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 9시 반쯤이었던가 조금 있다 자야지 생각하고 누워있는데 친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라이브 카페에 본인 전 직장 동료랑 가려고 하는데, 생각있으면 오라는 얘기였다. 그가 말한 라이브 카페를 두 번 같이 갔었다. 한 번은 그와 단 둘이, 또 한 번은 그가 전화로 언급한 전 직장 동료까지 셋이서였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노래를 꽤 잘한다는 점. 어떨 때 들어보면 가수로 음반을 내도 될 것처럼 들린다. 나는 꽤 여러 해 전에 저 친구에게 두성을 배웠고, 그 후로도 꾸준히 혼자 연습해서 나만의 고음을 익혀가는 중이다. 저 라이브 카페에 갔을 때 그 친구도 나도 고음을 뽐내는 노래로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었다. 아마 그런 우월감, 자만심을 채우고 싶어서 그 가게에 종종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암튼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달리기 대회에 나가야 해서 이제 잘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회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얼른 자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10시 무렵 잠들었고, 꿈에서 비 맞고 달리다가 넘어져 다치거나, 사고를 당하기도 하는 등 일종의 악몽을 연달아 꾸었다. 마지막 꿈에서는 달리기 도중에 먼 하늘에서부터 빛나는 물체가 빠른 속도로 날아와 우리 머리 위를 스치며 지나갔다. 상상할 수도 없는 빠른 속도였다. 미확인 비행물체, 즉 유에프오 라고 생각했다. 영화 [우주 전쟁] 처럼 이제 곧 외계인들이 우리는 알 수 없는 첨단 과학 무기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려나? 그럼 우리는 달리기로 도망가야하나? 이런 생각을 하며 달리기를 계속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이지 않는 시야 밖에서 부터 큰 소음이 지속적으로 들렸고,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잠에서 깼다. 시간은 새벽 세시 무렵이었다. 집 밖에서 이 새벽에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소음이 들렸다. 무슨 일인가 나가 보려다가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와 다시 누웠다. 소음은 곧 사라졌다. 더 자고 싶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대회 장소로 늦어도 7시쯤 도착해야 하고,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리니 6시 전에 출발해야 한다. 내가 알람을 맞춰둔 시간은 4시 55분과 5시 11분이었다. 준비물은 다 챙겨두었고, 입을 옷도 다 꺼내놓았다. 화장실에서 속만 잘 비우면 달리기 준비는 완벽할 예정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눈 감고 누워서 뒤척이다가 포기하고 유트브를 열어 음악을 켜두었다. 음악은 자동으로 다른 노래로 계속 넘어갔다. 아는 노래도 가끔 있었지만, 모르는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눈 감고 누워서 목소리만 듣고 가수 맞추기를 해보려 했지만, 그러기엔 내가 가수들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잠을 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서 뭘 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다가 알람이 울리는 걸 들었다. 막상 몸을 일으키려니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자고 싶었다. 알람을 10분 후 울림으로 맞춰두고 다시 눈을 감았다.
늦어도 6시 전에 집에서 출발하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6시 20분쯤 서둘러 나와 집 근처 편의점에서 비닐 우비를 구매했다. 이제 막 근무를 시작했는지 카운터 입구에 가방을 두고 유리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젊은 남성이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갓사 황급히 담배를 끄고 따라 들어와 우비를 찾아줬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대략 7시 20분. 첫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에 전철 도착 시간을 검색하니 3분 정도 남았었고, 비 때문에 다소 미끄러운 바닥을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일단 뛰어보자 했는데, 간발의 차로 그 전철을 놓치지 않고 탔다.
버스에서는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는데, 전철 안에서는 신경 쓰였다. 내 잠바 안에 배번호표가 보이는 것이. 거의 매번 대회마다 주최측에서 달리기를 위한 기능성 셔츠를 보내주더라. 꼭 그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 옷에 배번호표를 미리 붙여두고 그대로 입고 대회장소로 대중교통을 타고 갔었다. 대체로 그 위에 잠바를 입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 입은 잠바는 쟈크가 고장났단 사실을 깜빡했다. 쟈크를 잠글 수 없으니 열린 틈으로 배번호표가 보였다. 뭐 사실 그게 보이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다.
