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서두르지 않는다 - 빛과 바람이 들려준 삶의 문장들
김산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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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삶의 속도를 잃어버린 시대, 『계절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가족과 자연에서 배운 삶의 리듬으로 독자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네며 지금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KBS 〈인간극장〉과 유튜브 채널 산들무지개를 통해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준 김산들 작가. 이 책에서는 영상이 미처 다 담아내지 못했던 고산 평야의 고요한 사유와 자연의 척박함 속에서 길어 올린 단단한 문장들이 담겼습니다.


저자는 IMF 시기를 지나며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인도로 떠났고, 여행 중 자전거로 세계를 누비던 스페인인 남편 산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스페인 발렌시아 북서쪽 해발 1,200미터 비스타베야 평야에 정착해 200년 된 돌집을 고치고, 태양광과 빗물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을 꾸려 왔습니다. 낭만적 귀촌 에세이와는 결이 다릅니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그 작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왜 삶을 가볍게 만드는지를 기록한 생활 철학서입니다.


고산 지대의 봄은 요란하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저자는 길가에 늘 존재했으나 그 누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낯선 포플러나무가 어느 날 문득 파릇파릇한 잎을 펼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아이들과 등굣길에 발견한 이 나무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내면의 시선을 확장하는 행위입니다. 사소한 풍경의 변화를 응시할 여유를 잃어버린 요즘입니다. 저자의 포착은 우리가 타인과 세계를 향해 시선을 던질 때, 비로소 세상이 더욱 풍요롭게 연결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겨울을 버텨낸 생명들에게는 봄이 오히려 먹을 것이 부족한 보릿고개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새들과 양 떼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상생하는지 묘사합니다.


암에 걸린 오랜 친구를 위해 매달 생활비를 보태기로 결정하는 부부의 에피소드가 인상 깊었습니다. 남편 산똘은 “100유로가 더 있다고 우리가 더 행복해질까?”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몫을 덜어내어 타인의 고통을 분담하는 행위가 오히려 주체의 영혼을 자유롭고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물질적 결핍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기울어지는 생명들의 다정한 연대를 통해 인간관계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해발 1,200미터의 뜨겁고 건조한 여름, 이 혹독한 열기가 생명체들의 뿌리를 더욱 깊은 땅속으로 뻗게 만드는 필수적인 과정임을 짚어줍니다.


여름 편에서 가장 강렬한 상징성을 지니는 소재는 트러플(송로버섯)입니다. 트러플은 비바람과 번개, 그리고 우박이 잦은 거친 해에 오히려 더욱 독특하고 깊은 향을 품은 채 자라난다고 합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락한 환경 속에서 자란 존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삶의 고난이 빚어낸 결과물인 셈입니다.


남들보다 더 험난한 오르막길을 걷고 있거나, 유난히 척박한 삶의 계절을 지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헛된 고생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쉽게 사라지지 않을 깊은 향기를 채워 넣는 과정이라는 것으로 위로를 건넵니다.


한여름 오후,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마시는 차가운 가스파초 한 모금은 몸 안에서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잘 익은 토마토, 오이, 빨간 파프리카, 양파, 마늘을 바게트 빵, 올리브유, 식초와 함께 블렌더에 넣고 갈아 마시는 차가운 수프. 타오르는 태양 아래서 지친 몸에 수분과 미네랄을 보충해 주는 고산 평야의 생존식입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자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사방에 널린 열매들을 거두어들이는 수확의 시기입니다. 그런데 고산 평야의 가을은 인간만을 위한 무대가 아닙니다. 야생 포도와 배나무를 두고 인근의 양 떼들과 소리 없는 선착순 경쟁을 벌이는 일상을 유쾌하게 그려냅니다.


자연 속에서의 수확은 철저히 공유의 개념으로 흘러갑니다. 내가 한 발 늦으면 양 떼가 포도를 전부 먹어 치우고, 내가 조금 부지런하면 배를 따다가 설탕 절임이나 케이크를 만들어 먹는 식입니다.





