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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노서아 가비, 러시아 커피를 음차한 말이다. 얼음 궁전에 사는 대제의 근엄한 얼굴과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떠올리게 하는 러시아가 초반 배경을 이룬다. 광대한 러시아 숲에 둥지를 튼 주인공. 무언가 걸맞은 일을 성취할 것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주인공은 주인 있는 숲을 팔아치우는 사기단의 일원이다. 이미 낙관위조로 명성을 올린 그녀였다. 어느 날 같은 일을 하는 사기꾼과 운명적으로 만난 주인공은 그와 함께 조선 황실로 흘러든다. 당시 조선은 고종 치세였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비통한 죽음을 커피로 달래고 있었다. 평소 고종은 커피를 우유와 설탕을 듬뿍 타서 먹곤 했었다. 명성황후가 죽기 전까지는.
자기 대에 외세의 침탈을 봐야하고 사랑하는 여인마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한의 세월에 쓰디쓴 커피가 제격이었다. 익히 아버지를 통해 러시아 커피의 단맛과 쓴맛, 향취와 아취를 모두 경험한 그녀가 고종의 커피 수발을 하게 된 것이 당연했다. 조선시대판 바리스타.
일본과 중국, 러시아의 각축장이 된 대한제국의 운명은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어느 시대고 한나라의 왕이 타국의 공관으로 피신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것은 국권 침탈의 예정된 수순 위에 놓인 수치스런 흔적이었다. 고종은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러시아 벌판에 벌거벗은 채 한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홀로 선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고통 자체였을 세월은 차마 죽지 못해 사는 세월과 다르지 않았다. 창백하다 못해 검게 변한 얼굴은 커피색과 같았고 커피의 쓴맛은 전부 헐은 위장과 닮았다.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은 커피원두를 중앙으로 가른 골과 같았다. 뜨거운 찻잔 위로 아지랑이 피듯 솟는 김은 곧 사라질 터였다. 고종은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운명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그런 고종의 한마디 한마디가 예사롭게 들릴 리 만무했다.
불과 100년 전의 일임에도 우리에게 대한제국은 아득하게 기억된다. 대한제국은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낯설다. 왕을 존경의 대상으로 추억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은 일제가 강제한 현실이기에 앞서 대한제국의 총체적 무능이 결과한 그 시대의 미래였다.
최근 고종의 국권회복을 향한 줄기찬 노력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지만 그것이 당시 국가의 최고수장으로서의 그의 위치를 감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커피는 여성성을 상징한다. 3국이 옥죄어오는 상황에서 고종은 커피가 아니라 칼을 들었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이래저래 이 소설을 대하는 심경이 날카롭지 않을 수 없다.