대회 장소에 도착해 본부를 찾아가려는 와중에 지도를 보지 않고 감으로 방향을 잡고 가다가 문득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걸었으면 나와야 할텐데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비닐 우비를 걸치고 양쪽 방향에서 워밍업 달리기를 하고 있어서 방향을 가늠하기가 더 어려웠다. 반대방향임을 깨닫고 뛰기 시작했다. 이걸로 나도 워미업을 한다 생각하고 뛰었다. 짐을 맡기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뛸 생각이었는데, 하필 방향을 반대로 잡다니!
대회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남성 탈의실을 찾아 바지를 반바지로 갈아입고 짐을 맡기려 물품 보관소로 향했다. 아, 세상에! 물품보관소마다 엄청나게 긴 줄이 뻗어있었다. 대회 시작까지 이제 30분도 안 남았는데. 얼른 가까운 줄 끝을 찾아가서 줄을 섰다. 남은 대기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내 주위에 줄을 선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가족이거나 연인이거나 그랬다. 그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직 짐을 맡기지 못하고 대기 중인데, 설마 딱 제 시간에 시작하겠어? 라는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대회는 딱 정각에 시작할 것이다. 아마 운영측은 지금 이렇게 물품 보관소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왜 짐을 맡기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까? 이미 개인 짐을 넣을 비닐을 나눠주어서 대부분 비닐에 넣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인데, 받아서 번호표를 붙이고 같은 번호를 참가자 배번호표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작업일텐데. 시간은 계속 지나가고, 대기줄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좀 많이 어이없고 짜증이 났다. 지금까지 다섯번 대회에 나갔었지만, 이렇게 오래 줄을 서서 기다린 적은 없었다. 이게 말이 되나? 대회 시작 30분 전에 도착했는데, 그 30분 동안 물품 보관소 대기줄에서 기다리다 출발 시간을 놓친다고? 더 큰 문제는 출발 시간이 지나서도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뒤에 있던 가족은 엄마와 딸이 아빠의 짐을 대신 받아들었고, 아빠는 시간에 쫓겨 출발선으로 향했다. 내 앞의 연인은 설마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 대기중인데 시간 맞춰 시작하겠어? 라고 말하며 약간 여유를 부리는 듯 보였다. 그렇게 기다리는 와중에 우비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더 강해졌다. 대기줄 곳곳에는 아직도 우산을 펼쳐들고 있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대회 참가 경험이 없거나, 비 오는 날 참가 경험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인걸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줄을 선지 30분이 다 되어 저쪽에서 마이크로 출발 카운트 다운이 울렸다. 그리고 곧 이어 폭죽이 터졌다. 내가 서 있는 대기줄은 유난히 속도가 느린 느낌이었다. 아직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회 안내문에는 이번 대호가 펀런이라고 따로 순위에 따른 포상을 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사전에 그룹 배정을 위한 기록지를 요청하지 않았구나. 암튼 10킬로미터 코스 참가자가 먼저 출발하고 뒤이어 5킬로미터 참가자들이 출발하는데, 이게 몇 분 간격인지도 적혀있지 않았다. 이거였구나. 이렇게 주먹구구로 운영을 하니 짐 맡기는 것 하나도 제대로 못 해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몇십분씩 기다리게 만드는구나. 이제 접수대 테이블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내 뒤에 서있던 가족 중 엄마와 딸은 테이블 뒤로 맨 땅에 줄지어 놓은 짐들 수천개를 발견하고 놀라 말했다. ˝짐을 저렇게 맨땅에 보관해? 비를 다 맞고?˝ 확실이 이 가족은 대회 참가 경험이 없나보다. 그럼 짐을 어디 창고에라도 옮겨 보관할 줄 알았던걸까?