모든 생명이 활동을 멈추고 냉혹한 추위가 대지를 지배하는 겨울, 돌집은 화목난로의 불길로 온기를 유지합니다. 타오르는 장작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인간의 인생 역시 장작처럼 무언가를 끊임없이 태우고 소멸시키며 나아가는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행위는 그저 소멸이 아니라, 자신의 온몸을 바쳐 주변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타적 연소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인 재는 다시 대지의 영양분이 되어 봄의 싹을 틔웁니다. 이처럼 자연의 순환 구조 속에서 저자는 인간이 취해야 할 궁극적인 태도가 비움과 내려놓음에 있음을 배웁니다.


해가 뜨지 않아 전기가 끊기고, 애써 기르던 닭들이 닭장을 탈출해 산으로 도망치며, 멧돼지가 내려와 정성껏 가꾼 텃밭을 엉망으로 뒤엎어 놓는 조난과도 같은 날들이 지속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좌절하는 대신 주문을 외칩니다. “나는 좋아요! 잘 지내요!”


이 외침은 현실을 무책임하게 낙관하는 정신 승리가 아닙니다. 어제가 엉망이었을지라도 오늘을 잘 지낸다고 명명하는 순간, 거친 겨울의 일상은 견뎌낼 수 있는 극복의 무대로 바뀝니다.


200년 된 돌집에서의 자급자족적 삶. 어디에 사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라는 걸 보여줍니다. 도심 한복판에 살아가더라도 내 마음속에 해발 1,200미터 평야의 고요한 리듬을 품고 있다면,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조급증에 흔들리지 않고 나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계절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외부의 거친 비바람과 오르막길 속에서도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는 단단한 내면의 중심축을 세울 때 생기는 희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스페인 고산 지대의 생생한 생활 밀착형 에피소드와 이국적인 풍경이 마음을 다독입니다. 조급한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자신만의 방향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다정한 위로의 에세이이자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속도 중심의 삶에서 방향 중심의 삶으로 전환할 수 있는 내면의 브레이크를 선물받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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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18주년 특별기념판) - 사람을 얻는 마법의 대화 기술 56
샘 혼 지음, 이상원 옮김 / 갈매나무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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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국내 출간 이후 18주년을 맞아 새롭게 단장한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오랫동안 직장인들의 스테디셀러로 군림해왔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을 무조건 참으라고 강요하는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내 잘못도 아닌 일에 고함을 지르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품위를 지키며 승리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주기 때문입니다. 56가지 마법의 대화 기술을 만나보세요.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은 곳곳에 박힌 촌철살인의 명언들입니다. 사례 기반 서술도 강점입니다. 워크숍 참가자들의 반응, 협상 현장의 대화들이 생생하게 등장합니다. 각 장의 실전 TIP은 방금 읽은 내용을 즉시 사용 가능한 형태로 재정리해 줍니다.


비즈니스와 인간관계의 복잡한 역학 관계 속에서 언어적 폭력과 무례함에 노출된 현대인들에게,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이자 비즈니스 전략가인 샘 혼은 묻습니다. 왜 누군가가 던진 말의 파편에 맞서 똑같이 칼을 휘두르거나 혹은 반대로 아무 말도 못 한 채 마음의 멍을 키우느냐고 말입니다.


그가 고안해낸 텅후(Tongue Fu!)는 말 그대로 입술로 행하는 무술(Kung Fu)입니다. 그러나 이 무술은 상대를 타격하여 쓰러뜨리는 파괴적인 기술이 아닙니다. 나에게 날아오는 언어적 공격의 궤도를 우아하게 틀어놓고, 상대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나 자신을 온전하게 방어하는 언어적 유도에 가깝습니다.





