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온다]를 먼저 봤다. 영화에 대한 평들을 읽다가 원작도 좋지만, 영화도 잘 만들었다는 글을 보고 책을 구매했었다. 처음에 앞부분을 좀 읽다가 갑자기 바빠져서 멈췄는데, 그러고 몇 달을 손도 못 대고 지나버렸다. 최근에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나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다섯시간? 대충 그 정도 걸려서 안 쉬고 한번에 다 읽었다.


이제는 영화의 세부 내용에 대한 기억이 살짝 희미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큰 줄기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다시 영화를 떠올려보니 작가와 감독이 영리하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라는 상영시간이 짧은 매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연결고리들과 세부 설정들을 잘 녹여내었고, 그러면서도 원작의 긴장감을 잘 살렸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서 아주 멋있게 연출한 클라이막스 장면은 원작과 완전히 달랐는데, 영화의 연출이 정말 좋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소설의 해당 장면이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영화가 너무 멋있었다. 원작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각자의 장점이 명확하다.


이 소설은 가장 큰 장점은 실체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막연하면서도 커다란 공포를 잘 나타낸 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전체 구성을 세 부분으로 나눠 각 부분의 서술자를 다르게 배치하여 해당 인물의 시선과 생각의 틀 안에서 전체 그림을 조금씩 보여주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런 구성은 잘못하면 매우 산만하면서도 전체 그림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할 위험이 큰데, 각 부분에 아주 적절한 성격의 인물들을 잘 배치하여 단점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장점은 극대화시켰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이런 류의 이야기에서 과연 주인공은 누구일까? 아니 어떤 인물을 주인공으로 놓아야 가장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두 가지 선택을 할 것이다. 하나는 이 사건에 휘말리는 당사자,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두고 시간의 흐름대로 따라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선택일 것이다. 두번째는 피해자를 도와 이 사건을 해결하는 해결사, 다른 입장에서는 이 사건의 본질인 그 존재에 맞서는 대적자 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이건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물에서 주로 선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작가는 총 세 부분으로 나눈 이야기 중에서 1차 피해자와 2차 피해자를 각각 1부와 2부에 두어 일반적인 선택을 따랐지만, 3부의 서술자는 상황을 지켜보며 도와주지만, 그 존재에 맞설 힘은 없는 조력자로 선택했다. 물론 입장에 따라서는 조력자도 큰 틀에서 대적자의 범위 안에 넣을 수 있고, 해결사 그룹의 일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영화와 달리 소설에서는 그 존재에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밖에 없는 것으로 나오고 그 단 한 명의 존재감이 워낙 커서 다른 인물들은 그저 조연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의 이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아주 크게 성공했다고 보지만, 다른 인물이 세번째 부분의 서술자였다면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이야기의 측면에서만 보면 그렇다. 그러나 작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었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하는 주제를 떠올려보면 3부의 서술자가 가장 적합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 외 다른 인물들은 효과적으로 그 이야기를 전달하기 어렵다고 본다.


여기까지 쓰고 다시 영화를 보고 왔다. 소설의 재미를 영화가 잘 살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 보고 싶었다. 찾아보니 웨이브 라는 OTT 에서 독점 제공하고 있다고 나왔다. 유튜브에도 검색해봤는데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웨이브를 딱 1달만 결제했다. 이거 보고 나서 웨이브 독점인 다른 영화나 드라마들을 좀 봐야지 생각했다.


등장인물 이야기를 하려다가 소설의 구조 이야기를 먼저 하고 있었네. 구조적인 측면에서 소설은 소설대로 좋은 선택을 했고, 영화는 영화대로 나쁘지 않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잘 따라가는 흐름을 보여줬고, 후반부의 절정 부분만 소설과 다르게 갔다. 앞서도 말했듯 이 부분은 시각적으로 멋진 장면을 보여줘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다만 결말이 다소 아쉽다. 코토코가 그것을 완전히 제압했는지 어떤지를 보여주지 않고 그냥 엄청난 양의 피가 튀기는 장면만 보여줬다. 그리고 이후에 각 등장인물의 상황도 보여주지 않았다. 반면 소설은 코토코가 그것을 완전히 제압한 이후에 각 등장인물들의 모습들을 알려준다.


