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머리칼을 날린다. 나는 옷깃을 여미고,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다. 거리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멀리서 한 여성이 걸어온다. 내가 걷는 속도와 그가 걸어오는 속도만큼 우린 가까워졌다. 몸에 붙는 가죽 점퍼와 가죽 치마를 입었다. 날씬한 다리와 매끄러운 곡선의 엉덩이 그리고 가슴으로 눈이 간다. 나도 모르게 그의 알몸을 상상해본다. 바로 옆을 스쳐지나갈 때 그의 빨간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멈춰서서 슬쩍 고개를 돌려 뒷모습을 본다. 가죽치마의 매끈한 재질 덕분에 탄탄한 엉덩이가 도드라져 보인다. 뒤따라 걸어오던 여학생 두 명이 나를 보며 수군거린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다시 가던 걸음을 이어간다. 어느 가게에서인지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빠른 리듬의 음악, 젊은 여성의 노래 소리, 아마도 걸그룹의 노래겠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목소리의 여성들은 아름다운 몸매 흔들며 섹시한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퇴근길 버스는 늘 만원이다. 여러 사람들 틈에 간신히 끼어서 손잡이를 잡았다. 내 눈 바로 밑에 어느 여성의 정수리가 보인다. 냄새, 낯선 여성의 정수리 냄새를 맡아야 하다니. 버스가 교차로에서 회전하면서 승객들의 몸이 휘청인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지만 몸은 이미 뒤로 기울어졌다. 앞에 선 여성이 내 가슴으로 확 기울어진다. 마치 내 품에 안긴 모양새다. 짧은 순간 내게 기댔던 작은 체구의 여성은 다시 바로 선다. 뒤로 기울었던 내 몸도 바로 선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서고 내리는 사람은 없지만, 또 새로운 승객이 탄다. 이미 발디딜 틈없이 꽉 찼건만 또 사람을 올라서면서 몸이 밀린다. 갈 곳은 없건만 사람들은 계속 밀어댄다. 조금씩 조금씩 발을 옮겨 옆으로 밀려났다. 내 앞에 있던 여성도 함께 밀려 여전히 그의 정수리는 내 눈 밑이다.


버스가 크게 돌면서 또 한번 몸이 뒤로 기울어진다. 이번에도 여성은 내 품에 살짝 안겼다가 바로 선다. 버스가 돌 때마다 이름 모를 여성은 내 품에 안겼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문득 이 여성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바로 앞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내 앞의 여성이 손잡이를 잡았던 손을 놓고 어깨에 멘 작은 가방에서 전화기를 꺼낸다. "여보세요." 앳된 목소리.  여성이 전화기를 왼쪽 어깨와 귀에 고정시키고 양  손으로 가방을 여미는 순간, 그의 옆 얼굴을 살짝 보았다. 귀여운 인상이다. 순간 또 버스가 돌면서 여성의 몸이 확 쏠린다. 손잡이를 쥔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여성은 중심을 잃고 내 팔에 안겼다. "어머!" 높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손잡이를 쥔 내 팔에 상체를 기댄채, 놀라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본다. 곧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한다. 나도 살짝 고개를 끄덕여 답을 했다.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다시 쥐고, 왼손으로 전화기를 고쳐 쥔 채 작은 목소리로 통화를 한다.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상대방에게 답을 하는 듯하다.


아마 남자친구인듯, 작은 목소리는 오늘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말하기 시작한다. 하루종일 서 있어서 다리가 무척 아프다고 했고, 점장님이 짜증나게 굴었다며 하소연 했다. 누군가가 연락도 없이 나오지 않아 혼자서 매장을 다 맡았다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고, 어떤 손님이 접시를 깨뜨려, 치우다가 손을 살짝 베였다는 이야기도 했다. 만원 버스 속에서 인파 속에 몸이 낀 채로, 이름 모를 여성의 일상이야기를, 남자 친구와의 대화를 다 듣고 있어야 했다. 남자 친구는 아마 회식이 있다고 한 듯, 술 많이 먹지 말고 끝나면 전화하라고 했다. 여성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나를 슬쩍 올려본다. 그 시선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 슬쩍 눈을 돌렸다. 한번 더 고개를 살짝 움직여 인사를 한 듯했다.


어느 정류장에서 우루루 승객들이 내렸다. 비로소 숨통이 조금 트였다. 빈 공간이 조금 생기자 여성은 뒷문 바로 앞으로 자리를 옮겨, 폰을 꺼내들고 두드리기 시작했다. 까똑, 까똑 하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린다.


버스를 내리자 다시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가방을 고쳐 메고, 옷깃을 여미는데, 그 여성이 나를 스쳐 앞으로 나왔다. 여성은 종종 걸음으로 골목을 향해 걸었다. 멀어지는 여성의 작은 체구를 바라보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다. 훅 뱉어낸 흰 연기가 바람에 날려 하늘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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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11-24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에 날려 하늘로 흩어지는 연기와 여자가 오버랩되네요. 잘 읽었어요.

감은빛 2015-11-27 14:59   좋아요 0 | URL
유레카님 고맙습니다!! ^^

2015-11-24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7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