갈등이 발생한 순간, 우리의 뇌는 본능적으로 싸우거나 도망치거나의 이분법적 선택지에 직면합니다. 샘 혼은 이 찰나의 순간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라는 은유로 설명합니다. 상대의 도발에 울컥하여 거친 언사를 내뱉는 순간 우리는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길로 순식간에 미끄러져 내려가며, 그 끝에는 자괴감과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까다로운 사람들은 사실 저마다의 결핍과 두려움을 투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노가 가져오는 치명적인 위험성을 통렬하게 짚어줍니다. "anger(분노)에 한 글자만 더하면 danger(위험)가 된다."라고 말입니다.


분노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순간, 대화의 본질은 사라지고 오직 감정의 배설만이 남게 됩니다. 샘 혼은 언어적 공격을 받았을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 말하기 전에 생각한다는 목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상대가 교묘하게 나를 조종하려 들거나 부당한 태도로 일관할 때, 그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상대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까다롭게 구는 걸까?"라는 질문은 상대를 향한 분노를 호기심으로 전환해 주는 유용한 심리적 완충 장치가 됩니다.


상대가 강하게 밀고 들어올 때 똑같이 밀어내는 것은 하수의 선택입니다. 진정한 고수는 상대가 가하는 힘의 방향을 그대로 이용하여 상황을 반전시킵니다.


내가 옳은 상황에서도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상대를 계몽하거나 처단하는 것이 대화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평화와 실익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입안에 맴도는 날카로운 말을 꿀꺽 삼켜버리는 침묵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침묵은 수세적인 도망이 아니라, 상대의 공세를 무력화하는 가장 강력한 공수전환의 기법입니다.


갑작스러운 모욕이나 공격을 받으면 뇌가 얼어붙어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기 마련입니다. 이때 샘 혼의 치트키는 바로 상대에게 다시 질문의 공을 넘기는 것입니다.


누군가 당신을 정면으로 깎아내릴 때는 “무슨 뜻이지요?”라고 물으며 상대에게 다시 공을 넘기라고 합니다. 분노를 지연시켜 공격에 즉각 대항하지 않게 하고, 상대의 의중을 드러내 당신이 사태를 파악할 수 있게 하고, 당신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벌어 후회할 말을 피할 수 있는 등 장점이 많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 중에는 대화의 온도를 순식간에 빙하학적으로 떨어뜨리는 폭탄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샘 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언어적 습관을 미시적으로 관찰하며, 어떤 단어를 버리고 어떤 단어를 채워 넣어야 하는지 처방합니다.


예를 들어 '하지만 (But)' 은 상대의 의견을 전면 부정하고 반발심을 유발하는 단어입니다. 텅후(Tongue Fu)식 대안은 '그리고 (And)'를 사용해 앞선 맥락을 인정하면서 생산적인 대안으로 연결합니다.


'안 돼 (No)'는 상대의 권리를 박탈하여 즉각적인 적대감을 만드는 말입니다. 대안은 '조건부 수용'입니다. 불가능한 이유 대신 언제,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는 겁니다.





아무리 뛰어난 말재주와 화려한 텅후 기술을 가졌다고 해도, 그 밑바탕에 존중과 공감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단지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할 겁니다. 이 책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때려눕히는 백전백승의 궤변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마음을 얻어 궁극적인 내 편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저지르는 가장 흔한 오류 중 하나는 상대방이 힘겨운 감정을 토로할 때 대단한 해결사라도 된 양 이성적인 처방전을 내밀어 대는 오만함입니다.


슬픔이나 고민에 빠진 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분석이나 솔루션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따뜻한 수용입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라는 한마디 혹은 최소한 상대가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인정만으로도 단단히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은 스르르 풀리게 됩니다.


상대를 쉽게 단정 짓고 낙인찍는 서두른 판단을 멈추고,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넓은 품을 가질 때 우리의 인간관계는 비로소 성숙의 궤도에 진입합니다.


