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스윈돌의 Hope
찰스 R. 스윈돌 지음, 이장우 옮김 / 요단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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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 인물 중에 '더 이상 내게 희망이 없다', 고 자책했을 사람을 한사람을 꼽는다면 내 생각엔 베드로가 될 것 같다. 그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던 날 밤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뒤로하고 예수님은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애재자 중 한사람이자 예수님과 함께 물위를 걸은 유일한 사람. 오병이어의 기적 한 가운데 그가 있었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자리에도 그는 빠짐없이 등장했다.

 

천한 직종 중 하나였던 어부가 누군가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당시로선 기적이었다. 적어도 제자라면 스승에 필적할 만한 성품과 자질이 있어야 한다는 것쯤 그때나 지금이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만약 베드로에게 제자가 될만한 특성이 조금도 없었다면 그것은 스승의 전적인 은혜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렇게 베드로는 조건없이 선택을 받았다. 이후 베드로의 행동은 대부분 스승의 근심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내치지 않았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돌봐준 스승을 등뒤에서 비수를 꽂았으니 베드로에게 무슨 변명의 여지가 있었겠는가.

 

예전처럼 이번에도 예수님이 먼저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으심으로써 베드로에게 한이 된 세 번 부인의 고통을 어루만지셨다. 그는 약속대로 양을 먹이는 목자의 삶을 기꺼이 살았다.

 

『찰스 스윈돌의 호프』는 그 베드로가 쓴 편지를 주제로 삼고 있다. 더 이상 자신에겐 희망이 없다고 장탄식을 쏟아냈을 베드로가 당당히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동일하게 베드로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 이유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베드로의 자기 고백서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전서에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본 저자는 우리가 자주 부딪히는 다양한 사건의 배후에 감춰진 희망이라는 보석을 텍스트로 삼은 베드로전서를 통해 캐내고 다듬어 어떤 보석보다 찬란한 보석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희망은 바란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만약 희망이 그렇게 해서 얻어질 수 있었던 것이라면 베드로야말로 그 일에 적임자였을 것이다. 베드로는 말보다 행동이 빨랐다. 무슨 일에든 의협심이 강해서 예수님을 지키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하지만 베드로는 매순간 절망해야 했다. 베드로의 희망은 언제나 희망사항으로 그쳤을 뿐이다. 수습은 언제나 예수님의 몫이었다.

 

베드로의 과거를 통해 드러난 그의 희망은 절망을 배태하는 반쪽자리 희망이었다. 그에겐 예수님이 필요했다. 예수님을 통해서야 비로소 완전한 의미의 희망을 지닐 수 있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후 베드로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좌충우돌하지 않았다. 헌신적으로 복음 전도에 앞장섰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그것 때문에 주님을 부인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베드로라는 몸은 그대로 있는데 그의 인격이 바뀐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야말로 희망의 본래 이름이다. 무엇이 되려고 노력하기 전에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덧입으려고 애써야 할 일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과정이 선행될 때 희망은 그로부터 나올 것이며 그것이 우리를 더욱 복음에 매달리도록 만들 것이다. 찰스 스윈돌이 말하는 17가지 희망의 고갱이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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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홍대리 5 - 나는 내가 정말 좋아
홍윤표 지음 / 홍카툰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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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안됐을 때다. 동료가 배꼽 잡는 만화가 하나 있는데 어디 한 번 읽어 보려나며 건네 준 책이 있었다. 제대로 배꼽 잡힌 난 그날 이후 이 책의 후속탄을 손꼽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천하무적 홍대리』 시리즈 1, 2, 3.을 필두로 제목을 달리해서 5탄(『나는 내가 정말 좋아』)이 나온 이후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 홍운표의 작품은, 기성작가에 비할 때 붓터치가 세밀하지 못하고 스토리의 얼개 또한 엉성한 면이 있었지만 현직 대리라는 강점을 십분활용함으로써 당시로선 성인 만화의 영역을 확장하는 탁월한 역할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성인만화는 속칭 야한 만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그런 형식의 만화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만화 시장는 성인용 만화와 이미 탄탄한 저변을 확보한 비성인용 만화가 양분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때에 직장 생활을 하며 취미활동으로 만화수업을 받던 직장인이 직장생활을 리얼하게 그려내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것이다.