등장인물을 말하려면 일본 이름과 우리말 발음 이야기를 짧게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책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다하라 히데키였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타하라 히데키였다. 일본어 히라가나 ''를 소설 번역가가 '다'로 쓴 것이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일본어를 2년째 배우고 있는 지금은 이 선택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그냥 '타' 라고 쓰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히가 마코토 역을 맡은 배우 고마츠 나나는 예전에는 계속 고마츠 라고 소개되었는데, 최근에는 코마츠 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워낙 오랫동안 고마츠 라고 읽어오다가 갑자기 코마츠 라고 읽으려니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히데키의 아내도 소설에서는 가나 라고 나온다. 하지만 일본어로 인물정보를 찾아보면 히라가나 '' 로 나온다. 일반적인 발음으로는 카나로 읽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실 일본어 발음이 우리나라 글자로 정확하게 타도 아니고 다도 아니다. 코도 아니고 고도 아니며, 카도 아니고 가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디쯤의 발음일텐데, 이걸 번역자와 편집자가 다와 가를 선택했다고 뭐라 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암튼 그래서 일반적인 이야기였다면 주인공이 되었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1부의 서술자인 타하라 히데키부터 인물 이야기를 해보자. 히데키는 아주 전형적인 유부남이라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제의 수혜를 가장 잘 누리고 있는 일본 남성. 일본 영화나 소설에서는 남성들도 곧잘 요리를 하고 집안 일을 하던데, 이 사람은 그러지 않는다.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블로그에 자신이 육아 아빠라고 잘난 척을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렇게 사랑한다는 딸을 돌보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블로그에 자신이 멋지게 육아를 해내고 있다고 거짓 일상을 올린다. 마치 인스타그램 등 SNS 에 멋진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거짓 삶을 전시하는 현대인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소설에서는 처음에 마치 이 인물이 정말 육아를 비롯한 집안 일을 잘 하고, 아내인 카나에게 잘 해주는 인물인 것처럼 나온다. 나중에 마치 반전처럼 사실은 얘가 빌런이었어 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싸한 느낌이 들도록 보여준다. 소설에 없는 이야기인 오프닝 장면의 어린 소녀가 히데키에게 너는 거짓말쟁이잖아 라고 말하는 부분이 딱 그런 부분이다. 사실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히데키의 삶은 거짓 투성이였다. 소설에서는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소를 종종 다녔던 것으로 드러나고, 영화에서는 같은 회사 여직원과 불륜 관계였던 암시가 나온다. 안타깝게도 소설과 영화에서 모두 카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소설과 영화 모두 히데키의 과시욕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보여준다. 사랑하는 치사가 다쳤을 때, 히데키는 구급차를 부르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지만, 블로그에는 자신이 침착하게 잘 대처했다고 적는 모습이 나온다.


나는 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육아휴직을 신청했었다. 당시 내가 일했던 단체에서는 매우 선진적으로 남성 활동가에게 육아휴직 6개월을 유급으로 보장해주는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육아휴직을 신청하자 상급자는 단체 사정을 설명하며, 무급이라고 했다. 뭐,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유급은 바라지도 않았었다. 그저 6개월이라는 기간을 보장해주는 것이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활동가였던 내 급여는 너무 적었고, 아내가 버는 돈이 훨씬 더 많았다. 내가 육아휴직을 해서 아이를 돌보고 아내가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출산 후 짧은 기간 몸을 회복한 후에 일을 했고, 내가 아기와 하루종일 지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느 여성 잡지 기자가 전화 인터뷰를 해서 짧은 기사를 내기도 했었다. 나는 환경 분야 활동가였기에 시중에 판매하는 일회용 종이 기저귀 대신 천 기저귀를 빨아서 썼다. 육아는 정말 힘들었다. 옛날 어르신들이 아기 볼래? 밭 맬래? 라고 물으면 당연히 밭 매러 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 인생의 첫 아이였던 큰 아이와 지내는 하루 하루가 참 좋았다. 당시에 나도 일상 이야기를 끄적이곤 했던 블로그가 있었으나 온갖 집안일로 바쁜 하루를 보내느라 블로그를 쓸 여유는 없었다. 6개월의 육아휴직이 끝나고 단체에 복귀한 이후에도 나는 아내와 비슷한 비중으로 육아와 집안일을 하려고 애썼다. 물론 쉽지 않았고, 잘 지켜지지 않았다. 아마 아내가 70이나 80 정도 했을 것이고,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30이나 20 정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새벽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화장실에 쌓여있는 천 기저귀들을 빨아서 삶아 놓고 잠들었고, 새벽에 아기가 깨서 울고 보채면 분유를 타서 먹이기도 했다. 나보다 훨씬 더 힘든 아내를 위해 뭐라도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잘난 척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체 집안일과 육아의 1/3 정도 간신히 했을 텐데, 동네에서는 마치 내가 혼자 아이를 다 키우는 것처럼 소문이 돌았다. 평일 중 이삼일 저녁에 내가 아이를 맡은 날이면 아이를 데리고 여기저기 회의를 다니고, 행사를 다녔던 탓이다. 나는 아기를 업고 집회를 나갔고, 행진 도중 큰 건물 화장실을 찾아가서 기저귀를 갈았다. 길바닥에 앉아서 분유를 먹였고, 아기를 안은 채로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에 쫓겨 다녔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노력했어도 아내는 너무 힘들어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육아와 가사노동에 동참해도 결국 그 힘든 일의 주체는 여성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동네에서 늘 내가 아기를 데리고 다닌다고 소문난 우리 집이 이런 상태였는데, 히데키 처럼 말만 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면 카나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쉽게 납득할 수 있다. 히데키는 심지어 본인이 생각하는 완벽한 엄마의 모습을 카나에게 강요하기도 했다.