첫 출간 이후 세월이 흘러 소통의 채널이 SNS와 메신저로 다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해와 갈등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울림을 줍니다. 오히려 비대면 소통이 늘어난 요즘 세대일수록, 텍스트 뒤에 숨은 뉘앙스를 읽어내고 무례한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텅후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은 나를 존중하는 동시에 타인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 고도의 균형 감각을 요구하는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이 소개하는 56가지의 나침반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그 어떤 말의 칼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품격 있고 당당한 커뮤니케이터로 거듭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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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
이아코포 멜리오 지음, 최보민 옮김 / 서교책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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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경험이 있나요? 고작 “그냥 좀 이상했어”, “말하긴 좀 복잡해”라는 말로 때워버린 그 미묘한 무언가 말입니다.


『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은 세계 여러 언어 속에 숨어 있는 감정 단어들을 모아, 말해지지 못했던 마음의 지도를 펼쳐 보입니다. 우리 마음의 해상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인문학적 여행을 떠나보세요.


이탈리아의 인권·사회권 운동가이자 작가, 논설위원, 정치인 이아코포 멜리오가 칼럼 <말은 오래 남는다(Verba manent)>를 통해 연재하던 글을 묶어낸 책입니다. 사전처럼 딱딱하지 않습니다. 시집과 에세이, 철학 노트와 감정 일기가 한 권 안에서 동시에 숨 쉬는 느낌입니다.


저자는 언어가 붙잡지 못한 감정들의 이름을 잡아챘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평등 문제를 오래 다뤄온 활동가였던 그는 감정 역시 인간의 존엄과 연결되어 있다고 바라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은 쉽게 무시되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설명하는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행복,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 분류 대신 자주 겪으면서도 쉽게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의 잔상들을 포착합니다. 혼자 있고 싶지만 완전히 고립되기는 두려운 상태, 어떤 하루가 이상하게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예감 등 그런 미세한 정서를 세계 각국의 단어를 통해 번역해냅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알렉시티미아(감정표현불능증)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은 내면의 시끄러운 감정을 말로 뱉지 못해 답답할 때, 명확한 언어적 무기를 쥐여주며 정서적 해방감과 치유를 안겨줍니다.


알바니아어 베사(Besa)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깨뜨릴 수 없는 신성한 약속을 뜻합니다. 단순히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한국어로 굳이 옮기자면 의리나 신의에 가깝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신성한 무게를 지닙니다. 일정은 쉽게 취소되고, 말은 맥락 없이 소비되는 요즘, 그래서인지 베사라는 단어는 오히려 그리운 감각으로 다가옵니다.


아랍어 구르파(Gurfa)는 한 손으로 뜰 수 있는 물의 양이라고 합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그만큼. 아랍·이슬람 문화권에서 이 단어는 가진 것의 일부를 기꺼이 건네는 이타적 친절의 상징으로 쓰입니다. 사막에서 목마른 이에게 한 움큼의 물을 내미는 행위 그것이 구르파입니다. 풍족할 때 나누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구르파가 아름다운 이유는, 자신에게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일부를 내어준다는 데 있습니다.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것은 지극히 사소하고 감각적인 찰나의 순간들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문득 차오르는 해방감 혹은 스치듯 지나가는 삶의 경이로움을 포착하는 단어들이 어이집니다.


‘아, 내 기분이 지금 딱 이래!’라며 가슴을 치면서도 정작 이름 붙이지 못했던 기막힌 상황들에 딱 맞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하와이어 아키히(Akihi)는 어떤 장소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누군가가 설명을 해줘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그 장소를 찾아 나서는데, 곧바로 기억이 나지 않는 어이없는 상황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설명하기 고약하리만큼 미묘한 단어, 눈치(Nunchi)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탈리아인 저자의 시선으로 분석한 눈치는 대단히 세련된 사회적 지능이자 고도의 공감 능력으로 묘사됩니다. “눈치 보인다”라며 억압적인 문화의 산물로 여기기도 하지만, 타인의 맥락을 섬세하게 읽어내어 전체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능력은 인간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고차원적인 감정 기술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밀려드는 기묘한 그리움과 연대의 감정에 대한 단어들도 예쁩니다. 신비로운 영적인 감각을 담은 그리스어 이오이엔(Ioien)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다는 자각과 희망적인 징조를 담은 단어입니다.