 

지난 8월 잡코리아가 직장인 701명을 대상으로 '연령대별 스트레스 요인과 해소법'을 설문한 결과, 직장인 스트레스 요인 1위로(복수응답) '상사/부하와의 관계'(39.1%)가 꼽혔다. 이어 '자기 계발'(38.2%)과 '업무 성과'(34.0%)가 30%대의 높은 응답률을 보이며 직장인 스트레스 요인의 '빅3'를 이뤘다. 천하무적 홍대리 시리즈 속의 홍대리 또한 같은 스트레스를 안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하지만 그에겐 남다른 데가 있다.

 

상사 앞에서 면박을 당할 때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는 애교 넘치는 스트레스 해소법을 익히고 있는 것. 그것 말고도 다양한 해소법이 등장하는데, 홍대리가 직면한 직장생활이 한눈에 보기에도 우리의 직장생활과 똑같다는 공감에 독자는 그와 자연스럽게 연대감을 형성한다. 그가 상사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에 같이 아파하고 미진한 업무성과에 안타까워한다. 자기 계발을 위해 애쓰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서글픔에 잠시 말을 잊기도 한다.

 

직장은 끊임없이 성과 측정이 이뤄지고 성과에 따른 평가가 주요 관심사로 부상하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다. 그렇다 보니 상사와 부하는 긴장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스트레스가  상당하리라는 점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그런 관계를 종식시킬 특단의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스트레스 해소법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으로 남기 마련이다.

 

해소법은 취향에 따라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나타나겠지만 각 사안마다 직접적으로 주먹다짐을 통해 해소할 수 없는 노릇이고 보면 대리만족을 통한 해소법이 적절하고 유용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부분, 곧 현실적 제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틈새를 이 책이 유효적절하게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대리만족을 극적으로 제공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바로 그런 특장이 투박한 구성과 밋밋한 붓터치를 충분히 상쇄하고 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저자의 만화가 다시 세상에 나오기를 기대하며 그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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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 이펙트 -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
필립 짐바르도 지음, 이충호.임지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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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쯤 전, 하나TV의 영화 채널을 검색하다가 지금은 제목을 잊어버린 외국영화를 선택한 적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사회심리학자의 실험에 동의한 일단의 사람들이 죄수와 간수로 나뉘어 한 감옥에 배치된다. 그들에겐 수주의 실험기간을 마치면 수당을 받고 그곳에서 나올 수 있다는 조건이 붙는다. 감옥의 운영 원리는 간단했다. 죄수는 죄수역에 충실하고 간수는 간수역에 충실할 것. 그런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연구자의 통제가 심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간수들이 본래 목적을 벗어나 죄수들을 포악하게 다루기 시작했던 것. 그것에 맞춰 죄수들도 대응수위를 높이고, 결국 서로 죽이는 데까지 이른다. 실험은 파국으로 끝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깊이 사유했다. 그리고 그런 폭력성이 실험이라고 하는 약속된 공간 안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에 의구심을 던진 한편으로 그런 조건이 갖춰진다면 실제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만큼 영화는 복잡했다. 물론 영화가 복잡한 것이 아니라 내 머리가 복잡했다고 해야 옳다. 바쁜 생활 탓에 충격적인 영화의 잔상은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리고 다시 며칠 전, 모 일간지 북섹션 기사에 시선이 꽂혔고 그와 동시에 난 다시 처음 그 영화를 본 날로 빠르게 돌아갔다. 1971년 실제 같은 실험이 있었단다. 그리고 실험의 윤리성 문제가 불거졌고 실험은 거기서 중단됐다. 그 실험의 주인공은 심리학자 짐바르도 교수다. 그는 이 책, 『루시퍼 이펙트』 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기사에서 '스탠퍼드대 지하 모의 교도소 실험'(SPE : Stanford Prison Experiment)의 원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인간 행동이 얼마만큼 합리적 선택과 자유의지를 따르는지, 강력한 상황적 힘에 좌우되는 건 아닌지 판단하려 했다. 선하고 지적인 평범한 대학생들이 교도관 역할을 맡아 악에 물들거나 수감자가 돼 병적인 희생자가 돼 가는 범위와 속도에 놀랐다."(2007.11.24일자, 조선일보 토일섹션 Books 2면, '수줍음의 감옥에서 당신을 해방시켜라' 중 일부)


