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난 아들 녀석의 장래희망이 로봇과학자이다. '휴보'니 '아시모'니 하는 로봇 이름을 주워섬기고, 로봇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고, 학교 특기적성 수업인 로봇공학 시간을 일주일 내내 기다린다. 로봇에 대한 사랑을 품어보지 않고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 태권브이, 마징가제트, 그랜다이저, 아톰, 이겨라 승리호 등 만화영화 속의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에 열광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다면 로봇과학자를 꿈꾸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역할모델이 될 만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이가 바로 로드니 브룩스일 것이다.

현재 MIT 인공지능 연구소(현재는 컴퓨터과학과 통합된 CSAIL)의 소장인 그는 답보 상태에 있던 인공지능 연구에 물꼬를 트고, 더 나아가 주류의 물길마저 돌려놓은 패러다임 개척자였다. 선편으로 과학 잡지를 받아보는 데 3개월이 걸리는 호주의 벽지 출신의 소년이 쟁쟁한 세계적인 천재들을 제치고 한 분야의 우두머리로 우뚝 선 이야기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드라마이다. 또한 '룸바'라는 청소 로봇으로 글자 그대로 우리의 삶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들어온 성공적 사업가라는 경력은 하고픈 일을 하면서 세속적 보상도 누릴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는 이공계 지망생들의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스탠퍼드 대학교 인공지능 연구소(SAIL)에서 로봇공학자로서 경력의 첫발을 내딛은 브룩스는 그곳에서 오늘날 로봇 분야의 리더 중 한 사람이며 기이한 상상력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가득한 한스 모라벡을 선배로 만나 그의 연구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도왔다. 모라벡의 연구가 대표하듯 당시 로봇 연구는 기계의 연산장치를 통해 3차원적 세계의 내적 모델을 구성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움직임을 계획하고 실행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사실 인공지능 초창기에는 높은 수준의 인지적 활동에 모든 관심이 모아졌다. 그 결과 체스나 미적분, 대수 문제, 수학 증명 등 가장 고차원적인 인지 활동에서 인간의 능력에 필적하거나 그 수준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지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쉬운 작업들, 컵과 의자를 시각적으로 구분하기, 장애물을 피해 방안을 돌아다니기, 두 발로 계단을 오르내리기 따위의 활동에서 연구자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바로 여기에서 브룩스는 과감하게 허를 찌르는 전법을 내세운다. "내적 모델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이 어렵고 소모적이라면, 그 내적 모델을 없애버려라!"가 그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세계에 대한 상세한 내적 모델의 구축 없이 지각과 행동을 직접 연결해 버렸다. 수많은 천재적 인공지능 연구가들이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려고 노력할 때 브룩스는 지능 진화의 역사에서 지질학적 시간 단위를 거슬러 올라가 곤충 수준의 지능에서부터 다시 출발한 것이다. 그가 '캄브리아기 대탐험'이라고 부른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자 자신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꼽는 징기스Gengis는 곤충을 모방한 6족 보행 로봇이다.

브룩스는 그 어떤 장애물도 기어올라 넘어서며 집요하게 사람을 쫓아다니는 로봇의 특성 때문에 징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한다. 그 다음 그의 지도학생들은 징기스의 친족 뻘 되는 쌍둥이 곤충 로봇, 아틸라와 한니발을 만들어낸다. 비록 브룩스 자신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이름들이 그의 연구와 그 자신의 행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고하고 콧대 높은 서구 국가들을 침략해 들어와 정교한 문명을 짓밟고 풍비박산 낸, (서구인의 기준으로 볼 때) 단순무식하고 야만스러운 이민족(몽골, 훈, 카르타고)의 수장, 징기스, 아틸라, 한니발…. 브룩스의 혁명은 바로 이들의 정복 사례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브룩스는 주류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반발과 배척을 받았고 반 세대쯤 앞선 인공지능의 거두 마빈 민스키는 기회 닿을 때마다 브룩스 이래로 판을 치고 있는 이 '작은 로봇들'에 경멸을 숨기지 않는다.

1989년 발표한 브룩스의 논문 제목 '빠르고 값싸게, 그리고 통제 없이'는 인터넷 상에서 일종의 언더그라운드 구호로 퍼져나갔고 그가 직접 출연한 동명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그는 대중과 소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학자였다. 로봇을 다른 행성으로 실어 보낼 연구를 진행할 때는 관련 아이디어를 영화화해 판권을 할리우드에 팔거나 기업의 광고로 활용해서 연구비를 댈 궁리를 했다. 로봇 장난감을 상품화하기 위해서 세계 곳곳의 장난감 회사들을 발로 찾아다니며 제조, 마케팅 등의 경영기법을 제대로 배워나갔다. 너무 상업주의적인 것 아니냐고? 맞다. 엄청 상업주의적이다. 그는 기질적으로 학자이기에 앞서 발명가이고 사업가이다.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소개란에 레이 커즈와일을 가리켜 '에디슨의 적자嫡子'라는 인용을 실었는데 그렇다면 커즈와일과 로드니 브룩스는 친형제 뻘 되어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커즈와일과는 뚜렷한 반목을 드러낸다. 브룩스는 의식을 기계에 다운로드해 불멸을 실현한다든지 인공지능과 로봇이 엄청난 부와 풍요를 가져다 준다든지 하는 커즈와일, 모라벡, 민스키 등의 테크노 유토피아적 미래 예측에 냉소를 보내고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비판을 가한다. (브룩스와 다른 과학자들, 특히 민스키와의 미묘한 관계는 재미난 관전 포인트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 역시도 ―로봇들의 아버지답게― 궁극적으로 로봇이 감정과 의식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렇다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도 기계일 뿐이라는 철저한 유물론과 지적, 도덕적 상대주의가 결합한 결과이다. 이런 것을 보면 과학의 엄밀한 분석의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온갖 가설과 추측이 비온 후 잡초처럼 무성하게 돋아나고, 사람들은 결국 각자 자기 취향대로 믿고 싶은 것을 믿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룩스라는 인물에 무조건 찬사를 보낼 생각은 없다. 사실 학계를 정복한 그의 패러다임이 얼마나 오랫동안 왕좌를 지킬지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알 수도 없고 알 바도 아니다. 어쩌면 그의 연구방향이 어디선가 한계에 부딪힐 수도 있고, 그가 조소했던 경쟁자들이 더 큰 광맥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땅에 발을 굳게 딛고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저자가 쓴 과학책을 읽는 것은 독자로서 엄청난 행운이라는 것이다. 나처럼 로봇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태권브이에서 졸업해버린 사람들도 이해하기 쉬울 만큼 친절하며 태권브이만큼 설레고 재미있는 로봇 이야기라고 감히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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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7-27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네파벨님의 기고로군요!^^

딸기 2007-07-2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지금 시간이 좀 없어서... 이따가 다시 들어와서 찬찬히 읽어볼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