현실의 무거운 벽에 부딪혀 주저앉고 싶을 때, 세상의 냉소적인 시선으로부터 나의 순수한 열정을 지켜내고 더 멀리 도약하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갈망. 이오이엔이라는 낯선 고대 어휘를 입안에 머금어봅니다.


당신을 가슴에 안고 갑니다라는 뜻을 가진 피우케네뉴(Piwkenleyu)와 아픔을 달래주는 부드러운 어루만짐이라는 뜻을 가진 나나이(Nanai)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깊고 진실한 애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이어서 참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꿈만 같은 하루라는 뜻의 튀르키예어 휠야(Hülya). 인생이라는 것이 늘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일 년 중 단 며칠만이라도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휠야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지금은 서툴고 삐걱거릴지라도, 반드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안착하는 완벽한 평화의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위로의 단어로 다가옵니다.


발음하기조차 힘든 핀란드어 휘프뜨느뜨드뜨스(Hyppytyynytyydytys) 단어도 인상깊었습니다. 긴 하루를 마치고 소파에 몸을 던지는 순간, 혹은 폭신한 침대에 대자로 쓰러지는 그 찰나, 온몸의 긴장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그 기분. 핀란드 사람들은 그것에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이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혀가 지치도록 길다는 사실이 어쩐지 유쾌합니다. 이완을 표현하는 단어가 이렇게 수고스럽다니. 그 역설 자체가 오히려 재밌습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탐험하고, 외로움을 번역하며, 그리움을 수집해 놓은 마음의 대피소 『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 내면의 미묘한 감정들에 이름을 붙여주지 못하고 방치할 때, 그 감정들은 집을 잃고 내 안에서 유령처럼 떠돌며 우리를 아프게 만듭니다.


전 세계 수십 개 언어권에서 길어 올린 200개의 단어들로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세요. 스스로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게 됩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그 마음의 이름을 발견하는 경이로운 여행을 시작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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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키워드 미술사 - 나와 세상을 잇는 스무 가지 예술 이야기
이지현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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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왜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위대한 예술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경험 있으신가요? 미술사 책을 보면 화가 이름은 왜 이렇게 많고, 사조는 왜 끝도 없이 이어지는지 쉽게 질리게 마련입니다.


『모두를 위한 키워드 미술사』는 무엇을 외울 것인가 대신 어떻게 볼 것인가를 먼저 묻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중심에 인간의 욕망, 권력, 불안, 사랑, 죽음, 기억 같은 키워드를 놓습니다. 20가지 키워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나도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고의 틀을 선물합니다. 덕분에 미술사를 시대별 암기 과목이 아니라 인간 감정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처럼 읽게 됩니다.


이지현 저자는 유튜브 아트 채널 ‘널 위한 문화예술’과 ‘예술의 이유’를 운영하며 대중에게 예술을 쉽고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명은 빠르지만 얕지 않고, 친절하지만 가볍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미술은 삶과 연결될 때 비로소 흥미로워진다는 저자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모두를 위한 키워드 미술사』는 현대 감각으로 미술사를 재번역한다는 점입니다. 동굴 벽화에서 SNS 셀카 문화를 연결하고, 르네상스 원근법에서 VR 기술을 끌어오며, 점묘법과 디지털 픽셀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1부는 미술사를 관통하는 뿌리 키워드를 다룹니다. 미술사를 시대순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이 왜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선사시대 벽화를 교과서 속 유물처럼 바라보지만, 저자는 참여의 흔적으로 읽어냅니다. 손바닥 자국을 예술 작품 이전에 존재의 선언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원시 인류가 벽에 대고 물감을 뿜어 만든 스텐실 기법의 손자국은 오늘날 거리의 아티스트들이 스프레이를 들고 도시의 벽면에 흔적을 남기는 그래피티 예술과 같은 맥락을 공유합니다.


