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소설이 주는 매력 중의 하나를 물으면 난 서슴없이 극적 긴장감을 얘기한다. 그것이 빠지면 단팥 없는 빵처럼 밋밋하기 때문이다. 어릴 적 괴도 루팡이나 셜록 홈즈 이야기를 넋을 놓았던 이유도 그 끝 모를 팽팽한 긴장감이 시종 내 혼을 빼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들 이야기가 몇 년 전 복간되면서 그 시절을 추억하는 또 다른 맛을 보기도 했는데, 우리 작가의 작품 속에서 그런 긴장감을 누릴 수 없다는 게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었다. 물론 추리 소설을 독자적인 영역으로 한 시장이 형성되지 못한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였을 텐데,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해갈의 필요를 끝끝내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게 2% 부족한 느낌 반, 체념 반 하고 있던 차에 뜻하지 않게 한 소설과 마주하게 됐으니 내겐 단비와 같았다. 한글을 둘러싸고 벌어진 양대 세력간의 고투를 실감나게 그려 낸 『뿌리깊은 나무 1, 2』가 그것이었다. 극적 긴장감만을 놓고 보았을 때 초반부의 스토리 전개는 외국 추리 소설에 비해 뒤떨어진 감이 없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드러난 밀도는 그것들에 못지 않았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나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의 탄탄함은 그것들을 앞서고도 남았다.

 

이야기의 대강은 이렇다. 궁중에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당연히 수사반이 편성되고 주인공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없이 사건의 실체가 하나 둘씩 옷을 벗기 시작한다. 좁혀져 가는 수사망과 드러나는 몸통. 그 곳에서 왕권과 신권이 강렬하게 대립한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한글 창제 세력과 소중화 세력간의 충돌이 어떻게 막을 내릴지 장담할 수 없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과연 역사는 반복하는가, 하는 생각(고리타분한)을 했다. 그렇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역사를 사람들이 살아낸 이야기라고 투박하게 말하면, 적어도 전반적인 모양은 그리 다르지 않다는 데 생각(뻔한)이 미쳤다.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대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양자간 다툼은 필시 대의와 명분이 진두지휘함으로써 끊임없이 쟁투하도록 추동하는 것이 인간사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립과 갈등이 가져올 몸서리를 견뎌내지 못하는 허약한 한 인간으로서, 비록 소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려낸 현실이 현실과 중첩되는 한 그런 몸서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그 질문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대세’가 다수가 가는 길이 아닐 수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세는 일종의 흐름과 같아서 비록 처음엔 미미한 세력으로 출발했다해도 그들의 사상과 신념이, 그리고 현실을 비추는 비전이 시장에서 힘을 얻으면 큰 물줄기를 형성한다는 사실 앞에 일종의 경외감이 들기도 했다. 독자적인 의학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집대성한 책을 조선의학이라고 당당하게 부를 수 없었던 시절에 자기 글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는지 알만 했다. 무심코 지나쳤던 역사적 사실이 당시엔 결코 당연한 것으로 받아질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어떤 일이든 고충 없이 이뤄지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울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나의 독법(讀法)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소설은 소설로서 읽혀야 마땅하고, 소설이 깔고 있는 허구적 현실을 과다하게 현실과 매치시키려는 노력이, 요즘 뜨는 역사 드라마를 대하는 일반의 태도와 같이 또 다른 폐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사실(史實)로서의 역사가 그려내지 못한 정황을 소설적 장치를 통해 들여다보고 난 심경이란 실로 평상심을 유지한다는 게 부질없는 짓일지 모른다는 고통스런 인식과 마주한 그런 기분이었다. 변명하자면 역사소설은 역사가 놓친, 부딪히고 깨어진 인간군상들의 모습이랄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소소한 일상이라든지 하는 부분들을 채우는 역할을 자임해도 되겠지 싶었다. 그래서 다소간 오버하더라도 소설적 현실을 통해서라도 시대적 성찰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면 『뿌리깊은 나무 1, 2』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비록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이긴 하지만 역사는 반복될 수 있으므로 나 또한 역사적으로 기록될 인물일지 모른다는 엄밀한 역사의식을 지닌 인간으로 살지 않을 수 없다는 과도한(!) 인식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건데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세력에서 나오지 않음도 실감할 수 있었다. 깨어있는 한 사람의 역할이 시대를 일깨운다고 하는 뻔한(?) 이야기가 소설 속 페이지에서 성큼 걸어나오는 것도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