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하련다. 그렇다. 나는 무신론자다. 이 책을 통해 도킨스가 의도한 바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는 나 같이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신론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당당하고 주저함 없이 그 사실을 드러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수십 년 전 동성애자들이 그러했듯 21세기 개명천지에도 손해보고 배척받는 무신론자의 사회적 지위를 각성하고 사회를 종교의 해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맞서 투쟁하라고 은근히 부추긴다. 그런데 과연 무신론자가 신앙인으로부터 그토록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을까? 종교가 무신론자, 아니 인간 전반의 삶에 진정 피해를 주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개인이 속한 사회, 그를 둘러싼 환경, 상황과 운에 따라 각기 다를 터이다. 나에게 종교는 어떤 것일까? 종교는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나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동화와 결별하고 어른들과 세상의 불완전함을 깨달으면서 자연스럽게 신을 버렸다(또는 잃어버렸다). 기독교계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름대로 종교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고 나서는 한 번도 종교가 거치적거린 적이 없었다. 종교적 강요는 악몽 같은 체육시간과 함께 학창시절의 괴로운 추억으로 영원히 벗어던질 수 있게 된 듯했다. 그 후 나는 종교에 별 관심도 없지만 유감 또한 없는 사람이 되었다. 오히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상대주의적이고 포스트모던한 세계 속에서, 온통 모든 관심이 단 한 번 주어진 짧은 삶 속에서 최대한 잘 먹고 잘 살고 잘 쓰고 가자는 이기적이고 물질적이고 탐욕스럽고 부박한 사회 분위기에서, 종교가 주는 긍정적 영향에 대해 일종의 향수나 동경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종교는 적어도 그걸 믿는 사람에게는 도덕에 '절대'의 추를 달아주고, 세속적 갈증을 잠재울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선행과 봉사를 권유하지 않던가?
한편 칼 세이건, 마틴 가드너, 마이클 셔머 같은 과학적 회의주의자의 목소리에 마음 깊이 동조해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은 조직화된 종교 자체에 싸움을 걸기보다는 창조론을 유사과학, UFO 광신도, 그밖에 엉터리 신비주의적 믿음과 같은 선상에 놓고 그 세부적인 주장을 조목조목 비난하는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리처드 도킨스는 이 한 권의 책으로 아브라함의 신을 믿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세계의 세 가지 주요 종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다. 인격신을 믿는 종교에 대한 개인적 혐오를 넘어서서 공들인 지적·논리적 반박과 거센 사회적 비판의 총공세를 펼친다. 또한 과격한 근본주의자의 해악에 대해 지적하는 것과 똑같이 좀더 온화한 얼굴을 지닌 종교, 특히 과학자와 지성인의 신앙 역시 비난한다. 도킨스는 분명 내가 가장 존경하고 경탄하는 저자 중 한 람이다. 그의 학식과 통찰력, 번뜩이는 명석함과 재치, 글재주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과연 종교는 도킨스가 그 재능과 영향력을 발휘하여 공격하고 비판할 만한 그런 대상일까? 정말 나의 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신마저도 다 깨부수어야 마땅한 것일까? 그것이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답을 찾고자 했던, 스스로 부과한 숙제였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논지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교(특히 야훼를 믿는 기독교와 천주교)의 추악한 면을 벌거벗기기. 둘째,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증명하기. 셋째, 종교를 세상에서 몰아내는 구체적 실천과제로 어린아이들을 종교적 세뇌로부터 해방시키기.
도킨스는 1장과 2장에서 종교와 과학의 해묵은 논쟁 배경을 설명한 다음 3장에서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을 하나하나 논박한다. 4장에서는 비개연적인 복잡한 존재가 생겨난 배경에 '설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논박하면서 그 비개연성과 복잡성을 자연선택과 인본원리로 설명한다. 그 다음 5장에서 종교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이론 및 밈 개념 등을 동원하여 설명한다. 6장에서는 도덕을 종교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신에 기대지 않는 독자적 인간의 도덕의 기원을 찾는다. 앞부분에서 신가설을 논박하면서도 종교인의 추하고 비겁한 사례를 풍부하게 선보였지만, 성서 속 신의 사악함과 종교의 해악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은 7장과 8장에서다. 마지막으로 9장에서 어린이들을 종교 교육에서 해방시킬 것을 주장하고, 10장에서는 종교가 차지하는 자리를 대신할 대안을 모색한다.
많은 논쟁적 글들이 그러하듯 도킨스 역시 공격에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 적에게 퍼붓는 조롱과 야유는 그야말로 '신 내린' 솜씨를 보여준다. 하지만 부수기는 쉽지만 만들기는 어려운 법. 아쉬움도 있다. 종교의 기원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접근은 진짜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변죽을 울리는 느낌을 주었다. 도덕의 기원에 대한 논의도 다윈주의적 도덕의 진화 과정과 신을 배제한 도덕철학의 요점을 소개하기는 하지만, 좀더 예민한 윤리 문제(미끄러운 비탈길 논쟁 등)에 대한 논의가 배제된 아쉬움이 있다. 또한 종교가 주는 위안, 영감, 소속감 그밖에 모든 긍정적 감정들을 내치면서 궁극적으로는 "종교가 이러이러한 이점이 있다고 해서 신의 존재가 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논쟁의 전개를 막아버리는 방식은 거슬리기도 했다. 지극히 옳은 말이지만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던져버리는 논박이어서다. 그는 아시모프를 인용해서 모든 미신적인 것들을 들춰내다 보면 결국 어린아이가 위안을 얻고자 빨아대는 손가락이 나온다고 말했는데 굳이 어린아이의 입에서 그 손가락을 빼야만 할 이유가 무얼까? (도킨스는 이런 의견을 생색내는 태도라고 비난하지만, 글쎄….)
서문에 도킨스가 인용한, "무신론자들을 조직화하는 일은 고양이 떼를 모으는 일과 같다"는 비유가 예측하듯, 나는 무신론의 깃발을 치켜들고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킨스에게 설득되지는 않았다. 종교에 대한 내 입장을 다시금 정리해보자면 나 자신의 개인주의적 성향에 따라, 그리고 합리주의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선의 도덕 원칙이라고 여겨지는 공리주의적 원칙에 따라, 나는 다수의 행복에 도움이 된다면 사회가 종교를 품고 나아가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또한 진화론적 생존가치를 지닌 팃포탯tit-for-tat의 도덕 전략에 따라 나는 다른 이에게 무신론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 그들이 먼저 강요하고 들이대고 '전도'하지 않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