오늘날 SNS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을 올리고, 흔적을 남기고, 좋아요를 확인하며 나는 여기 있었다는 감각을 확인합니다. 저자는 그 연결점을 짚어냅니다. 동굴 벽화와 인스타그램 스토리가 인간의 동일한 욕망에서 출발합니다.


서양 미술이 단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모든 시선을 통제할 때, 동양의 미술은 다채로운 자유를 부여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 후기 왕실과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책가도(冊架圖)입니다. 책가도는 책꽂이와 문방구, 도자기 등을 화면 가득 배치한 정물화이지만, 서구식 원근법과는 판이한 방식을 취합니다.


앞쪽에 있는 물체는 작게, 뒤쪽에 있는 물체는 크게 그리는 역투시와 평행 원근법을 혼용하여 여러 각도에서 사물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듯한 묘한 입체감을 선사합니다.





2부는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키워드를 다룹니다. 역사와 기억 챕터의 반기념비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독일 예술가 요헨 게르츠가 함부르크에 설치한 기념비는 시간이 흐르면서 땅속으로 조금씩 사라지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저자는 이 없어지는 예술을 통해 기억과 망각, 역사적 죄의식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유대인박물관의 건축적 서사와 연결하면서 현대미술이 얼마나 깊이 시대의 상처와 대화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요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데미언 허스트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보니 이 작가에 대한 이야기도 눈여겨봤습니다. 대표작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은 죽은 상어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은 것이 과연 예술인가라는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질문 자체가 허스트의 의도였다고 짚습니다.


수조 속 상어는 죽어 있지만 헤엄치는 듯 보이고, 관람객은 그 앞에서 묘한 공포와 매혹을 동시에 느낍니다. 죽음을 이토록 가까이, 이토록 선명하게 눈앞에 들이미는 것. 그것이 허스트가 17세기 네덜란드 바니타스 정물화의 해골과 시든 꽃으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입니다. 삶의 덧없음을 직시하는 것, 그게 바니타스의 핵심이자 허스트가 현대적 언어로 번역한 죽음의 미학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작동하는 미술 생태계의 내부에 대해 짚어줍니다. 미술관과 갤러리가 어떻게 다른지, 비엔날레와 아트페어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큐레이터와 갤러리스트는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 챕터를 읽고 나면 미술관 방문이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도슨트와 인플루언서 챕터에서는 저자의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어려운 현대미술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번역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미술의 대중화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그 다정한 목소리가 왜 중요한지를 들려줍니다.


미술에 관심은 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미술 초보자에게 추천합니다. 특히 미술관 방문 전후에 읽으면 작품을 보는 시각이 구체적으로 달라지는 경험을 합니다. 현대미술이 왜 이렇게 난해한지 궁금했던 이들에게 실질적인 해답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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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식물 도감 - 전 세계 760여 종 식용 식물 총망라!
윤주복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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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마트 채소 코너에서 브로콜리를 집어 들 때 가격표만 봅니다. 식물의 계통이나 원산지,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길들여 식탁에 올리게 되었는지까지 떠올리는 경우는 드물지요. 그런데 『먹는 식물 도감』을 펼치는 순간, 평범한 식재료였던 감자와 들깨, 카카오와 계피가 모두 인류 문명의 공동 저자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식물생태연구가 윤주복 작가는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전국의 산과 들을 누비며 식물을 기록해 왔습니다. 다양한 식물 도감과 해설서를 통해 국내 자연도감 분야에서 독보적인 작업을 이어온 인물인데, 이번에는 먹는 식물에 집중합니다.


기존의 식물 도감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 식문화와 생태, 역사와 취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식물을 다시 읽게 만드는 식탁의 인문학 도감에 가깝습니다.