저자는 상황적 강제(situational force)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풀이하면 이렇다. 실험의 예에서와 같이 어느 누구라도 특정 상황 가운데 속하게 되면 이성을 잃고 상황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것. 간수라는 우월적 존재와 피동적인 죄수, 그들을 지켜보는 연구자들, 그리고 이들 모두를 둘러싼 실험 환경이 상황적 강제의 동인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연구자가 폭력을 조장하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보면 간수들이 죄수들에게 행한 약간의 폭력을 연구자들이 통제수단으로서 적절하다는 판단으로 용인한 결과 간수들의 수위가 높아진 면도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로부터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은 간수들이 폭력의 수위를 높여간 예는 상황은 다소 다를지언정 우리 주위에서도 심심치 않게 목도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직장 내에서 동료의 부당한 대접, 곧 무시하는 듯한 언행 등을 조직 차원에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경우 그것이 조직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깨진 유리창'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런 언행을 방조할 경우 차츰 상대방의 높아진 수위를 걷잡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고 상황논리를 전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나면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결과가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원인 제공자에 대해 상응하는 처벌이 따르지 않는다면 또 다른 형태의 혼란이 불가피하다.

 

상황적 강제는 폭력성을 검증하는 탁월한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자발적 동조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이중성은 임지현 교수의 '대중독재'(『대중독재』, 책세상)라는 용어에서도 만나게 된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 세력 하에서 국민의 행동은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고, 폭력적 상황에서 운신의 폭이 크지 않은 국민에게 세력이 쏟아놓은 폭압과 민주주의 등 가치 말살의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바로 그런 인식에 균열을 일으킨 것이 바로 대중독재라는 용어다.

 

그 용어는 일인 독재라는 말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대중의 방조 또는 동조 없는 독재가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리고 그런 일단의 논리에 히틀러 독재 하의 독일과 5.18 광주 학살 세력 하의 한국이 하부구조를 이룬다. 동조는 아니어도 방조가 있었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독재가 가능했다는 임 교수의 말은 국민들 또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며 역사 앞에 깊은 반성과 성찰을 내놓아야 한다는 공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대중에게 눈을 돌리느라 독재자와 그 수하들의 행태를 또 다른 형태로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점을 어디에 꽂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는 논리가 가진 한계일 것이다. 물론 그런 설익은 논리가 다듬어지면 사회 전체를 해석하는 일반 논리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고, 다양한 비판과 수용의 과정이 국민의식을 더욱 성숙케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이론이든 지식의 시장에 과감히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장은 사회가 유연해질수록 더욱 확대될 것이다.

 

상황적 강제가 지닌 함의가 폭력성의 근원에 대한 심층적인 사고와 폭력의 내면화 과정의 신속성에 대한 재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각의 폭이 넓다. 일견 상황적 강제는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과도 연결된다. 원형감옥 안에 갇힌 죄수들은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탑에 주목한 결과 간수들이 보건 보지 않건 자발적으로 수칙을 준수하고 복종하게 되는데, 이런 일련의 결과가 위 모의 교도소 실험에서의 수감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수감자들이 연구자가 생각한 것 보다 신속하게 자신들이 취할 행동양식에 적응하고, 교도관의 폭력을 당연한 물리력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상황적 강제의 힘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곧 상황의 힘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구속하는 변수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난 지난 2002년 『파놉티콘』(홍성욱 저, 책세상)을 읽고 다음과 같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고민이 여전히 그 그늘을 거두지 않고 있다.