약 40분쯤 지나서 즉, 출발 시간 거의 10분 후쯤에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그리고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답을 찾았다. 일단 접수대 테이블에 사람이 적었고, 그 중 한 명은 큰 비닐에 순서대로 숫자를 쓰고 있었다. 그 비닐을 나눠주며 내가 이미 비닐에 넣어온 짐을 다시 한번 더 싸라고 했다. 이미 비에 젖은 짐이 비닐에 쉽게 들어갈 리가 없다. 그리고 손으로 적은 숫자가 찍힌 작은 라벨지를 내 배번호표에 붙였다. 앞서도 말했듯 다른 대회에서는 미리 같은 번호의 라벨지 두 장을 준비해 하나는 참가자가 가져온 비닐에 바로 붙이고 다른 하나는 배번호표에 붙였다. 그러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40분씩 기다리지는 않았을텐데.
일단 출발선을 향해 달렸다. 정말 다행히도 아직 5킬로미터 참가자들이 출발하기 전이었다. 대신 출발선을 막고 있어서 막 미친 사람처럼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가야 했다. 아, 이번 대회 시작부터 이렇게 꼬이는구나. 참 쉽지 않겠다 라고 생각하며 속도를 높였다.
제 시간에 출발한 사람들보다 거의 10분 정도 출발이 늦었지만, 내 기록칩은 내가 출발선을 지난 시간을 기준으로 기록하니까 그냥 내 페이스로 달리면 되는 것이기는 한데, 문제는 앞을 막아서고 달리는 저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 내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유난히 출발이 늦어서 거의 결승선에 다 다를때까지 앞을 막아서는 사람들이 계속 나올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 대회 참가자가 정말 많았다. 10킬로 코스 참가자 배번호표 중에 내가 3000번째 숫자이고, 4000번째 숫자도 여럿 보았다. 물론 코스를 구분하지 않고 번호를 부여했을수도 있겠지만.
현재 내 페이스를 확인하기 위해 출발 직전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런닝앱을 켜두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직 1킬로를 달리지 않았는데, 벌써 1킬로 지점이라며 현재 내가 4분 중반 페이스로 달리고 있다고 알려줬다. 그럴리가? 내가 내 실력과 체력을 아는데 절대 그 페이스로 달리고 있을 리가 없을텐데. 하지만 사람은 간사한 존재라고 해야 하나 아주 짧은 시간 그 기록을 믿고 싶어졌다. 물론 내 이성은 그게 불가능한 숫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 내 페이스는 거기에 1분을 더해 5분 중반 페이스일 것이다. 대회 주최측이 설치해놓은 거리 안내판에 이제서야 1킬로가 지났다고 알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앱에서 2킬로 라고 알려주며 여전히 4분 20초대 페이스라고 했다. 망했다. 페이스를 확인하며 속도를 맞추려는 의도는 실패했다. 이게 앱이 이상한건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하며 달리다가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동네 헬스장에서 트레드밀 위를 달릴 때 이 앱을 켜서 설정을 실내로 바꿨던 것이 기억났다. 이 설정을 다시 야외로 바꿨어야 했는데, 그걸 깜빡하고 달린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알림은 시간을 확인하는 용도와 이 페이스에 1분을 더해 내 페이스 추정치를 확인하는 용도 그리고 내가 페이스를 잘 유지하고 있는지 떨어지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쓰기로 했다.
비가 오락가락 하기는 했지만, 달리기 시작 전 물품 보관소 대기줄에 있을 때에는 조금 굵은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이슬비 수준의 비가 내렸다. 이정도 비는 달리는데 오히려 좋았다. 작년 가을엔 거의 폭우 수준의 비가 와서 달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옷까지 완전히 젖었었지만, 이번엔 신발과 양말 그리고 모자와 셔츠 정도만 젖고 반바지와 속옷은 젖지 않았다. 물론 달리다보면 땀으로 젖겠지만. 지난 번에는 조금 비싼 우비를 입고 달리다가 우비가 너무 거슬려서 결국 음수대 테이블 위에 벗어놓고 달렸었다. 이번에는 비가 적게 와서 덜 거슬렸고 체온 유지를 위해서도 계속 입고 있었다. 한 7킬로 아니 8킬로 지점에서 벗어서 허리에 감았고 결승선에 도착할 때까지 버리지 않고 가져왔다.