760여 종의 식용 식물과 1300여 컷의 사진이 담겼습니다. 그동안 음식을 완성된 요리 상태만 바라봤다면 『먹는 식물 도감』은 요리 이전의 세계인 씨앗과 뿌리와 줄기와 꽃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인류가 수렵 채집의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이라는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을 이룩하게 만든 위대한 주인공부터 소개합니다. 곡류와 아곡류 그리고 두류로 세분화하여 식탁의 가장 근원적인 뼈대를 분석합니다.


보리나 콩은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그 존재 가치를 잊기 쉬운 식물들입니다. 저자가 포착한 잘 여문 보리 사진과 보리 이삭, 유연보리 이삭의 대비를 보고 있으면, 식물이 거친 자연 환경에서 자신의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를 변경해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낱알열매 끝에 수염처럼 길게 벋은 까락의 거친 질감은 사진을 통해서도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6줄로 둘러나는 여섯줄보리와 2줄로 둘러나는 두줄보리의 구조적 차이는 인류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어떤 식물을 선택하고 개량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문명의 흔적입니다.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주황빛 감 말리기 사진은 온대 기후의 계절 변화가 식물에게 부여한 축복을 상징합니다. 타닌 성분의 떫은맛을 극복하기 위해 홍시로 연화시키거나 껍질을 벗겨 겨울 바람에 말려 내는 곶감의 제조 과정은, 가죽질의 두꺼운 잎을 지닌 감나무가 가을이라는 계절의 정점에서 인간에게 제공하는 가장 달콤한 농축 원액인 셈입니다.


두리안, 람부탄, 잭프루트, 용과, 카카오 등 이름은 알아도 살아있는 식물의 모습을 본 적 없었기에 현장 사진은 감각의 확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카카오 열매가 나무줄기에 직접 달리는 모습을 보니 신기합니다. 마카다미아, 피칸, 캐슈너트의 나무 전체 형태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채소류는 가장 방대하게 펼쳐집니다. 열매채소, 뿌리채소, 잎줄기채소에서부터 식용꽃, 산나물, 그리고 버섯과 바닷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반찬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섭취하는 초록색 생명력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칩니다.


두류 파트에서 다뤄지는 콩나물 역시 흥미롭습니다. 콩을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발아시켜 비타민 C를 폭발적으로 길러낸 인류의 지혜는 척박한 계절을 버티기 위한 생태학적 생존 전략의 정점이었음을 깨닫게 만듭니다.


향신료와 허브 파트는 매혹적인 향취가 나는 것만 같습니다. 생강과의 식물들이 펼치는 지하 세계의 은밀한 반란은 미식가들이 왜 그토록 향신료에 열광하는지 그 생태적 이유를 밝혀줍니다. 카레의 황금빛을 만들어내는 강황과 울금, 그리고 토종 식재료인 양하와 생강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당분을 얻는 식물, 즙을 얻는 식물, 녹말을 이용하는 식물, 기름을 얻는 식물, 기호품을 얻는 식물, 차로 이용하는 식물, 식용으로 널리 이용하는 약용 식물까지. 인간이 식물로부터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에너지와 물질을 추출해왔는지를 보여줍니다.





도감이란 형식에 충실합니다. 용어 해설과 학명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2회깃꼴겹잎, 간생화, 결구 같은 낯선 식물학적 용어들이 친절한 해설을 통해 내 삶의 단어로 들어오게 됩니다. 자두나무부터 질경이, 차나무에 이르기까지 가나다순으로 빽빽하게 정리된 식물 이름 찾아보기 인덱스는 마트에서 산 식재료의 이름을 발견할 때마다 언제든 그 식물의 진짜 얼굴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수천 년 동안 인류의 문명을 지탱하고 기후와 투쟁해 온 위대한 식물의 연대기를 만나는 시간 『먹는 식물 도감』. 한 끼 식사 속에는 수천 년 식물의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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