. 그나마 우방인 미숙이(박원숙)조차 ‘정신 똑바로 차려’라는 말 이상의 개입이 없어요.
노/ ‘바보 같은 사랑’이란 마을에 이런 사람들이 산다고 생각하자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며 글을 썼어요. <거짓말>은 내가 다가가면서 썼는데 <바보 같은 사랑> 속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충돌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통에 그걸 쫓아가면서 쓰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불륜

표/ 그러고보니 우리가 만든 작품이 다 윤리적으로 벗어난 작품이긴 해요. <아직은 사랑할 시간>은 AIDS 환자 이야기였고, <거짓말>도 유부남과의 사랑이었고, <슬픈 유혹>은 동성애, <바보 같은 사랑>도 불륜, 사실 선정적이라는 말도, 불륜을 포장했다는 비난도 들어요. 하지만 그 윤리라는 것이 사회적인 잣대가 아닌가? 사회적 윤리는 중요하게 여기면서 개인의 마음속 윤리가 깨어지는 건, 마음의 불륜을 저지르는 건 왜 쉽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노/ 이제는 우리가 개인의 생각에 대해 읽어줘야 할 때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루키가 ‘당신은 왜 멜로만 쓰느냐’는 질문에 ‘한 개인이 사회를 대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는데, 전 그 말에 동의하거든요. 과거가 노동자라는 ‘집단’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젠 옥희나 상우 같은 한 개인의 ‘노동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닌가요?
표/ 이 세상을 멸망시킬 방법은 원자폭탄 몇개 떨어뜨리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더 쉽게 생각하면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은 끝나는 게 아닐까? 개인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데올로기가 끝난 시대에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개인의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윤리를 조금 흔들더라도 사람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서 그들도 ‘행복 할’ 이유를 찾아주는 것이 좋아요.


연민과 동정

표/ <거짓말>에서 준희는 성우를 왜 사랑하게 됐는냐는 물음에 ‘선밸 보면 내마음이 참 아퍼요’라고 말하고 <바보 같은 사랑>에서 상우는 옥희의 사랑 한번 못 받고 주눅든 모습에서 감정이 싹 트죠. <슬픈 유혹>에서 준영(주진모)은 사회에서 이제 퇴물 취급 받아가는 40대 문기(김갑수)의 처진 어깨를 사랑하구요. 물론 모든 동정이 다 사랑은 아니지만 상대편을 염려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사랑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노/ ‘밥 먹었는지’ ‘아프진 않는지’가 걱정되는 마음, 영숙이가 리어카를 맡기고 터벅터벅 걷는 뒷모습에서 느끼는 감정만큼 절실한 게 있을까? 그냥 바라는 것없이 해주고 싶은 마음 그게 사랑 같아요.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이 헤어지면서 ‘너한테 할 만큼 다했다’라고 하더라구요, 그순간 나는 그 사람이 너무 싫어졌어요. 아, 이 사람은 자신이 해준 것만 기억하는구나. 사랑에서 해준 것만 기억하면 함정에 빠지게 되거든요. 받은 것만 기억하면 사랑이 얼마나 행복할까.


나이

표/ 난 나이든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거짓말>에서 영희(윤여정)가 이런 말을 해요. ‘사람이 늙는다는 거 참 불쾌하고 서글픈 일이다…, 얼굴에 진 주름이 서글픈 게 아니라, 이왕 늙을 거면 몸따라 마음도 늙지… 마음은 청춘인데 몸만 늙는 게 서글퍼. 엄마 나이, 쉰둘이다. 그런데 오늘 그 오빨 보는 순간 내가 꼭 열몇살 같더라. 그때 그 나이에 가졌던 꿈들, 그 생기발랄했던 모습들 호기심, 설렘 작지만 내깐엔 아팠던 기억들… 왜 그리 또렸한지….’ 사실 우리 나이 들어도 똑같이 무모하고 질투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할까봐서, 사랑이 또 찾아올까봐서 두려워하는 거 같아요, 우리가 만드는 드라마에서는 그게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어요.
노/ 요즘 <당신 때문에>라는 드라마 보면서 정말 느끼는 게 많아요. 부모에게 자식만으로 위로가 안 되는 부분이 있구나, 내 어머니가 사랑 때문에 나처럼 흔들리고 나처럼 아파할 수 있구나. 하는 것들 말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드라마들이 10대, 20대의 사랑이야기만 하고 있어서 그 나이가 아니면 사랑이란 건 못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게 참 안타까워요.