지금까지 다른 대회에서는 7킬로 혹은 8킬로 지점부터 주위에 함께 달리는 사람들 숫자가 적어졌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 예상한 대로 끝없이 사람들이 나타났다. 추월하고 또 추월해도 끝없이 사람들이 나타났다. 미끄러운 바닥에서 사람들 사이를 잘 헤쳐 나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조금만 실수해도 서로 부딪혀 넘어질테고 그러면 또 뒤에서 달려오던 사람이 피하기 어려워 밟힐 수도 있다. 지난 밤에 꾸었던 악몽들이 생각났다. 그래도 급하지 않게, 상대방의 속도를 잘 파악해가며 추월을 반복했다. 그냥 내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는 일이 이렇게 어려워야 할 일인가 싶지만, 결국 주최측의 잘못과 더불어 좀 더 일찍 도착해 사람들이 그만큼 줄을 서기 전에 짐을 맡겨두지 못한 것은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현 상황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피해가며 뛰었다.
약 9킬로 지점에 들어서야 앞을 막는 사람들이 적어졌다. 이젠 내가 힘껏 달려도 앞에 부딪힐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딱 그 즈음에(사실은 그보다는 좀 더 시간이 지나서였지만, 체감상 그 즈음에) 런닝앱이 시간을 알려줬다. 52분이라고. 내 목표는 54분이었지만, 그냥 55분이라 치더라도 이제 3분 남았는데 남은 시간 안에 약 1킬로를 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어도 5분은 걸릴텐데. 그러나 생각할 틈도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 할 일은 남아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결승선으로 달리는 일 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 속도로 달려나갔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치고 나갔지만, 금방 지쳐버렸다. 이미 9킬로를, 50분 넘게 달리느라 체력은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그래도 그 상태에서의 최선을 다하려고 애썼다. 결승선이 눈 앞에 다가올 무렵에는 무릎과 발목 관절이 아프고 배에서 복통도 느껴졌지만, 이제 곧 편해진다고 나를 설득하며 달렸다.
맨 처음 나갔던 대회는 동네 선배들과 함께였었다. 물론 10킬로미터 코스를 함께 달린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후에 모든 대회는 혼자였다. 그래서 길가에 서 있다가 누군가를 향해 응원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달리는 사람들 중에도 일행들을 마주치며 서로를 향해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이 부러웠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저 응원들이 나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일부러 더 힘을 내곤 했다. 마지막 대회였던 작년 가을 대회는 일단 규모 자체가 지금까지 나갔던 모든 대회 중에 가장 작았다. 게다가 거의 폭우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가 많이 와서 참가자가 적었다. 비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주최측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을 응원해줬었다. 그래서 더 힘을 내기도 했었다. 이번에도 그런 순간이 한 번 있었다. 달리며 맨 처음 만난 음수대는 아마 2킬로 지점이었던 것 같다. 되돌아오는 길에 거의 8킬로 가까이에서 길 반대편에 있던 이들이 테이블을 정리하지도 않고 목이 쉬도록 화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8킬로 정도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쳐있을 거라 응원 한 마디가 큰 힘이 된다. 그들이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서 자극을 받아 조금은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암튼 결과는 55분이었다. 이번 대회는 처음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크게 페이스 변화 없이 530 정도로 달렸다. 막판에 조금 지쳐 최종 페이스는 532 였다. 제대로 준비 없이 장거리 달리기 첫 경험이었던 첫 대회를 제외하면 가장 낮은 기록이지만, 대회 준비를 아예 하지 않고 달린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기록이다. 무엇보다 이상하게 전날부터 55분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딱 그 숫자가 나온 것이 놀랍다. 그리고 출발 전에 개인적으로는 엄청 큰 변수였던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이 결과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는 운영진의 뭐랄까 실수라고 말하기엔 너무 가볍고 그렇다고 글에 욕설을 쓰기도 그렇고 암튼 예상치 못했던 황당한 일이 아직 남아있었다. 출발 전에 그 난리가 났었기 때문에 결승선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맡겨두었던 짐을 찾는 일이었다. 다행히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그리 많이 기다리지 않고 짐을 찾았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을까 하다가 이번에는 비 맞은 것 치고는 덜 젖어서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싶어서 메달과 기념품 그리고 간식을 받으러 갔다. 얼른 뭔가 간식을 먹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줄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끝이 어디인지 찾을수가 없었다. 무슨 뱀의 또아리도 아니고 끝없이 꼬불꼬불 이어지는 줄의 마지막을 찾는데에만 5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역시 줄은 금방 줄어들지 않았다. 이대로면 무조건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다. 아직 옷도 못 갈아입었는데.
