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썼던 글을 퍼왔습니다....^^;;
어제 벼르고 벼르던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전"을 보고왔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16-17세기 네덜란드 플랑드르 회화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꼭 보아야 할 전시였지요.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17세기 북부 지방은 네덜란드로 독립하고 남부 플랑드르 지방은 그대로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나중에 벨기에가 되었다고 하네요. "플란더스의 개"의 플란더스가 바로 플랑드르이구요...네로가 늘 동경하던 성당의 그림이 바로 루벤스의 그림입니다. ㅠ.ㅠ)
나의 마음속에 있는 사적인 갤러리에 소장하고 숭배하는 화가들 중 일부의 계보는....16세기의 플랑드르 화가 히에르니무스 보쉬, 피터 브뤼겔, 16세기말~17세기 네덜란드의 베르메르, 18세기 스페인의 고야, 그리고 19세기 달리로 이어집니다. 이 화가들은 나름대로 서로서로 친족관계를 이루고 있죠. 예를 들어서 보쉬와 고야와 달리는 (또한 많은 면에서 피터 브뤼겔 역시) "그로테스크(엽기)"라는 코드로 서로 통하지요. 또한 달리는 베르메르를 극찬하고 그 화풍을 이어받기도 했습니다. (달리의 그림에 베르메르가 등장하기도 하고 베르메르의 유명한 작품의 구도를 염두에 두어 그와 비슷한 구도로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또한 색채 역시 통합니다. 아, 베르메르와 달리의 노란색.......)
저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백과사전을 들춰보다가 발견한 베르메르라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화가의 그림에 왠지 마음이 끌렸다가...저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달리를 통해서 그를 재발견하고 마음의 신전에 모셔다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르메르가........나만의 조용한 신전에 모셔두었던 베르메르가....
요즘 엄청난 유명세를 탈 조짐을 보이고 있더군요. 네덜란드 헤이그의 마우리츠 미술관에서 대여한 이번 전시회에서 막상 오지도 않은 (그 작품을 대여하려면 대통령이 나서야 할 것이라고 했다네요.) 베르메르의 "진주 귀거리를 한 소녀"라는 작품은 렘브란트, 루벤스 못지 않게 전시회의 얼굴 마담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누군가가 얼마전 이 작품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하네요. 진주 귀걸이 소녀의 모델에 상상력을 덧붙여 베르메르의 일생을 재구성한 영화이지요......허준이나 대장금처럼 말입니다.......
이 소설이나 영화에 대해 호기심은 느껴지지만.....뭐랄까.......저로서는......"나만의"...는 아니겠지만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이 화가에게 대중의 손때가 묻는 것이........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어버리는 냄비와 같은.......한번 걸려들면 뼈도 안 남기고 샅샅이 먹어치워버리고 유유히 흩어져버리는 피라냐(식인물고기임돠!)같은 대중들 속에 던져지는 것이..........그것도 2%의 진실에 98%의 허구의 튀김옷을 입혀 뻥~ 튀겨낸 형태로 선보인다는 것이.......썩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아무튼, 전시회 자체는 대만족이었습니다.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화가의 작품은 렘브란트 세 점, 루벤스 한 점 걸려있었을 뿐이지만 그보다 덜 유명한 동시대 화가들의 그림들 역시 너무나 흥미롭고 아름다웠습니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바로크 미술이 교회와 왕궁의 후원으로 발달했던 데에 비해서 17세기 네덜란드 그림은 "위대한 시민의 미술"로 특징 지워진다고 합니다. 17세기 암스텔담은 지금의 뉴욕과 같은 곳으로 가장 국제적이고, 가장 부유하고, 가장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도시로 교회의 탄압을 두려워한 철학자,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라고도 해요. 미술품의 의뢰자, 수요층도 귀족, 부유한 중산층 등 다양해졌고 따라서 그림의 내용도 신화니 성서에서 벗어나 삶의 장면들을 포착한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마음을 끌었던 그림들은............아주 우연한 소재를 엄청나게 정교한 기교를 통해서 사실적으로 표현한 그림들........그저 마음가는 대로, 되는대로 포착한 일상의 한 장면을 영원 속에 고정시켜놓은 듯한 그런 그림입니다. 마치 일부러 포즈를 취한 것이 아니라 그냥 피사체가 알지 못하는 순간 찰칵 찍어내는 스냅사진처럼요.