공짜 글 , 공짜 TV

노/ 책 내자 하는 제안을 많이 받았었는데 시간이 없어요. 세상엔 소리내서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외치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그 사람들 이야기를 쓰기도 이렇게 빠듯한데 말이죠. 그리고 텔레비전은 공짜잖아요, 전 ‘공짜글’이 좋아요.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 사실 아직까진 돈 생각해서 딴 작업하는 건 못하겠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바보 같다는 소릴 듣나?
표/ 아니, 사실 무슨 일이든 사사로운 욕심이란 게 생기면 바라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노/ 글을 쓰리라 생각한 순간부터, 드라마란 걸 쓰겠다 생각한 순간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요. 끊임없이 사람을 대변해야되는구나, 우리의 관점으로 누군가를 이야기에 다룰 수 있고 없고를 선택할 권리가 없구나, 누구를 손가락질하는 입장이 아니라,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설 수 밖에 없구나. 영원한 대변자가 이 직업이 가지는 멍에인 것 같아요.
표/ 참 ‘대변자’란 말이 좋은 것 같아요. 감독이란 직업은 ‘군림’하는 것이라는 오해가 있는데 사실 끝없이 귀 기울여 줘야 하고 대신 말해줘야 하는 직업이죠.


사랑은 있다

표/ 인물과 상황에 따른 많은 변주가 있지만 결국 우리가 그려내고 싶은 건 ‘사랑’인 것 같아요. 모든 문학작품에서, 모든 인간관계에서 결국 ‘사랑’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노/ 김정수 선생님이 얼마 전에 ‘사랑은 상대를 위해 죽어 줄 수 있는 힘이다’라는 말을 하셨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사랑’이야말로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에요. 그걸 믿어요. 그런데 표 감독님, 사랑은 있죠?
표/ 그럼요, 사랑은 있어요. 이들이 구상하고 있는 다음 작품은 인간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 폭력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함에도 안쓰럽게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라고 한다. <슬픈 유혹> 때 였던가, 두 사람한테 함께 공부해나가는, 사이좋은 ‘학우’ 같다는 말을 했더니 그 말이 듣기 좋다고 했다. 부디 한 작품 한 작품 인간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는 이들의 노력이 ‘짝사랑’으로 남지 않기를, 이들의 바보 같은 사랑이 기다림으로 그치지 않고 만남으로 이어지기를.

“어차피 짝사랑이란 없는 거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떻게든 그 마음이 전해지기 마련이지.”(<내가 사는 이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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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노부후사 > [퍼온글] [퍼온글]영어만 잘하면 다인가?

ㅋㅋㅋ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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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어공부를 따로 한다는 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기회주의를 뜻하던 시대에 대학을 다녔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 말고는 영어를 잘 못한다. 거의 벙어리, 귀머거리 수준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비록 그것 때문에 불편한 적은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이 부끄럽다거나 무능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영어만은 아니다. 10여년 전에 우연한 기회로 베이징에서 열린 로자 룩셈부르크 대회에 발표자로 참석할 일이 있었다. 발표문의 작성과 발표는 모두 독일어로 한다고 했다. 독일어 역시 읽는 것 말고는 해본 적이 없었기에 영어보다 상태는 더 처참했다. 중국어 통역이 있었지만, 그건 거의 외계인의 언어였다. 하지만 아마도 다음번인가에 이 난에 칼럼을 쓸 친구 덕분에 논문을 독일어 번역본으로 제출할 수 있었고, 발표문은 그 번역본을 토대로 대강 편집과 교열을 통해서 만들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주제와 목차만 보면 대략 알 만한 내용의 글과 달리 로자의 사상을 푸코와 네그리, 발리바르 같은 이질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뒤섞어 해석해서였는지, 유달리 많은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걸 내가 무슨 수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가! 중국어 통역을 재통역해주겠다던 후배도 있었지만, 일단 중국어 통역이 거의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고, 그 친구 역시 능숙하진 않아서, 나는 질문자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미안한 웃음으로.

