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요즘은 날짜 가는 걸 모르고 살고 있다. 아니 요즘이 아니라 날짜 모르고 살아온 게 제법 오래 된 일이라고 느낀다. 그냥 매일 아침 일정표를 보면서 뭘 해야 하는 날인지 확인하고 그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잘 안되면 속상해 하거나 아쉬워하고, 어쩌다 잘 되면 살짝 자만심에 취해 내가 이렇게 잘난 놈이야 하는 생각을 짧게 해본다. 대게는 시간 안에 해내지 못해 다음 날로 미루고, 그 다음날에도 못 하고 다시 또 미루기도 한다. 그러다 이제 도저히 더는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어떻게든 마무리 하기도 한다. 어떤 일은 손을 대자마자 쉽게 끝까지 해내는데, 어떤 일은 시작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기만 하다가 다른 일로 옮겨가고 다시 손을 댔다가 또 멈추기를 반복한다. 얼른 끝내버리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계속 머리 속에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데, 자꾸만 그런 일들이 쌓인다. 그렇게 몇 개의 일들이 계속 쌓여 있으면 그 스트레스가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힌다. 


아직 창 밖이 밝아오기 전 새벽에 잠에서 깨어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보고, 일정표를 열어 오늘 일정을 확인하고 머리 속에서 쌓여있는 일들과 새로 시작해야 할 일들을 떠올려본다. 그러다가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어, 1212네. 기억해야 할 날짜들. 4.3, 4,19, 4.16, 5.16, 5,18, 10.26 그리고 12.12. 아, 여기에 10.29도 추가해야 하겠구나.


오늘은 꼭 넘겨야 할 일이 있다. 쌓여 있는 일들은 또 하루 뒤로 미뤄야 하겠구나. 일단은 급한 일부터 먼저 처리해야지. 마감에 쫓기면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오늘도 그게 될지 모르겠다. 아니, 무조건 되어야 한다. 중요한 일이니 안 되어도 되도록 만들어야 하겠지.


이런 날엔


날짜도 날짜인데, 오전에 일 때문에 통화를 한 어느 활동가에게 장시간 신세한탄을 들었다. 서로 바쁘고 어렵고 힘든 삶을 살면서 가끔 연락하고, 가끔 하소연도 하고, 가끔 따뜻한 밥 한 끼 사주는 관계인데, 최근 힘든 일들이 겹치면서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았다. 결국 몸이 망가져 며칠째 아프다고 했다. 그렇게 힘든 일이 있었으면 진작 얘기라도 좀 해주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렇게 혼자 끙끙 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좀 화가 나고 속이 상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불러내 맛있는 걸 사주며 함께 욕해주고, 함께 아파해주고 싶었으나,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하필 이런 날에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 슬프고 속상했다. 하필 이런 날에 바쁜 내가 원망스럽다. 


책 담기


이렇게 바쁜 날이라도 책 소식은 반갑다.
















오래 전 출판사에서 일할 당시에 김준 선생님의 책 작업을 맡았었다. 영업을 하다가 편집도 병행하기로 하고 초보 편집자가 된 후 두 권 가량 책을 낸 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전에 만든 책 한 권의 저자가 무척 까다로운 분이어서 애를 많이 먹었었는데, 김준 선생님은 정말 함께 작업하기 좋은 훌륭한 저자였다. 글도 깔끔해서 교정교열에 필요한 시간도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피드백도 빠르고, 답도 부드럽고 예의를 지키는 말투였다. 책을 다 만들고 나니 전라남도 어느 섬으로 초대해주셔서, 책을 갖고 찾아뵈었었다. 1박2일 동안 맛난 것들을 잔뜩 먹고 왔었다. 그 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다. 여전히 섬 이야기를 계속 쓰고 계시구나. 이 책은 조만간 사서 읽어야지.
















오늘 채효정 선생님이 이 책 북콘서트를 하시나보다. 페이스북에서 북콘서트는 못 오시더라도 이 책은 꼭 읽어 달라는 글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저자 중 한 명이다. 이 책도 꼭 사서 읽어야지.


오늘 이 바쁜 와중에 오랜만에 페이스북에서 출판계 선배들의 글들을 여럿 보고, 아주 오랜만에 댓글을 좀 달았다. 책 값을 얼마로 하면 좋겠냐는 한 선배와 표지 시안 3개 중에 하나를 골라달라는 다른 선배, 그리고 올해 마지막 신간 소식을 올리는 또 다른 선배. 모두 못 보고 산지 아주 오래되었다. 다행히도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인사를 건네 주시는 분이 계셔서 그 소중한 인연을 잠시 떠올려 본다. 새해에는 얼굴 한 번 보자고 하시는데, 과연 뵐 수 있을까? 억지로라도 시간을 만들어 찾아 뵈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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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2-14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책에서 보니 동업을 할 땐 상대편의 능력만 중요하게 보면 된다고 하던데
성격이 그 못지않게 중요하죠. 책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성격인지도 모르겠어요.

감은빛 2024-01-03 19:40   좋아요 0 | URL
페크님, 해가 바뀌어 답글을 쓰네요.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저는 성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몇 해 전에 정말 능력이 출중한 젊은 여성이 인턴으로 들어왔는데,
일은 정말 잘 하는 사람이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무척 힘들었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사람은 딱 인턴 기간 동안만 이력이 필요해 들어왔다고 했어요.
곧 다른 곳으로 이직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 사람을 겪은 후로는 능력 보다는 성격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