생각해보세요. 사진이라는 독특한 기술이 가져다준 스냅사진의 미학을....사진이 발명되기 수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미 실험했다는 사실을요!
소재의 선택에서부터 작품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얼마나 획기적이고 얼마나 창의적이고 얼마나 전위적인 실험이었을까요! 저에겐 아직도 그것은 엄청난 신비이고 호기심의 대상입니다. 저 그림을 그리게 된 상황과 동기....subject와 화가의 의식과 심리적 상태 그런 것들이요.
그리고 한편으로 회화의 존재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회화와 오늘날의 회화......회화의 진화......그런 것이요.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의 세계에서 회화는 순수하게 표현의 수단이 되었지만 그 이전의 세계에서는 표현 이전에 기록의 수단이라는 것이 회화의 레종데트르였겠지요. 오히려 기록이라는 틀 안에서 표현이 양념을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그 '기록'이라는 기능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순간 순간 무화되어가는 덧없는 삶, 덧없는 젊음, 덧없는 사랑, 덧없는 고통......그 단 한 조각이나마 이차원의 평면에 고정시켜 영원성을 부여하고싶었을 사람들의 욕구.......
그 한 조각을 위해서....그림의 모델이나 화가나 아마도 적게는 며칠에서 수개월의 시간을 바쳤겠지요. 아무나 그림 속에 간직될 수도 없었고, 그 한 조각을 생생하고 아름답게 그려낼 재능과 기술을 가진 화가 역시 역사를 통 털어 손꼽을 정도였겠구요.
수동 카메라에서 자동카메라, 캠코더에 디카까지.........누구나 손쉽게 값싸게 사진이나 동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미지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 시대에 앉아서 바라볼 때 그 시절의 그림들은 정말이지 놀랄 만큼 time-consuming하고 costly한 기록이지요? 음식으로 치자면 패스트푸드와 대비되는 슬로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우 푸드인 셈이죠.
그러면서 또 하나의 슬픈 통찰이 떠올랐습니다. "위대한 회화의 시대는 끝났다. 영원히." 그것이죠. 덕수궁 미술관에 걸려있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마치 자연사박물관에서 공룡의 뼈를 바라보면서 느꼈음직한 놀라움과 경탄, 그리고................그리움과 슬픔 같은 것이 떠올랐습니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플랑드르, 로코코, 인상파,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어쩌구저쩌구, 각 유파들이 모두 생물의 진화과정처럼 꼬리를 이으며 등장해 자신의 전성기를 누리고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갔죠. 회화라는 장르는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지만 뭐랄까........... 도마뱀이 티라노사우르스의 후손이라고 우기는 꼴이랄까요?
제가 현대미술에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로 하여금 회화라는 분야에 처음 눈을 뜨게 해준 것도 현대미술, 19세기초의 미술이었고 여전히 가장 사랑하고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미술 사조도 그 시대의 미술, 초현실주의 미술입니다.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팝아트니 동시대 작가들의 그림에도 상당한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아, 비구상에는 전~혀 취미가 없습니다. 저는 입체파로 추상, 나아가 비구상의 문을 열어준 피카소마저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위대한 회화의 시대는 끝났다. 영원히'라는 명제는 아무래도 참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존재의미의 상당 부분을 다른 수단, 다른 장르에 뺏기게 된 이상(어디 사진뿐입니까? 영화, 컴퓨터 등 막강한 시각예술매체들....) 회화는 필연적으로 왜소해질 수밖에 없겠지요........시간, 돈, 재능, 관객 그 모든 것을 뺏기고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이를테면 렘브란트가 오늘날 태어났어도 그림을 그렸을까? 뭐 그런....얘기요.
여기에서 문득 쿤데라의 소설에 나오는 대목이 생각납니다. 불멸의 6부 "문자반"에 나오는....
제가 번역하는 책에 "Always trust Shakespeare to have been there before."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저에게는 셰익스피어를 밀란 쿤데라로 바꾸면 말이 됩니다. 아마도 그의 책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너무나 많이 되풀이해서 읽어서, 그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서.....살아가면서 그의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감정, 같은 생각에 도달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 가사마냥.....정말이지 "I've got him under my skin."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지요? 회화에 대한 쿤데라의 견해는 다음 편에 올릴께요. 그럼 어제의 감동을 누르고 생업으로 돌아가야 할까봐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