이런 사태에 대해 사회를 보던 네덜란드의 한 교수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도 못하는 주제에 이런 델 왜 오나? 한심한 넘!” 아마도 이런 말을 속으로 되뇌고 있었을 것이다. 순간 미안한 마음은 사라지고 열이 치받았다. “씨X, 지는 한국어 기역자도 모르면서….” 나는 독일어를 읽거나 써도 욕을 먹고, 지는 한국어 한자도 모르면서 뻔뻔스레 남을 욕하고 있지 않은가! 이 비대칭성, 그것은 언어와 겹쳐진 권력, 제국주의적 지배의 산물일 뿐이지….

그 ‘방송사고’ 와중에 옆에 앉아 있던 학회의 회장은 나에게 “이 논문이 이번 대회에 제출된 가장 훌륭한 논문으로 평가되었다”며 말해주었다. 마지막 날 저녁 ‘파티’에서 독일의 늙은 교수 한 사람이 웃으며 다가와 나에게 논문이 재미있었다면서 내년에 유럽에서 엥겔스의 사상에 대한 심포지엄을 할 건데, 참석해줄 수 있겠냐고 말했다. 덕분에 오기로 버티던 마음이 자존심을 찾았다. “그래, 독일어가 문제가 아니야! 독일어 잘하는 넘들이야, 독일 가면 길거리에 흘러넘치잖아!”

그런데 최근에 송년모임에 갔다가 서울대 사회대학에서 교수채용시 영어 발표를 의무화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고려대에선 한국학을 하는 사람조차 영어 발표를 해야 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영어 가르칠 사람을 뽑는 건가? 그런 거라면 미국의 거지들이 더 잘하잖아! 게다가 그런 걸 일종의 ‘엘리트주의’라고 생각한다는 걸 듣고는 어이없어 코웃음이 나왔다. “영어 잘한다고 엘리트 될 거면 미국이나 영국은 엘리트 천지겠네! 그래서 그들이 세계를 지배하나보지?”

솔직히 말해 영어 실력 말고는 발표자의 ‘내공’을 알아볼 능력도, 그럴 의사도 없는 사람들, 유학 가서 배운 거라곤 영어밖에 없는 사람들, 지금도 할 줄 아는 거라곤 영어밖에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한국의 ‘잘 나가는 대학’을 이처럼 처참하게 만들고 있는 거 아닐까? 중등 학생 시절에는 세계 2, 3위를 다투던 아이들, 거기서도 잘한다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영어 좋아하는 신자유주의식 평가기준으로 보아도 100위, 200위를 넘는 열등생으로 만들어놓는 게 한국의 ‘잘 나가는 대학’들 아니신가!

검은 피부를 희게 만들고 싶다는 열망에 가득 찬, 백인보다 더 백인 같은 흑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들과 달리 저 본토의 대학들은 ‘영어 발표능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한국의 대학교수들이 ‘외면’한 우리 연구실의 고미숙 선생- 그 역시 나만큼이나 영어를 못한다!- 은 지금 코넬대학에서 한국어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게다가 하버드와 시카고대학 등에서 강연요청이 이어져서, 예정되어 있던 귀국일정이 계속 연기되고 있다. 다들 걱정하고 있다. “이러다가 저 양반 미국 대학에 덜컥 눌러앉게 되는 건 아냐?” 반면 지난달 미국에서 한국학 대회에 참석했던, 유학간 후배들은 미국의 한국학자들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전해준다. “그들이 잘하는 건 영어밖에 없더군요.”