이렇게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을 건드리고, 현대인의 허세와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의 가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히데키는 게다가 자신의 할아버지처럼 폭력적인 모습도 보였다. 나중에 마코토가 부인과 아이에게 잘 해야 그것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충고 했을때 미친듯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실은 거짓으로 육아를 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자신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히데키에게 그것이 오는 이유는 사실은 저주 때문이었다. 영화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소설에서는 그 이유가 확실하게 밝혀진다. 히데키의 할아버지가 휘두르는 폭력과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히데키의 할머니가 저주를 담은 부적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것이 히데키의 집안에 들러붙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반 이후로 가면 히데키의 친구인 민속학 교수가 또 다른 저주가 담긴 부적을 카나에게 사용한다.


즉,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것은 가정 폭력과 가부장 제도의 모순 때문에 나타났던 것이다. 물론 소설의 제목에서부터 보기왕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그 이름은 스페인 선교사들이 일본에 오면서 함께 온 부기맨 이란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원래 히데키의 할아버지기 살았던 시골 동네에서는 그것의 이름이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원래 입에 담아서는 안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가 이름을 말 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과 비슷한 이유였으리라.


타하라 카나는 고아였다. 가족이 없이 자랐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틀에 대한 결핍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술과 담배에 의존하며 아이를 전혀 돌보지 않는 엄마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들이 나오는데, 결혼식 장면에서만 짧게 나올 뿐 전혀 비중이 없다. 차라리 원작처럼 그냥 고아로 설정하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왜 설정을 바꿨는지 모르겠다. 암튼 카나는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히데키의 집안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그럼에도 히데키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 착각했던 것 같다. 카나는 히데키의 거짓 인생에 질려하면서도 치사를 어떻게든 잘 키우고 싶어했다. 소설에서 카나는 딱히 흠잡을 곳 없는 인물이다. 2부에서 그것의 습격을 받고 큰 충격을 받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는 하지만, 결말에서는 다시 치사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카나는 히데키 못지않은 빌런으로 나온다. 히데키가 회사 여직원과 불륜을 저질렀던 것처럼 카나는 히데키의 친구인 민속학 교수와 몸을 섞는다. 마코토가 치사를 돌보다가 그것의 습격을 받는 순간 카나는 그 교수와 함께 침대에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히데키의 죽음을 좋아하는 모습을 소설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 치사에게도 화를 내며 폭력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카나도 죽여버린다. 영화에서 쿠로키 하루 라는 배우가 연기했는데, 아주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3부의 서술자인 노자키 카즈히로는 아마 히데키와 비슷한 연배일 것으로 추측된다. 노자키가 마코토와 함께 히데키의 집을 찾아갔을 때 카나에게 자신이 히데키의 시골 친구라고 말하고, 마코토는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영화에 나온다. 노자키는 오컬트 작가라고 하는데, 여기저기 소수의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프리랜서다. 영화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에서는 꽤나 성실하게 취재하고 자료를 조사하는 모습들이 나온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무정자증이라 이혼을 한 것을 나오고 그래서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을 그려진다. 영화에서는 전 여친이 임신 사실을 알리자 낙태를 강요한 인물로 나온다. 그리고 영화와 소설 모두 현재 마코토에게는 아주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소설 기준으로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남성 등장인물 중에 가장 괜찮은 인물이며, 마지막에 그것의 습격에 맞서 싸워 살아남는 진짜 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오카다 준이치 라는 배우가 연기했는데, 외모가 성격과 딱 들어맞는 모습으로 나온다.