"전통적인 파놉티콘의 메카니즘을 간수의 시선이 중요한 코드라는 의미에서 '시선 파놉티콘'이라고 한다면, 현대의 통제 메카니즘은 정보가 키워드라는 점에서 '정보(전자) 파놉티콘' 이라 할 수 있다. 정보는 벤담의 파놉티콘에서의 시선을 대신하여 통제의 기제로 작동하면서 시선이 가지고 있던 지역성을 뛰어넘어 그 감시 능력을 범사회적·전지구적으로 확산해 나간다. 간수가 감시탑에 숨어서 감시하던 중앙 통제 메카니즘이 감시의 층위를 다양화함으로써 보편적인 감시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2002년, 지금은 폐쇄된 blog.co.kr에 올린 글의 일부)


상황이라고 하는 변수에 다시 주목하게 된 촉매는 이미 밝혔듯이 제목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한편의 영화다. 그것이 점화체가 되었고 아침에 배달된 신문 기사가 연상작용을 일으켰다. 곧 과거에 읽은 책의 내용이 떠올랐고 마침내 『루시퍼 이펙트』를 꼼꼼히 읽어봐야겠다는 의지로까지 발전했다. 폭력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깊이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제라는 생각이 그 중심에 있었다.

 

력의 양태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되어 왔다. 따라서 폭력의 재생산과정을 막으려면 여하한 형태의 폭력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본질적인 의미의 폭력성에 주목해야만 한다. 같은 이유에서 이런 부류의 책이 자주 출간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그 책들의 내용이 잠자는 의식을 깨우는 기제로 작동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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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훌 2007-12-13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엑스페리먼트"라는 독일 영화를 보셨던거군요.
저도 그 영화 보고 실화인줄 알면서도 상당히 충격받았었는데;; ㅡ.ㅜ
 
고흐를 만나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림, 메릴린 챈들러 맥엔타이어 시, 문지혁 옮김, 노경실 글 / 가치창조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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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를 만나러 가는 길은 고단했다. 네덜란드의 브뤼셀, 헤이그, 앙베르와 프랑스 파리, 아를에 이르는 수천 킬로미터의 여정을 쫓아 그가, 몇 군데를 제외하곤 누렇게 앉은 흙먼지가 채 털리지 않은 도시풍의 구두를 신고 구부정한 허리와 앞뒤로 하릴없이 흔들리는 손에 의탁한 채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을 그 길을 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 길 위로 일렁이는 짙푸른 밤하늘과 어지럽게 날리는 별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상파와 일본판화 작품의 영향으로 색채가 더욱 강렬해진 그의 그림은 햇빛이 밝게 쏟아지는 아를과 한 몸이 된지 오래인 듯 했다. 거리엔 사람들로 북적였고, 저 멀리 언덕 위로 갖가지 꽃들이 제 흥에 겨워 앞다퉈 피고 질 때도 고흐란 사내의 눈은 겨울 들목의 11월, 그것도 스산하리만치 차가운 바람이 들녘을 따라 세차게 불어닥칠 기세로 몸을 터는 늦은 가을의 짙푸른 하늘에 닿아 있었다. 그런 탓에 그의 눈마저 짙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쏘아보는 듯한 그의 눈은 그 기세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발작과 진정이 반복되는 혼란한 생은 그가 마지막 했다고 전해지는 말 한마디에 집약적으로 모아진다.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있는 것 그 자체다." 발작이 멈추면 그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시력이 약한 탓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정교하게 그려진 별빛과 달빛의 파문은 혼란한 심상의 반영이었을 것이며, 어색한 구도와 빠르게 흐르는 하늘의 움직임은 언제 다시 발작이 올지 모르는 불안 심리를 투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자기 생이 줄 수 없는 안정감을 그렇게 반대급부적으로 욕망하고 다시 배설하는 그의 지향은 짙푸른 하늘도, 그렇다고 농부의 한가로운 낮잠도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끊임없이 밝은 빛을 표현해냈으며 태양이 직접 묘사되지 않은 작품 속에서도 쉽게 그 빛을 찾아낼 수 있을 만큼 대상을 밝게 그려냈다.