영어, 잘하면 좋지! 영어뿐인가? 불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 어떤 것도 잘하면 좋지! 그러나 그것으로 대학교수의 지적 능력을 혹은 사람들의 능력 전체를 재고 확인하려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으로 세상을 재는 어설픈 애꾸눈 개구리의 세계관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진경/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 출처: 씨네21 [483호]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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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쎈연필 > [퍼온글] 진중권 - 김훈의 우익삼락

김훈의 우익삼락(右翼三樂)

: 43 : 4

최근에 소설가 김훈이 재미있는 얘기를 한 모양이다. 나는 그의 그 유명한 소설을 아직 안 읽었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공적인 것으로, 박정희 시절의 이순신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시대착오적 리바이벌에 이미 충분히 질려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인 것으로, 이순신을 사무라이 삼아버리는 어설픈 일본 우익 미학의 촌스러움이 내 미감을 적잖이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김훈은 미시마 유키오와 달리 사무라이 미학으로 비장하기에는 너무 귀여운 사람이다. 어쨌든 김훈은 그 ‘꽈’가 아니다.

노무현과 이순신
소설 ‘칼의 노래’
/경향신문 자료사진
사실 <칼의 노래>가 베스트셀러가 된 데에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 2001년에 그 책이 나왔을 때만 해도 그렇게 요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어떤 정치적 사건과 관련이 있다.
김훈이 그토록 싫어하는 386 세대의 두목이 언젠가 국회에서 탄핵 먹고 잠시 청와대에 들어앉아서 근신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직무를 정지당한 그 황건적 두목이 정신수양 차원에서 읽고 있다며 공개한 책의 목록에 우연히 <칼의 노래>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예수를 닮기를 원하듯, 노짱을 믿는 사람들은 노짱을 닮기를 열망한다. 이런 것을 전문용어로 ‘미메시스’라 하는데, 내가 전공하는 미학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기도 하다.
<칼의 노래>가 나온 지 2년 후에 갑자기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데에는 황건적들의 이 예술적 습성이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안다. 덕분에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방송에 소개가 되기도 하고, 최근에는 김훈이 “아동극”이라 평한 그 드라마를 낳기도 했다.

우익일락

김훈에게는 이게 한편으로는 반가웠던 모양이다. 김훈의 말대로 “우익에겐 세 가지 즐거움(右翼三樂)이 있어. 세금 왕창 내고, 아들 최전방으로 보내고, 질서를 지키고.” 책이 많이 팔리면 인세를 많이 받고, 인세를 많이 받으면 “세금을 왕창” 낼 수 있다. 이로써 우익일락(一樂)이 저절로 해결된다.
有錢而自進納稅면 不亦樂乎아. 돈이 생겨도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에 “세금 왕창” 낼 수 있기에 즐거운 것이 우익의 미덕. 거기에 비하면 담배 한 값에 500원 더 받는다고 절필 선언하는 일부 문인들의 좌익적 심성은 얼마나 옹색한가?

다른 한편 이게 부담스럽기도 했을 게다. 우익 김훈이 하필 국가에 “왕창” 공헌을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게 바로 황건적 두목, 그 휘하의 386 장수들, 그들을 따르는 노란 졸병들이 아닌가.
김훈이 종종 연출하는 우익 낭만주의적 위악은 그가 가진 모종의 결벽증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훈이 맥락 없이 386 비난을 늘어놓는 것은 그가 수구 꼴통이라서가 아니라, 마음 속에서 이 불편한 고리를 잘라버리려는 무의식적 기제의 작동이다. 일종의 문학적 알리바이의 마련이라고나 할까?