히가 자매는 사와무리 이치 작가가 이후에도 다른 작품에서 계속 다루는 인물들로 작품 전체로 보면 비중이 많지 않지만, 그것에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주인공이다. 일반적인 소설이나 영화였다면 이들이 주인공을 맡았을 것이다. 알라딘에 보니 히가 자매 시리즈가 총 5개 있다고 나온다. 이 소설이 첫 등장 작품이다. 나중에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 언니이자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무녀인 코토코는 아주 비밀스러운 인물로 그려진다. 위험한 일을 해온 덕분에 온 몸에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흉터들을 갖고 있다. 작중에서 유일하게 그것에 대적할 수 있는 인물로 나온다. 소설에서는 혼자 그것을 물리친다. 그래서 이후에 다른 작품에도 계속 등장하는 것이겠지. 영화에서는 백여명 가량의 조력자들을 소집하는데, 거기에 한국 무당들의 모습도 보여서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코토코가 결국 그것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많은 양의 피가 튀는 장면 묘사가 끝이라서 코토코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 듯하다. 영화에서는 마츠 타카코가 연기했다. 이 영화를 연출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전작 [고백]에서도 주연을 맡았었다. 이 영화만 봤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알고보니 그 옛날 이와이 슌지 감독의 [4월 이야기]의 그 주인공이었다.


히가 마코토는 저녁에 바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언니인 코토코를 동경해 영능력을 연마했지만, 실력은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그려진다. 어떤 사정으로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인데, 그래서 더 아이들을 좋아한다. 처음 히데키가 방문했을 때 그를 간파했고, 그의 거짓 삶이 그것을 불러들인다는 사실을 인지해 조언했다. 히데키가 크게 화를 내고 가버렸지만, 현장을 확인하고 싶다며 노자키와 함께 히데키의 집을 방문해 치사를 만났다. 이후 치사를 돌보며 지켜주는 수호천사 같은 역을 수행한다. 치사가 그것에 끌려갔어도 결국 나중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마코토가 치사에게 준 은반지 덕분이었다. 기분에 따라 자주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에서는 코마츠 나나가 연기했다. 와! 청순한 소녀 이미지를 주로 연기했던 나나가 이런 연기 변신을 한 것은 좀 의외였다. 코마츠 나나는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전작인 [갈증]에서 주연을 맡았었다.


영화의 감독인 나키시마 테츠야 이야기를 짧게 하자. 일본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보지 않았는데, 의외로 이 감독의 영화를 여럿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서 언급한 [고백]과 [갈증] 그리고 이 영화 [온다]까지 세 편을 보았다. [불량공주 모모코]는 보려고 마음 먹고 있는데, 아직은 손을 대지 못했다. CF 감독 출신이라고 하고 그래서 영상을 기가 막히게 예쁘게 잘 찍는다고 한다. 이 영화의 오프닝도 자신의 장기를 잘 살려 멋지게 뽑아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고백]은 꽤 인상적인 영화였고, 잘 만든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갈증]은 조금 아쉬운 부분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괜찮은 영화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 [온다] 역시 나쁘지 않았다. 물론 공포영화라는 측면에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원작을 생각하면 또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괜찮은 점수를 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로 [온다]를 보면서 이 감독이 장면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많은 것을 담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고백]과 [갈증]도 한번씩 더 보면서 각 장면의 구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영화에서 시작해 책으로 이어지고 다시 영화로 돌아온 재미있는 여정이었다. 책은 예상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웠고, 다시 본 영화는 기억보다 조금 더 아쉬웠다. 이어서 사와무라 이치의 히가 자매 시리즈 중 다른 작품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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