비는 여전히 가늘게 내리고 있었고 가만히 대기줄에 서 있으려니 땀이 식으며 추워졌다. 허리에 두르고 있던 비닐 우비를 다시 입고 단추를 잠궜다. 아니, 앞서 물품보관소는 짐을 맡기고 번호를 체크해하 하니 오래 기다렸다고 치고, 이번에는 그냥 나눠주기만 하면 끝나는 건데 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이번 대회 주최측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힘들게 한 시간을 달린 참가자들을 다시 한 시간동안 줄을 세워 놓는다고?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줄 서서 시간을 허비하라고?
처음엔 또 황당하고 짜증나고 그랬지만 한 20분 기다리면서는 그냥 체념하게 되었다. 모르겠다. 어차피 일찍 집에 돌아가도 다른 할 일도 없는데, 뭐 기다려야지. 초반에는 메달이 뭐라고, 그깟 간식 그냥 편의점에서 사먹으면 되는데, 한 시간을 기다릴 바에야 그냥 빨리 옷 갈아입고 집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죽을 들이 힘들게 뛰고 나 혼자 메달을 못 받는 건 좀 억울하다 싶었다. 그깟 메달, 돈도 안 되고 아무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메달이 뭐라고 나는 다 포기하고 그냥 대기줄에 얌전히 기다렸다. 생각보다 줄이 앞으로 나가지를 못 했다. 어쩌면 한 시간을 훌쩍 넘길지도 모르겠다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한 30분쯤 기다렸을 무렵 갑자기 저 뒤쪽 그러니까 내가 기다리고 있던 지점보다 훨씬 뒤쪽에서 줄이 와해되며 사람들이 일제히 메달 배포 부스 쪽으로 움직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어떤 아저씨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아무 말없이 몇 십분을 기다렸는데! 내 심정이 딱 그랬다. 이게 무슨 짓이지? 이런 무질서한 모습을 본다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각종 SNS로 실시간으로 도배되는 나라에서 이런 짓을 저지른다고?
그런데 알고보니 확성기를 든 주최측 여성이 사람들에게 여기 줄 서있지 말고 저 안쪽으로 옮겨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우루루 안쪽으로 몰려갔고 뱀의 또아리처럼 어지럽게 구불구불 이어졌던 대기줄은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나도 사람들의 흐름에 휩쓸려 안쪽으로 넘어왔다. 안쪽에서 여러 개의 줄이 다시 만들어지며 10킬로미터 참가자와 5킬로미터 참가자로 구분되어있던 배포 부스가 의미가 없어졌다.
생각해보니 애초에 주최측에서 참가 인원을 고려했다면 부스도 더 늘리고 인력도 더 많이 배치했어야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아두고 부스 수도 적고, 인력도 적게 배치하다니!