우익이락

지난해 10월 종교단체와 보수·우익단체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한 ‘국가보안법 사수 국민대회’ 집회에 10만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강윤중기자
우익의 두 번째 즐거움은 “아들 최전방으로 보내”는 것이다. 우익과 좌익 미학의 차이는 그들이 처한 물질적 상황의 관념적 반영이리라.
대한민국에서 병역은 국민의 4대의무의 하나로 부과된다. 때문에 좌익의 물적 토대에 처한 이들에게 아들을 군대 보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적어도 존재미학의 대상이 아니다. 왜? 그것은 자유로이 선택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가 이렇게 즐거움을, 우익이락의 열락을 온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 국민 된 보람이 아니던가.

어떤 이들에게는 아들 군대 보내는 것도 존재를 완성하는 미적 수단이 된다. 여기서 우익은 선택할 수 있는 두 개의 옵션을 갖고 있다.
하나는 김훈처럼 아들을 군대 보냄으로써 그 즐거움을 긍정하는 우익 에피쿠로스(쾌락주의)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그 즐거움을 애써 거부하는 우익 스토이시즘(금욕주의)의 길이다.
가령 국가안보를 위해 시청 앞에 수만의 인파를 동원한 모 우익 목사. 그는 자신의 쾌락을 7개월 단기복무로 절제하고, 자식 셋 모두 군대에 보내지 않음으로써 성직에 따르는 금욕의 모범을 보여준 바 있다.

우익삼락

우익의 세 번째 즐거움은 “질서를 지키고”이다. 먼저 우익일락의 예를 들어 보자.
“세금 왕창” 내는 우익에게는 존재미학인 것이, 그 주제가 못 되는 좌익에게는 “질서”라는 이름의 의무가 된다. 우익이 세금 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안 내도 될 세금을 낸다는 뿌듯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반면 담배 한 갑 살 때마다 500원씩 전에 안 하던 애국을 덤으로 하면서 좌익들이 기쁨을 못 느끼는 것은 아마 그것이 강요된 것이기 때문일 게다. 우익의 존재미학은 좌익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지켜야 할 “질서”가 된다.

우익이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익의 자식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우익 된 쾌락을 자제하는 스토이시즘의 존재미학이나, 좌익의 자식들이 군대에 한번 안 가려면 난리 바가지를 쳐야 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니 어쩌구 하며 아무리 변명을 해도, 감히 국가에서 제공한 즐거움을 거부한 죄를 단단히 치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익의 마지막 즐거움, 즉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반드시 지켜져야 할 “질서”라는 것이다.

소설가 김훈씨
/경향신문 자료사진
짜라투스트라는 귀엽게 놀았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우익들이 삼락(三樂)을 마다하고 저 스스로 불행해지는 금욕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저 홀로 과감하게 쾌락을 긍정하는 소설가는 새 시대의 열림을 알리는 짜라투스트라다.
남들 다 내는 세금 내고, 남들 다 가는 군대 가고, 남들 다 지키는 질서를 지키면서 거기서 남다른 즐거움을 느낀다면, 참으로 귀한 일이다. 내가 우익 미학의 그 처참한 촌스러움을 그나마 참아줄 수 있는 것은,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 여유 때문이다.

ps.

아, 김훈씨께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이순신과 노무현의 동일시는 귀엽지만, 이순신과 박정희의 동일시는 징그럽다.



진중권 / 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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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노부후사 > [퍼온글] 타임즈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 100선

Top 100 Book at 20C  -- UK 'The Times', 1999


 

I. 문학
1. D.H.로렌스/ 아들과 연인/ 1913
2. 루쉰/ 아큐정전/ 1921
3. 엘리엇/ 황무지/ 1922
4.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1922
5. 토마스 만/ 마의 산/ 1924
6. 카프카/ 심판/ 1925(?)
7.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앗/ 1927
8.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1927
9. 헤밍웨이/ 무기여 잘이거라/ 1929

