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
다샤 키퍼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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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다샤 키퍼(Dasha Kiper)의 『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원제 Travellers to Unimaginable Lands)은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질병을 다루는 기존의 의학적, 수사적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뒤흔듭니다.


임상심리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우연한 계기로 98세의 알츠하이머 환자 케슬러 씨의 간병인으로 일한 경험을 계기로 삶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후 알츠하이머 단체에서 상담가를 양성하고 수천 명의 보호자를 상담하면서, 환자의 병보다 보호자의 심리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세계적인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과 저널리스트 비비언 고닉의 극찬을 받으며 BBC, 《뉴욕 타임스》 등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질병의 증상 자체보다 환자와 보호자 사이에 발생하는 기형적이고 잔인한 심리적 역학 관계를 과학적 통찰과 휴머니즘으로 보여줍니다.





전선을 만지지 말라는 아들과 내가 언제 그랬냐고 되묻는 아버지. 아들은 이미 수백 번 같은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결과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또다시 설명하고, 설득하고, 화를 냅니다. 왜일까요?


상대방도 내가 기억하는 사건을 함께 기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억은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족과 친구의 기억이 서로 맞물리며 하나의 현실을 만듭니다.


하지만 알츠하이머에서는 그 연결이 끊어집니다. 환자가 기억을 잊어버릴 때 자신이 지워진 기분을 느끼고 자신의 말, 노력, 희생이 환자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서 부정당하는 느낌까지 받는 쪽은 보호자입니다. 둘이 함께 만들던 시간의 연속성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호자는 자신까지 세상에서 지워지는 감각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에서는 환자가 되기 이전의 삶에서 형성된 성격과 애착 양식이 알츠하이머라는 질병 속에서 어떻게 기괴하게 왜곡되고 증폭되는지 다룹니다.


치매에 걸리면 사람이 완전히 변한다고 생각하지만, 다샤 키퍼는 오히려 환자의 무의식적 기질과 오랜 방어기제는 뇌의 복합 인지 기능이 무너진 후에도 끝까지 살아남는다고 말합니다.


딸 라라에게 끊임없이 집착하며 5분마다 소리를 질러 불러대는 어머니 밀라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딸은 어머니가 병에 걸렸음을 알면서도 밀라의 이기적인 행동에 과거의 상처가 덧나 괴로워합니다.


보호자는 이것을 질병의 증상으로만 보지 못하고, 과거 부모나 배우자가 자신에게 주었던 상처의 연장선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감정적 반응을 수정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가족들이 환자의 이상 증세를 인지하고도 그것이 치매임을 인정하기까지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일명 치매맹(Dementia Blindness) 현상을 신경학적 관점에서 들려줍니다.





우리 뇌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행동에서 일관성을 찾아내려는 강한 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제는 나를 알아보고 정상적인 대화를 나눴던 배우자가 오늘은 엉뚱한 소리를 할 때, 우리 뇌는 저 사람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연기를 하거나 고집을 부린다는 심리적 해석을 더 쉽게 받아들입니다.


인지적 구두쇠인 인간의 뇌에게는 타인의 세계가 완전히 붕괴했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일시적인 도덕적 타락이나 성격적 결함으로 치부하는 것이 뇌의 에너지 소모 측면에서 훨씬 가볍기 때문입니다.


보호자들은 환자의 사소한 몸짓 하나, 우연한 단어 하나에 무수한 의미를 부여하며 그 사람이 여전히 저기 존재한다는 서사를 스스로 지어냅니다. 이 끈질긴 인지적 착각이 돌봄의 끈을 유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호자를 끝없는 희망고문과 자책의 굴레에 가두는 주범이 됩니다.


암이나 다른 신체적 질병은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슬퍼하며 연대할 수 있지만, 치매는 다릅니다. 환자는 보호자의 고통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독존적인 세계로 가버리고, 보호자는 오직 홀로 그 관계의 파편을 받아내야 하는 이 비대칭성이야말로 치매 돌봄을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고독으로 만드는 원인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연민의 위험』을 매개로, 보호자가 환자의 공격적 언행을 '나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심리적 함정을 파헤칩니다. 치매 환자들은 가장 헌신적인 보호자를 향해 내 돈을 훔쳐 갔다, 나를 죽이려고 한다며 독설을 퍼붓습니다.


아무리 환자의 뇌 세포가 파괴되어 발생하는 망상임을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은 피를 흘립니다. 인간의 사회적 직관은 눈앞의 상대방이 뱉는 모든 단어를 의도적이고 개인적인 메시지로 처리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보호자가 환자의 독설에 상처받고 똑같이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의 메커니즘이며, 이를 의연하게 넘기지 못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가학적으로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고 조언합니다.


다샤 키퍼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 방대한 신경과학적 증거들과 상담 사례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결론을 들려줍니다. 환자를 향한 끝없는 용서의 요구 속에 가려져 있던, 보호자 자신을 향한 용서의 필요성입니다. 당신이 화를 낸 것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건강한 뇌가 그렇게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겁니다.


저자는 올리버 색스 박사가 환자들을 향해 보냈던 "상상을 뛰어넘는 나라를 여행한 사람들"이라는 경외 어린 시선을 보호자들에게로 확장합니다. 치매 환자를 돌보며 같이 미쳐가지 않을 수 있는 초인적인 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호자가 겪는 좌절, 분노, 자책은 인간의 건강한 뇌가 가진 신경학적 제약과 한계 때문이며, 이는 결코 도덕적 무능이나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알츠하이머라는 잔혹한 미로 속에서 당신의 건강한 뇌가 길을 잃고 비틀거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류의 조건이라고, 그러니 제발 스스로를 용서하라는 『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


뇌과학과 심리학을 사례 중심으로 풀어내 전문 지식이 없어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보호자가 반복해서 느끼는 죄책감과 분노의 원인을 이해하면 돌봄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더 잘해야 했는데'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해냈구나'라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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