 

그는 이카루스가 태양을 욕망하듯이 그렇게 빛을 향해 질주해간 몽상가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아챈 그는 결국 자신을 향해 붉은 총탄세례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빠르게 피었다 사라지는 마지막 불꽃, 그것은 그의 생사와 닮았다.

 

책을 읽는 동안 고흐의 심장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불규칙하게 박동하는 심장은 때론 가파르게 언덕길을 넘어갔고, 때론 숨죽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잦아들었다. 이 책이 그림과 글로만 읽히지 않은 이유다. 한 사내의 고독과 열정을 선 굵게 담아낸 솜씨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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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현 2007-12-14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가 멋있네요 ㅋ 마지막에.. 책을 읽는 동안 ~ 고흐의 심장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 이 책 한 번 읽어 봐야겠네요
 
프레임 -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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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다." 

이 책을 쓴 저자가 궁극적으로 또한 지속적으로 말하는 몸말입니다. 심리학에서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어떤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사뭇 달라진다는 얘기겠지요. 



펩시가 콜라전쟁에서 코카콜라를 이길 수 있었던 힘도 만년 2등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준 프레임을 바꿨기 때문이랍니다.  펩시는 코카콜라의 성공요인이 콜라병에 있다고 생각했다는 군요. 그래서 콜라병을 능가하는 병의 디자인에 골몰했답니다. 

하지만 직원 존 스컬리는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곤 소비자들이 콜라를 사면 남김없이 다 마시더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펩시병을 코카콜라병보다 크게 만들었구요. 소비자들이 들고 가기 편하게 다양한 크기의 패키지 상품을 시장에 내놨답니다. 이쯤 되면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요.

 

기존 프레임은 일종의 강박관념과 같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직 그것 하나 외엔 눈에 들어오는 게 없게 되는 거구요. 조직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그렇게 되면 다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와 우리 조직이 그런 상태라면 의도적으로라도 전혀 다른 시각에서 사물을 관찰하려고 부단히 힘써야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지요. 잘 맞는 옷처럼 몸에 익숙해져 있을 테니까요. 존 스컬 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불편을 감수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프레임을 바꾼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외부 저항이 만만치 않고 새로운 프레임이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또한 작지 않습니다.

 

최근 제 주변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직장이란 원래 승진 대상 자리가 늘 모자라지요. 그래서 다들 열심히 그 자리를 향해 달려갑니다. 편법도 마다하지 않구요. 어떤 줄이든 잡으려고 부단히 애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승진하는 것은 아니어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체념에 빠지는 게 다반사입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지요. 자리가 없어서 그렇게 저렇게 험한 꼴을 당하면 말이죠. 자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한데도 실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생각하기에 귀찮기도 할 테구요. 그런다고 자리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많겠지요. 여러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책의 주제에 한정해 보면 견고한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프레임은 늘 그렇습니다. 결과가 눈에 확 들어오지 않습니다. 한발을 내디디면 그만큼의 길이 열리는 묘한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어떤 프레임을 갖고 사는지, 또 어떻게 하면 쓸모 없는 프레임을 새 것으로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제가 다양해서 눈에 잘 들어오구요. 무엇보다 책을 읽으면서 내 경우와 견줄 수 있어 좋습니다. 꽉찬 게살처럼 내용이 알찬 이 책을 여러분께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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