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서두르지 않는다 - 빛과 바람이 들려준 삶의 문장들
김산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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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삶의 속도를 잃어버린 시대, 『계절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가족과 자연에서 배운 삶의 리듬으로 독자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네며 지금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KBS 〈인간극장〉과 유튜브 채널 산들무지개를 통해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준 김산들 작가. 이 책에서는 영상이 미처 다 담아내지 못했던 고산 평야의 고요한 사유와 자연의 척박함 속에서 길어 올린 단단한 문장들이 담겼습니다.


저자는 IMF 시기를 지나며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인도로 떠났고, 여행 중 자전거로 세계를 누비던 스페인인 남편 산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스페인 발렌시아 북서쪽 해발 1,200미터 비스타베야 평야에 정착해 200년 된 돌집을 고치고, 태양광과 빗물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을 꾸려 왔습니다. 낭만적 귀촌 에세이와는 결이 다릅니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그 작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왜 삶을 가볍게 만드는지를 기록한 생활 철학서입니다.


고산 지대의 봄은 요란하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저자는 길가에 늘 존재했으나 그 누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낯선 포플러나무가 어느 날 문득 파릇파릇한 잎을 펼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아이들과 등굣길에 발견한 이 나무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내면의 시선을 확장하는 행위입니다. 사소한 풍경의 변화를 응시할 여유를 잃어버린 요즘입니다. 저자의 포착은 우리가 타인과 세계를 향해 시선을 던질 때, 비로소 세상이 더욱 풍요롭게 연결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겨울을 버텨낸 생명들에게는 봄이 오히려 먹을 것이 부족한 보릿고개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새들과 양 떼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상생하는지 묘사합니다.


암에 걸린 오랜 친구를 위해 매달 생활비를 보태기로 결정하는 부부의 에피소드가 인상 깊었습니다. 남편 산똘은 “100유로가 더 있다고 우리가 더 행복해질까?”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몫을 덜어내어 타인의 고통을 분담하는 행위가 오히려 주체의 영혼을 자유롭고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물질적 결핍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기울어지는 생명들의 다정한 연대를 통해 인간관계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해발 1,200미터의 뜨겁고 건조한 여름, 이 혹독한 열기가 생명체들의 뿌리를 더욱 깊은 땅속으로 뻗게 만드는 필수적인 과정임을 짚어줍니다.


여름 편에서 가장 강렬한 상징성을 지니는 소재는 트러플(송로버섯)입니다. 트러플은 비바람과 번개, 그리고 우박이 잦은 거친 해에 오히려 더욱 독특하고 깊은 향을 품은 채 자라난다고 합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락한 환경 속에서 자란 존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삶의 고난이 빚어낸 결과물인 셈입니다.


남들보다 더 험난한 오르막길을 걷고 있거나, 유난히 척박한 삶의 계절을 지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헛된 고생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쉽게 사라지지 않을 깊은 향기를 채워 넣는 과정이라는 것으로 위로를 건넵니다.


한여름 오후,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마시는 차가운 가스파초 한 모금은 몸 안에서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잘 익은 토마토, 오이, 빨간 파프리카, 양파, 마늘을 바게트 빵, 올리브유, 식초와 함께 블렌더에 넣고 갈아 마시는 차가운 수프. 타오르는 태양 아래서 지친 몸에 수분과 미네랄을 보충해 주는 고산 평야의 생존식입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자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사방에 널린 열매들을 거두어들이는 수확의 시기입니다. 그런데 고산 평야의 가을은 인간만을 위한 무대가 아닙니다. 야생 포도와 배나무를 두고 인근의 양 떼들과 소리 없는 선착순 경쟁을 벌이는 일상을 유쾌하게 그려냅니다.


자연 속에서의 수확은 철저히 공유의 개념으로 흘러갑니다. 내가 한 발 늦으면 양 떼가 포도를 전부 먹어 치우고, 내가 조금 부지런하면 배를 따다가 설탕 절임이나 케이크를 만들어 먹는 식입니다.





모든 생명이 활동을 멈추고 냉혹한 추위가 대지를 지배하는 겨울, 돌집은 화목난로의 불길로 온기를 유지합니다. 타오르는 장작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인간의 인생 역시 장작처럼 무언가를 끊임없이 태우고 소멸시키며 나아가는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행위는 그저 소멸이 아니라, 자신의 온몸을 바쳐 주변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타적 연소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인 재는 다시 대지의 영양분이 되어 봄의 싹을 틔웁니다. 이처럼 자연의 순환 구조 속에서 저자는 인간이 취해야 할 궁극적인 태도가 비움과 내려놓음에 있음을 배웁니다.


해가 뜨지 않아 전기가 끊기고, 애써 기르던 닭들이 닭장을 탈출해 산으로 도망치며, 멧돼지가 내려와 정성껏 가꾼 텃밭을 엉망으로 뒤엎어 놓는 조난과도 같은 날들이 지속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좌절하는 대신 주문을 외칩니다. “나는 좋아요! 잘 지내요!”


이 외침은 현실을 무책임하게 낙관하는 정신 승리가 아닙니다. 어제가 엉망이었을지라도 오늘을 잘 지낸다고 명명하는 순간, 거친 겨울의 일상은 견뎌낼 수 있는 극복의 무대로 바뀝니다.


200년 된 돌집에서의 자급자족적 삶. 어디에 사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라는 걸 보여줍니다. 도심 한복판에 살아가더라도 내 마음속에 해발 1,200미터 평야의 고요한 리듬을 품고 있다면,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조급증에 흔들리지 않고 나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계절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외부의 거친 비바람과 오르막길 속에서도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는 단단한 내면의 중심축을 세울 때 생기는 희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스페인 고산 지대의 생생한 생활 밀착형 에피소드와 이국적인 풍경이 마음을 다독입니다. 조급한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자신만의 방향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다정한 위로의 에세이이자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속도 중심의 삶에서 방향 중심의 삶으로 전환할 수 있는 내면의 브레이크를 선물받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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