10. 레마르크/ 서부전선 이상없다/ 1929
11.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1932
12. 앙드레 말로/ 인간조건/ 1933
13.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1939
14. 리처드 라이트/ 토박이/ 1940
15.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1941
16. 카뮈/ 이방인/ 1942
17. 조지 오웰/ 1984/ 1948
18. 사뮈엘 베게트/ 고도를 기다리며/ 1952
19.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1955

20.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1956
21. 잭 케루악/ 길 위에서/ 1957
22.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1957
23. 치누아 아체베/ 무너져내린다/ 1958
24. 귄터 그라스/ 양철북/ 1959
25. 조지프 헬러/ 캐치 22/ 1961
26.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1962
27.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 1967
28.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1980
29. 밀란 쿤데라/ 참으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984
30. 살만 루슈디/ 악마의 시/ 1989

II.인문
1.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1900
2.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일반언어학강의/ 1916
3.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920
4. 라다크리슈난/ 인도철학사/ 1923~27
5. 지외르지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1923
6.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1927
7. 펑유란/ 중국철학사/ 1930
8. 아놀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1931~64
9. 마오쩌둥/ 모순론/ 1937
10.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이성과 혁명/ 1941
11. 장 폴 사릍르/ 존재와 무/ 1943
12. 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945
13.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1947
14. 시몬 드 보봐르/ 제2의 성/ 1949
15.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951
1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1953
17. 미르치아 엘리아데/ 성과 속/ 1957
18. 에드워드 헬렛 카/ 역사란 무엇인가/ 1961
19.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1962
20.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 1962
21. 에드문트 후설/ 현상학의 이념/ 1964
22. 미셸 푸코/ 말과 사물/ 1966
23. 노엄 촘스키/ 언어와 정신/ 1968
24. 베르터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1969
25.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앙티오이디푸스/ 1972
26.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1976
27.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1978
28.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979
29.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1979
30. 위르겐 하버마스/ 소통행위이론/ 1981

III. 사회
1. 브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1902
2.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 과학적 관리법/ 1911
3.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1926~37
4. 라인홀트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1932
5. 존 메이너드 케인스/ 고용.이자.화폐 일반이론/ 1936
6. 윌리엄 베버리지/ 사회보험과 관련 사업/ 1942
7. 앙리 조르주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 1947
8. 앨프리드 킨지/ 남성의 성행위/ 1948
9. 데이비드 리스먼/ 고독한 군중/ 1950
10. 조지프 슘페터/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1950
11. 존 갤브레이스/ 미국의 자본주의/ 1951
12. 대니얼 벨/ 이데올로기의 종언/ 1960
13. 에드워드 톰슨/ 영국노동계급의형성/ 1964
14.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1964
15. 마셜 맥루헌/ 미디어의 이해/ 1964
16. 케이트 밀레트/ 성의 정치학/ 1970
17. 존 롤스/ 정의론/ 1971
18. 이매뉴얼 위러스틴/ 세계체제론/ 1976
19. 앨빈 토플러/ 제3의 물결/ 1980
20. 폴 케네디/ 강대국의 흥망/ 1987

IV.과학
1. 알버트 아인슈타인/ 상대성원리/ 1918
2. 노버트 비너/ 사이버네틱스/ 1948
3. 조지프 니덤/ 중국의 과학과 문명/ 1954
4.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1962
5. 제임스 워트슨/ 유전자의 분자생물학/ 1965
6.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1978
7. 에드워드 윌슨/ 사회생물학/ 1980
8. 칼 세이건/ 코스모스/ 1980
9. 이리야 프리고진/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10.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1988

V.예술,기타
1. 헬렌 켈러/ 헬렌 케러 자서전/ 1903
2.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1926
3. 마하트마 간디/ 자서전/ 1927~29
4. 에드거 스노우/ 중국의 붉은 별/ 1937
5.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940~50
6. 안네 프랑크/ 안네의 일기/ 1947
7. 에른스트 한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48

8. 말콤 엑스/ 말콤 엑스의 자서전/ 1966
9.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1975
10. 넬슨 만델라/ 자유를 향한 긴 여정/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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