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부터 삼성 제품 불매를 실천해왔다. 우리 집엔 삼성 제품은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컴퓨터 하드 디스크나 메모리도 삼성 제품이 아니었다. 오랜 삼성 불매를 접은 것은 작년 말이었다. 태블릿이 필요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딱 내가 원하는 제품을 찾기가 어려웠다. 삼성을 제외한 상태에서는. 근데 삼성 제품을 찾아보니 그냥 바로 나왔다. 어떻게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15년 이상 어쩌면 20년 가까이 이어왔던 삼성 불매를 중단하고 삼성 태블릿을 사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데 그 제품을 포기하면 대안이 없었다. 그 가격에, 그 스펙에, 내가 원하는 기능들을 다 갖춘 제품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 결국 나는 긴 시간 이어왔던 삼성 불매를 그만두고, 삼성 태블릿을 샀다.


어느 회의 자리에서 내가 태블릿으로 회의 안건지에 메모하는 걸 본 지인이 태블릿 샀냐고 물어보더니 내 손에서 태블릿을 뺏어가 살펴봤다. 곧바로 "배신자!" 라는 말이 내 귀에 꽂혔다. 삼성 불매를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던 놈이 어느 순간 삼성 태블릿을 갖고 다녔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는 눈을 흘겼고, 나는 변명으로 내가 원하는 모델을 찾다보니 이것 밖에 없었다고 얼버무렸다.


아무리 견고한 둑이라도 작은 균열이 생기면 순식간에 무너진다. 20년 가까이 이어왔던 내 삼성 불매는 이후 허무하게 무너져버린다. 한번 삼성 제품을 쓰기 시작했더니 더는 거부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은 아닐까. 최근 욕실에서 음악을 듣다가 휴대폰에 물이 살짝 들어가는 사고가 생겼다. 알고 있던 상식대로 전원을 끄고 잘 말렸다가 다시 전원을 켰는데,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았다. 다른 기능은 다 정상인데 전화만 안 되었다. 전화 통화가 되지 않는 전화기. 이만큼 모순적인 단어가 있을까? 국내에는 서비스 센터조차 거의 없는 희귀한 제품이라 수리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능의 폰을 저렴하게 구매해서 2년 정도 사용했기에 제품에 미련은 없었다. 그냥 새로운 폰을 빨리 알아봤다. 삼성의 대안으로 오랫동안 사용했던 엘지는 휴대폰 사업을 접어버렸고, 애플은 내겐 너무나도 먼 그대였다. 가격을 봐도 그렇고 편의성을 생각해도 그렇다. 그 외에 대안은 별로 없었다. 앞서 쓰던 폰이 가성비는 뛰어나지만, 우리나라에는 드문 제품이어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또 같은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래저래 고려하다보니 결국 삼성 제품으로 눈이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작년에 태블릿을 구매했을 때만큼 고민을 많이 했다. 다른 대안이 없는지도 많이 고민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건 삼성 제품일 수 밖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구매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결국 현실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패배감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다. 


시리 VS 빅스비


휴대폰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아이가 시집을 사달라고 요청했다. 폰으로 알라딘에서 주문하고 주문 정보 페이지를 캡쳐해서 아이에게 보내주려고 했는데, 바꾼 지 얼마되지 않은 상태라 캡쳐 버튼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인공지능 빅스비가 있다는 걸 떠올렸다. 빅스비를 호출해서 화면 캡쳐를 요청했다. 빅스비는 곧바로 화면을 캡쳐해줬고, 나는 그 화면을 아이에게 보냈다.


아이는 옆에서 보더니 곧바로 자신의 아이폰을 입 근처에 대고 시리를 불렀다. "시리야, 캡쳐해줘." 시리는 뭐라고 대답을 했는데, 캡쳐는 하지 않았다.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요구했다. "시리야, 화면 저장해줘." 이번에도 시리가 뭔가 답을 하긴 했는데, 캡쳐를 하지는 않았다. 아이는 약이 올라서 계속 시리를 불러 뭔가 명령을 내렸지만, 결국 시리는 캡쳐를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이는 시리에게 "빅스비는 캡쳐 할 줄 아는데, 너는 왜 못 해?" 라고 물었는데, 뭔가 맥락도 없는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이어서 아이는 다시 시리에게 "시리야, 빅스비 알아?" 라고 물었다. 시리는 곧바로 "경청은 좋은 습관이며, 남을 돕는 것은 언제나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답했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답변인가! 그러자 아이는 내 폰을 가져다가 빅스비에게 "시리 알아?" 라고 물었다. 빅스비는 "이름을 워낙 많이 들어 잘 아는 사이 같아요." 라고 답했다.


시리는 아예 빅스비의 존재에 대해 무시하는 답변이고, 빅스비는 시리를 알고 있고 친근감을 느낀다고 답한 것 같다.


이후에 아이들은 틈만 나면 시리와 빅스비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비트박스와 랩을 시켜서 비고해보더니, 빅스비의 완전한 승리를 선언했다. 엊그제는 사진을 찍기 위해 각을 잘 맞춰놓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잘 안 눌러졌다. 순간 빅스비가 떠올랐다. 빅스비를 불러서 "찰칵" 이라고 말했더니 잠시 텀을 두고 사진을 찍어줬다. 오! 앞으로 셀카를 찍거나 야간에 사진을 찍을 때는 무조건 빅스비에게 시켜야 할 것 같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아이가 또 시리를 불렀다. 시리는 사진을 찍어주지는 못했다.


이 글은 삼성이 좋고, 애플은 별로다 혹은 삼성이 잘났고, 애플은 후지다 등의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아이들과 놀면서 알게 된 사실을 옮기는 것일 뿐.


물론 나는 조건이 맞았다면 당연히 삼성이 아닌 애플을 선택했을 것이다. 돈이 좀 더 많았거나, IT 지식이 조금만 더 많았다면 나는 99.9% 확률로 삼성이 아닌 애플의 아이폰을 구매했을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경제적 여건이 안 되고, IT 지식이 부족해서 원하는 만큼 활용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한 아이폰을 선택하지 못했다.


겨울잠을 자고 싶다


어느새 연말이 다가왔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불리는 날인데, 실제 예수 탄생과는 전혀 관계없는 날이지만,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으므로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수긍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나는 절대 예수와 산타와 성모 마리아를 생각하지 않고 이 이틀을 보내는 것으로 작은 반항을 해본다.


연말 연초에 늘 드는 생각은 인간도 겨울잠을 자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공상. 겨울 내내 잠을 자고 봄에 깨어나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 시간이 조금 짧기는 하지만 종종 연말에는 겨울잠을 자긴 한다. 31일 밤에 술을 진탕 마시고 뻗었다가 1월 1일 밤에 정신을 차리니 짧은 겨울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다만 그게 하루가 아니라 한 일주일, 아니 이주일 정도 이어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공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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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2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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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12-25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와 빅스비는 스마트폰에 있는 인공지능인가 봐요 말로 하면 뭔가를 해주는군요 신기합니다 시리는 왜 말을 잘 못 알아들을지, 한국말 모르는 건 아니겠지요 이런 말을... 사람도 겨울에 겨울잠 자고 일어나면 좋기는 할 텐데, 요새는 겨울에 그렇게 춥지 않아서... 어제부터 조금 추워지기는 했네요


희선

2021-12-26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