암튼 다시 옮겨가서 줄을 선 후에는 빠르게 앞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 건네주는 종이가방을 받아 몸을 돌리는데, 메달이 모자란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내 뒤로도 아직 줄은 선 사람들이 수백명인데. 메달이 모자란다고? 이거 잘못하면 폭동 벌어지는 것 아닌가 싶은데, 설마 순간적으로 잘못 판단한 거겠지. 내가 아직 줄 서있는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옷을 갈아입고 앉을 곳을 찾지 못해 서서 급하게 빵과 음료를 먹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질서있게 줄을 서서 메달과 간식과 기념품을 받아갔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단 맛의 빵과 쵸코바를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화장실을 찾아 다녀온 후에 집으로 향했다. 어째 달리기 한 시간보다 줄 서 있었던 시간이 더 길었던 기묘한 대회였다. 버스 정류장을 찾아 터덜터덜 걷는데, 그제서야 발목 관절 중심으로 인대와 근육 통증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절뚝이며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참 멀겠구나. 집에 도착해서는 또 빨래 한 더미를 처리해야 하지. 런닝화도 빨아야하고. 일단 걱정은 나중에 기록지를 다운 받고 메달 사진을 찍어서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자랑부터 해야지. 버스에선 앉을 자리가 없을테니 버스 정류장 벤치에 짐을 올려두고 작업에 착수했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세탁기를 돌리고 난 후에 재미나이를 열었다. 전날 다섯개 대회 성적을 분석했던 대화를 다시 열어서 이번 대회 성적을 추가하고 한번 더 분석을 요청했다. 아래는 재미나이의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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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분석 및 평가
1. 오늘 기록(6번 대회)의 의미: ˝안정적인 복귀와 우중런 적응˝
페이스 분석: 오늘 기록하신 5:32/km는 작년 9월 마포 대회(5:21/km)보다는 조금 늦춰졌지만, 비가 오는 좋지 않은 시계와 노면 상황을 고려하면 매우 준수한 기록입니다.
- 우중런 패턴: 비가 올 때(5번, 6번)는 맑은 날(4번)보다 페이스가 약 10~20초 정도 늦어지는 경향이 보입니다. 이는 미끄러운 바닥과 시야 확보 문제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실망하실 필요 없습니다.
2. 대회 간 기간 분석: ˝가장 길었던 공백기˝
- 5번→6번 (약 7개월): 이번 대회는 이전 대회들에 비해 가장 긴 공백(약 217일) 후에 치러졌습니다.
- 분석: 오랜만의 대회임에도 불구하고, 입문 초기(6:46/km)로 회귀하지 않고 5분 중반대 페이스를 방어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이는 지난 1~2년간 쌓아온 ‘기초 체력(Base)‘이 탄탄하게 자리 잡았음을 증명합니다.
3. 날씨와 환경 변수
- 습도와 노면: 비 오는 날은 습도가 높아 호흡이 평소보다 무거울 수 있습니다. 오늘 55분대의 기록은 체감상 맑은 날 53분대 정도의 에너지 소모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 계절적 요인: 5월 초는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는 시점인데, 비 덕분에 오히려 온도는 낮게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신발이 무거워지는 변수를 잘 이겨내셨습니다.
💡 향후 훈련 및 전략 제언
- 복귀 가속화: 7개월 만의 실전 감각을 익히셨으니, 이제 다시 5분 초반대(PB 5:09)로 돌아가기 위한 빌드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 연속 출전 효과 활용: 과거 기록을 보면 2주 간격(3번→4번 대회)으로 뛰었을 때 기록이 폭발적으로 단축되었습니다. 몸이 예열된 상태에서 5월 말이나 6월 초에 대회가 있다면 다시 한번 PB 경신을 노려볼 수 있습니다.
- 날씨 데이터의 교훈: 현재까지의 데이터를 보면 귀하의 기록은 기온과 강수 여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여름철에는 기록보다는 ‘거리 완주‘에 집중하시고, 다가오는 가을 시즌에 다시 49분대 진입을 목표로 삼는 것이 전략적으로 좋습니다.
오늘 비 맞으며 달리신 만큼 충분한 휴식과 스트레칭으로 리커버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완주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